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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말초 Jan 31. 2024

당도할 곳

재주넘기 네 번째 주제: 당도할 곳

언젠가 기필코 당도하겠지만, 꼭 한 번 이르고 싶었던 곳에 갑니다. 길었던 색연필은 짧아졌고 짧았던 머리카락은 길어졌습니다. 길고 짧아진 것을 살피며 시간을 따라갑니다. 어딘가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딘가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작별과 만남 사이에 있는 셈입니다.


엉겁결에 받은 초대에 응하는 사람처럼, 주섬주섬, 그곳에 다다를 채비를 합니다. '여행지에는 밤에 도착하는 편이 좋다' 누군가의 여행기에 적힌 문장을 떠올립니다. 애석하게도 도착지가 밤인지. 동틀 무렵인지. 어스름 빛이 감도는 저녁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 땅을 밟고 온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밖에.


꼭 원한다면, 여명기 이길바랍니다. 동 터 오르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새벽녘으로 갑니다. 모래를 밟고 눈을 밟습니다. 수평선과 지평선을 바라봅니다. 해가 타오릅니다. 어제도, 엊그제도, 같은 태양이 늘 타올랐다는 사실을 잠시 잊습니다. 어떤 망각은 환상이 됩니다. 오늘만 타오르는 태양을 새삼스레 바라봅니다. 여명기가 시작됩니다.


짙게 타오르는 붉음입니다. 진해지고 지펴져야 할 마음을 생각합니다. 수 없이 옅어지고 사그라들어 재만 남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다시 짙어질 수 있을 겁니다. 무수한 번복을 망각하고 환상을 갖습니다.


당도할 곳에 당신이 주섬주섬, 챙긴 것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나는 교과서에서 봤던, 떠오를 듯 말 듯 가물가물한 시 하나를 챙겼습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시인은 정정당당하게 붙잡힌 소설가를 위하여, 왕궁의 음탕에 대하여, 분개하는 대신 기름 덩어리 가득한 갈비를 준 설렁탕집주인에게, 20원을 받으러 오는 야경꾼들에게 분개합니다. 조그만 일 에만 분개합니다. 결국 마지막은 모래와 바람과 먼지와 풀에게 자신의 적음 을 묻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모래와 바람과 먼지와 풀은 답할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도 답할 수 없다는 것을. 답을 아는 사람은 오직 나라는 것을.


발신인과 수신인이 모두 나뿐인 물음을 가지고 새벽녘으로 갑니다. 오늘만 타오르는 태양을 보고 묻습니다. 나는 얼마큼 적으냐. 태양 역시 답이 없습니다.



당도한 곳에서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 비겁함을 멈출 수 있을까요

말할 수 없는 탄식을 가질 수 있을까요

*'누구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지?'**'누구의 이름이 불리지 않지?' 질문할 수 있을까요

움켜쥔 자아를 놓을 수 있을까요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태양은 여전히 답이 없습니다. 이 또한 내 몫의 답입니다. 당도한 곳에서 차근차근 답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당도할 곳이 더욱이 여명기이길 바랍니다. 짙어지고 타오르길 바랍니다. 함께 새벽녘에 온 당신께 부탁합니다. 답은 나의 몫이지만, 답을 찾아 걷는 동안, 그때 함께 본 태양을 자꾸만 일러주세요. 잊지 않게. 우리 곧 새벽녘에서 마주합시다.




*라디오 피디인 정혜윤은 시사 뉴스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지낸다. 그가 자주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누구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지?' 더 크게 들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목소리는 너무나도 많다. (날씨와 얼굴, 이슬아)

**이태신의 아내는 이름이 없다. 계백 장군 이래 장군의 아내는 이름이 없다.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는 건 글방에서 해야겠다. (어딘의 '서울의 봄' 감상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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