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자태다. 지하철에 올라 마지막 남은 빈자리에 앉았을 때 오른쪽 대각선 방향으로 그녀가 보였다. 7인용 좌석의 끝에 등을 대고 노약자 석을 향해 서서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짧은 머리의 굵은 웨이브가 점잖았다. 검은색과 흰색이 조화로운 비율로 섞여 회색인 것도 세련됐다.
그녀는 빈자리가 있었음에도 서서 온 것이다. 그도 지하철 좌석에 앉는 것을 좋아하지 하지만 빈자리가 남은 지하철에 혼자 서서 가는 것은 훨씬 더 싫어한다. 모두가 그의 서 있는 이유를 궁금해할 것 같아서다. 방금 그의 머릿속에 왜 그녀는 빈자리에 앉지 않고 굳이 서서 왔을까 언뜻 궁금증이 스친 것처럼.
그가 마지막으로 차지한 빈자리가 기피 대상일만큼 특별한 하자가 있는 건 아니다. 왼쪽에 앉은 학생이 좀 뚱뚱해서 그의 자리의 이십 퍼센트 정도를 무단점유하고 있긴 하지만 그녀도 그처럼 좌석의 팔십 퍼센트 정도면 충분해 보이는 몸이다. 군자역에서 종점인 장암역까지, 7호선의 승객 수는 한번 기운 가세처럼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줄어갈 뿐이니 학생은 곧 내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디서부터 홀로 도도하게 서서 왔을까.
옆모습만으로도 단아하다. 흰색 셔츠 위에 걸친 루즈핏의 회색 재킷은 우아한 찻잔과 받침처럼 같은 빛깔의 머리카락과 세트를 이루고 있다. 얇은 재질의 폭이 좁은 롱스커트가 자로 그은 듯 수직으로 곧게 발목까지 떨어져 있다. 흰 양말과 역시 흰 스니커즈가 깨끗하다. 온몸이 가려졌지만 여리여리하다. 무심한 듯 신경 쓴 옷차림, 멋쟁이다.
정차를 알리는 안내 방송에 7인용 의자 끝좌석에 앉아 그녀의 등 뒤에서 곤히 자고 있던 학생이 눈을 번쩍 떴다. 화들짝 하는 표정으로 엉덩이를 들고 일어서다가 그녀의 등을 살짝 건드렸고 뒤를 돌아본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학생은 미안한 표정을 짓고 그녀는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다시 안도하는 표정으로 주저앉은 학생은 잠시 망설이며 몇 번이고 그녀를 쳐다보더니 결심한 것처럼 일어나 그녀에게 말했다. 여기 앉으세요. 그녀는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그는 학생에게 복화술을 했다. 학생, 그러지 말아. 하지만 착한 학생은 다시 한번 권했다. 저는 괜찮으니까 여기 앉으세요. 이번에는 그녀의 목소리에 예리한 단호함이 실렸다. 괜찮다니까요. 학생은 뻘쭘한 표정이 된다.
그가 최근에 지하철을 다시 타게 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다. 노약자석에는 노약자만 앉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약자석이 비었더라도 노약자가 아닌 사람은 앉지 않는 것이 남의 집 문 앞에 있는 택배는 건들지 않는 것처럼 국민적인 불문율인 듯했다. 그렇다면 노약자도 일반석에 앉으면 안 되는 건가? 노약자와 일반인의 경계는 휴전선처럼 견고하여 절대 넘나들 수 없는 것인가?
그는 얼마 전부터 지하철에 무임승차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다. 더불어 노약자석에 당당히 앉을 수 있는 권리도 보너스로 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먼 거리라도 서서 갈망정 노약자석에는 앉지 않는다. 일반석에 앉아 텅 빈 노약자석에 앉을 권리가 없는 젊은이들이 서서 가는 것을 보면 그들의 자리를 빼앗은 게 미안할 때도 있지만 공식적으로 늙은이가 되는 것은 싫다. 그런데 노약자석에 앉을 권리를 얻었다는 것은 일반석에 앉을 권리를 잃었다는 것일까?
그는 잠이 들었다가 금세 눈을 뜬 것 같은데 이유가 파악되지 않았다. 도봉산 역에서 모두들 내리고 나면 종점인 장암역까지는 지하철 전체에 몇 명 남지 않는다. 한 칸에 한두 명 남거나 아예 빈칸도 있게 마련이다. 장암역의 하차 방송에도 좀처럼 깨지 않을 때가 종종 있는 그인데 왜 눈이 뜨였을까. 벌써 장암역인가.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아닌데.
큰 목소리가 조심성 없이 울렸다.
여 앉으라니까. 여 빈자리 있잖어.
세 칸짜리 노약자석을 독차지하고 있던 할배가 그녀를 향해 '여기'를 '여'라고 하며 착석을 권하고 있었다.
그녀가 서서 가는 것이 안타까워선지 할배는 노약자석의 빈자리를 가리키는 몸짓을 요란스럽게 하며 그녀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기운도 좋지, 쩌렁쩌렁 우렁찬 목소리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곤 있지만 노약자석을 향해 선 그녀의 시신경의 범위와 방향상 할배의 손짓이 안 보일 리가 없는데. 옆 칸까지 들릴 법한 목소리는 말할 나위도 없고.
일루 와요. 여 앉으라니까. 빈자리 있잖어. 왜 힘들게 서서 가?
첫 번째 외침에 그가 잠을 깼을 것이고 좀 전에 들은 것이 두 번째, 방금 들은 것이 세 번째 외침일 터였다. 할배의 외침은 배려심에 비례하여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쯤 되자 모든 승객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6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는 태릉역의 문이 열렸다가 닫혔고 이제는 앉은 자리보다 빈자리가 더 많아졌다.
할배가 마침내 일어서더니 여자를 향해 팔을 뻗었다. 할배의 계속되는 우렁찬 외침과 승객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내비치더니 기댔던 등을 떼고 노약자석의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반석의 빈자리에 앉았다.
멀어진 그녀를 향해 할배는 포기하지 않고 외쳤다. 우리 자리는 여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