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말초 Apr 22. 2024

푸른

가습기 소리와 이따금씩 나던 키보드 소리로 가득 찬 겨울의 시간. 어디라도 나가야 하는데 어디도 나갈 수 없었다. 겨우 발걸음을 뗀 곳은 여유와 설빈의 공연이었다. 누군가 그들의 목소리를 이렇게 표현했다.      


“여유의 보컬은 부드러우면서도 바다냄새가 난다. 바다는 오래되었고 고집이 세다. 설빈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그것은 여유의 바다와는 다른 곳, 따듯해서 늘어지는 바다가 아니라 황량한 겨울의 강릉이나 속초, 혹은 북유럽의 바닷가다”


공연이 시작되기 십분 전 공연장에 도착했다. 도착 전까지 이어폰에는 여유와 설빈의 음악이 흘렀다. 입장을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보였다. 처음 봤지만 같은 음악을 듣는다는 이유로 반가웠다. 반가움을 느낀 지 참 오래되었다. 반가운 사람들의 뒤통수를 보며 줄을 서 있다가 들어간 공연장은 소극장 같았다. 작고 좁아서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거리였다. 아직 객석이 채워지지 않은 터라 이곳에도 앉아보고 저곳에도 앉아보았다. 어떻게 하면 제일 멀리서 제일 자세히 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너무 가까울 때는 오히려 가까운 마음으로 보기 어려울 때가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마음껏 가까운 마음으로 봐도 무관한 자리에.      


여유님과 설빈님이 무대에 올랐다. 영상으로 내내 보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가웠다. 두 번째 반가움이었다. 그들은 3집 앨범에 실린 곡들을 하나씩 순서대로 불렀다. 하나의 앨범을 만들 때 곡의 순서를 정하고 그전에 제목을 정하고 제목 이전에 가사와 멜로디를 쓰고 그 이전에는... 무엇이 있을까. 대체 무엇이 있기에 이토록 따듯하고 황량한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을까. 훌륭한 운문가들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그들의 산문이 궁금해진다. 분명 곱절의 산문을 응축해서 가장 진한 것만 남긴 것일 테니깐. 시를 읽을 때도 같은 마음이다. 음악과 시는 꼭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닮았고, 나는 운문가들이 좋다.      


막바지에 다다른 공연. 무대에서는 낯선 멜로디가 흐른다. 3집에서 가장 적게 들었던 ‘푸른’이라는 곡이었다. 무대를 보며 이 순간 이후로는 ‘푸른’을 가장 많이 듣게 될 거라고 직감했다. 뭉툭해진 몽당연필처럼 닳고 닳은 음악이 되겠구나. 너무 쨍한 것과 너무 푸른 것은 사람을 슬프게 만든다. 슬프게 좋은 음악은 나를 잘 돌보고 싶게 만든다. 어떻게 해야 잘 돌보는 건지 모르겠어서 우선 양손으로 반대팔을 몇 번 쓰다듬었다.


푸른 푸르른 너 바라보다가

나는 울음을 또 한 겹 입었다     


푸른 푸르른 여유와 설빈을 바라보다가 울음을 한 겹 입었다. 그런 울음이라면 겨우내 입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여유님과 설빈님이 관객들에게 선물한 떡을 먹었다. 떡과 그들의 음악은 목메게 한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목이 메게 푸른 것도 있다.






월요일 연재
이전 09화 호밀밭의 파수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