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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레디 Nov 24. 2024

드디어 개최해보는 교권보호위원회 3

이걸 왜 이제야 개최 하셨어요?

 병가에 들어선 지 2주가 지났다. 우리반 납쪽이 녀석이 뒤에서 신나게 내 쌍욕을 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나를 볼 때마다 동그랗게 웃음짓던 그 녀석의 얼굴이 나에겐 더욱 큰 배신감으로 다가왔다. 우리 사이가 그렇게 나쁘진 않다고, 사실은 어느정도 녀석을 귀여워했기에 충격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캡처본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수업을 진행하고 아이들을 지도할 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몰라도 내 마음은 단단한 돌덩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 관리자분들께 내 증상을 알리고 정상근무가 어렵다는 의사를 밝혔다. 납쪽이의 어머님을 만난 후였다. 납쪽이의 어머님은 아이의 쌍욕 캡처본을 보고 아이의 언어생활이 친구들과 어울리며 좀 거칠어졌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아이의 뒤를 항상 쫒아다니는 것도 아니니,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수는 없다는 말씀도 하셨다. 아직 미성년자인 납쪽이의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있는데 납쪽이가 스무살 먹은 성인이라도 된 것 같은 반응이었다. 제대로 된 사과를 받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간 녀석이 학교에서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르고 이것이 내 선에서는 해결이 어렵겠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납쪽이의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학교 방문을 요청했다. 부모님은 일이 바쁘다며 연달아 방문을 거절하셨다. 내가 업장에 방문하겠다는 말씀을 드려도 마찬가지였다.


 교권침해 교원 보호휴가(교권침해를 당한 교원은 학교장에게 5일의 휴가를 요구할 수 있다. 피해사실이 심각할 경우에는 학교장은 피해 교원에게 6일의 공무상 병가를 더 부여할 수 있다.)에 들어서고 첫 주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스트레스가 정말 신체에도 이상 증세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내 몸으로 느꼈다. 사람은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으면 심장이 빨리 뛰기도 하고 이명이 들리기도 하고 손발에서 하루종일 미친듯이 땀이 나기도 한다. 암으로 가는 급진적인 도약이다. 택시를 타다가 한번 실신하기도 했다. 처음 겪어보는 일들이었다.


 1,2주 쉬고는 내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에 졸업식까지 병가에 들어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내가 출근을 못한다고 하니 학교도 난리가 났다. 교원이 한 달 이상 자리를 비울 때 학교는 기간제 교사를 고용할 수 있다. 한 달 미만은 시간 강사만 고용할 수 있는데 시간 강사에게는 수업 외 학교 업무를 부여하지 못한다. 병가에 들어선 첫 주, 한 달 이상 진단서를 가져와달라는 요청에 병원을 정말 다양하게도 돌아다녔다.


 정신건강의학과는 쉽게 진단서를 잘 내어주지 않는다. 적어도 1달 이상 병원 진료를 받아야 진단서를 내어주는 곳이 대부분이다. 두번째로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선생님께 내 상황을 모두 말씀드렸다. 2년 전, 교권침해로 피해받는 교사의 실상을 밝히는 뉴스 인터뷰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 뉴스 영상도 보여드렸다. 2년 전 지역에서 유명한 아이들을 맡을 때 사실 이보다 더한 일들도 많이 겪었다.(왜 자꾸 그런 일이 너에게만 생기냐고 물으신다면, 이런 일을 겪는 6학년 교사들은 정말 많다. 2년 전 아이들은 지역 전체 초등교사들이 존재를 알고 있는… 말을 줄이도록 하겠다. 그리고 나는 슬프지만 운이 좀 없는 편 인것 같다. ) 내가 겪은 교권침해와 관련한 자료들도 모두 보여드렸다. 의사선생님의 진단으로

나는 중증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의사선생님께 진단서를 받고 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많이 흘렸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나의 고통을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학교에 진단서를 보내고 나서도 기간제 교사를 구하기 어렵다는 관리자의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6학년에, 교권침해로 병가 들어간 자리를 누가 맡겠냐는 것이었다. 내가 당장 죽겠어서 들어간 병가지만, 내 병가로 학교 운영에 지장이 생기는 것 역시 사실이기에 죄책감이 들었다. 결국 한 달만 쉬고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우리반은 납쪽이 녀석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내가 한 해를 데리고 있던 예쁜 아이들도 분명 있으니까 말이다.


 교권보호위원회를 개최를 요구하고 2주 뒤 교권보호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나는 방문해 위원들의 질문에 내가 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진솔하게 대답했다. 1년간 납쪽이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며 위원 중 한분이 말씀하셨다.


교권보호위원회를 왜

이제야 개최하셨어요?



 교권보호위원회를 개최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행정력이 요구된다. 각 교실에서는 많은 아이들이 모여있으므로 문제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정말 심각한 사안이 아니라면 교사들은 자기 반 학생의 허물을 감춰주고 그러지 말아라 타이르며 데리고 있는다. 아직 자라나는 시기의 아이들이 실수를 하고 잘 못을 저지르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니까. 나도 납쪽이 녀석, 잘 데리고 있다 보내주고 싶었다. 뒤에서는 임금님 욕도 한다는데, 담임 교사라고 욕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다만… 서로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절대 안 들킬 상대와 뒷담화를 나눴어야지. 그 점이 많이 아쉬울 뿐이다.



 이런 일들을 겪어도 나는 내 직업이 좋다. 매일 하는 수업도 재밌고, 여러 아이들을 만나는 일도 좋다. 아이들의 인생 한 장면에 내가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요즘 세상에 교사가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세상 어디 안 힘든 직업이 있겠는가. 다 힘들어도 묵묵히 세상 여러 곳에서 자기 일을 해내는 거겠지. 내 야옹이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학교로 꼭 돌아가야겠다. 아자! 나는 할 수 있다. 항상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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