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진필 Sep 10. 2024

개척자

  뭐든지 유행이 시작된 후 따라 하면 망하는 법이다.개척자들이 돈을 벌고 빠진 자리에 들어선 추종자들은 돈만 날리는 법이다. 예전에도 그런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았지만 멀리 볼 필요도 없다. 탕후루 가게를 보라. 한때는 눈만 뜨면 생기는 게 탕후루 가게였다. 심지어 탕후루 가게 옆에 탕후루 가게가 생기기도 했다. 몇 년도 아니고 불과 몇 개월 전 이야기다. 임대 종이가 붙은 전 탕후루 가게 자리를 보며 사람들은 혀를 찬다. 이미 포화상태인 업종에 왜 뛰어드느냐고. 그런 감각으로 사업을 하니 망하는 거라고. 망할 것이 뻔한데 당사자만 모르는 게 신기하다고. 맞는 말이지만 앞으로 히트할 업종을 알아맞히는 예지력과 남들이 하지 않는 일에 먼저 투신하는 용기는 개척자만이 가진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 있기 힘든 능력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보통 사람 아닌가.  그러나 그는 아무도 걸은 적 없는 새하얀 눈밭에 최초의 발자국을 내는 사람이다. 그는 예지력과 용기를 갖춘 개척자다.

   

   그의 엄마는 막내가 아빠 얼굴을 기억하기도 전에 남편을 잃었다. 셋째까지 대학을 졸업시키고 결혼을 시켰으며 결혼을 거부한 막내는 대학 졸업까지만 시켰다. 그 막내가 바로 그다. 치매가 집안 내력인 엄마는 치매 포비아가 심했다. 자식들은 치매보다는 치맥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도 늘 말씀하셨다. 나 치매 걸려도 요양원에는 보내지 말아라. 죽으면 죽었지 요양원에는 가고 싶지 않다. 요양원에 보내면 나는 옥상에서 뛰어내리든 달리는 차에 뛰어들든 하여간 뛸 것이다. 자식이 넷이나 되니 돌아가면서 모셔라. 나는 혼자서 너희 모두를 키웠는데 너희 모두가 나 하나쯤 못 돌보겠냐. 대신 치매에 걸리고 4년이 지나도 내가 죽지 않으면 그때는 요양원에 보내도 된다. 그때쯤이면 내가 요양원에 있는지 집에 있는지 구분도 못할 것이니 괜찮다. 나는 너희와 너희 자식들까지 키우는 데 40년도 넘게 바쳤으니 너희는 나에게 4년만 바쳐라.

        

   그는 엄마가 형들과 누나에게 ‘치매 엄마 모시기’라는, 요즘 세상에서 도무지 가당치 않은 임무를 요구할 권리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를 제외하고 엄마가 키워 준 인원수를 세어 보면 세 명의 자식과 일곱 명의 손주, 열 명이나 된다. 그를 제외한 이유는 두 가지다. 그는 그의 자식까지 키워 달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엄마에게 평균 정도의 빚만 있다. 요즘 세상에 평균 정도의 빚을 진 자식이 치매 걸린 부모를 모시는 경우는 없다. 두 번째 이유는 엄마가 치매에 걸리기 전까지 지금까지 그랬듯 그가 줄곧 엄마를 모시고 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엄마 명의의 집에서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먹고 엄마가 청소해 주는 방에서 자며 엄마가 빨아 주는 옷을 입으며 모시는 거긴 하지만 어쨌든 평균 정도의 빚조차 그는 다 갚을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미 다 갚았는지도, 어쩌면 이미 빚을 초과하여 갚았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엄마에게 치매가 왔다. 경미했지만 치매 초기 증상임이 분명했다. 엄마는 아니라고 우겼다. 4년의 시작점이 언제인가는 엄마와 자식들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했다. 엄마는 요양원에 들어갈 때쯤 아무것도 모를 만큼 완전히 정신이 혼미해야 했으므로 치매의 선고 시점을 최대한 늦추고 싶어 했다. 자식들은 어차피 모셔야 할 거라면 최대한 엄마가 멀쩡할 때 모시고 싶었으므로 치매의 선고 시점을 최대한 당기고 싶어 했다.


   처음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을 때 의사는 아직 치매라고 하기엔 이르다고 했다. 의사가 치매가 아닌가 싶었다. 가끔 아파트 호수와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잊어버리기 시작했는데 치매가 아니라니. 반년 후 네 명의 자식과 일곱 명의 손주 이름을 잊어버리기 시작해서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더니 드디어 치매라고 했다. 약속을 이행할 순간이 왔다.     


   두 명의 형과 한 명의 누나가 그의 빚 청산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 명의 자식이 분기별로 돌아가며 엄마를 모시기로 했다. 좀 억울했지만 삼대 일로 싸워봤자 승산이 없었다. 기업들이 분기별로 실적을 발표하듯 네 명의 자식들은 분기별로 엄마의 치매 경과 상태를 발표했다. 등락을 거듭하는 기업들의 실적과 달리 큰형부터 작은형, 누나, 그를 거치는 동안 그들의 돌봄 실적은 하락세로 일관했다. 그리고 다시 큰형의 차례가 왔을 때 큰형이 선언했다.


   “이제 엄마를 요양원으로 모시자. 안 그러면 내가 이혼할 판이다.”

   작은형과 누나도 한뜻으로 찬성했다. 그는 엄마에게 한 약속과 마지막 분기의 돌봄 실적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약속한 4년에서 겨우 1년 지났어. 그리고 엄마가 아직 정신이 온전할 때가 더 많아서 모시는 게 그렇게 힘든 상태도 아니야.”

   큰형이 말했다.

   “약속? 누가 약속했는데? 엄마가 일방적으로 부탁한 거지. 요즘 세상에 치매 걸린 부모를 집에서 모신다는 게 말이 돼? 정 그러면 막내 네가 계속 모셔. 너는 사십 년 넘게 엄마가 돌봐줬잖아. 엄마도 너랑 지내는 게 제일 편하실 거야.”

   작은형과 누나는 다시 한뜻으로 찬성했다. 사십 년 넘는 기간 중 일부는 엄마가 그를 돌본 게 아니라 그가 엄마를 돌본 거라고 항변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결정은 그가 해야 했다. 황산벌 전투에 나서기 전 가족부터 죽인 계백장군처럼 비정한 결정을 해야 했다. 엄마를 요양원으로 보내는 결정 말이다. 하지만 그는 비장한 결정을 하고 말았다. 남은 3년 동안 그가 독박으로 엄마를 모셔 보겠다는 결정 말이다. 그는 하던 일도 그만두었다. 물론 엄마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줘 용돈 정도 벌던 일자리였고 큰형, 작은형, 누나가 그가 벌던 돈에 더하여 엄마의 간병비 정도는 추렴해 주겠다고 해 아쉬움은 전혀 없었다.  2년 차 치매 엄마 돌보기는 생각보다 쉬웠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기 위해 쥐꼬리로 사는 것에 비하면 하루의 절반 이상은 정신이 남아 있는 엄마를 돌보는 일은 차라리 휴가 같았다. 그러나 휴가는 길지 않았다.


   3년 차로 접어들 무렵 엄마의 상태는 몹시 나빠졌다. 벽에 똥칠을 하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용변을 가리지 못하기 시작했다. 벽에 똥칠하는 순간의 예고편 같았다. 냉장고를 열고 맨손으로 음식을 마구 집어 먹기 시작했고 밤이건 낮이건 시도 때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갔다. 동네 파출소의 단골이 되었다. 더 나쁜 건 형들과 누나가 이제는 요양원 비용만큼만 갹출해 주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그것도 요양원 비용의 딱 사분의 삼 금액만. 그 돈을 받고 엄마를 계속 집에서 모시든, 나머지 사분의 일 금액을 그가 보태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든 알아서 하라고 했다. 1년 동안 혼자 힘들게 달려온 그의 앞에는 바통을 이어받을 주자가 없었다. 그가 결승점까지 달려야 하는 마지막 주자였다.

       

    당장 돈이 문제였다. 최소한 그의 생활비와 엄마 요양원 비용의 사분의 일을 벌어야 했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때 천재적인 형사가 머릿속의 산발해 있던 단서들을 한순간에 꿰맞춰 번쩍하고 범인을 연상해 내는 순간이 그에게도 찾아왔다. 유튜브! 바로 치매 유튜브 방송!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돌보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일석이조의 완벽한 해결책!      


   그즈음 그는 아기들 유튜브 감상에 빠져 있었다. 생애 첫 뒤집기를 성공시키기 위해 변비증 환자가 힘주는 것처럼 온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용을 쓰는 아기라든가, 똥 냄새를 풍기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똥 싼 기저귀를 찬 채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는 아기라든가, 짜장 면발을 양손에 쥐고 온 얼굴에 그러데이션을 그리는 행위 예술을 하는 아기라든가, 윗도리는 입었으나 아래는 기저귀만 차고 온 집안을 뽈뽈거리고 기거나 걸어 다니는 아기라든가, 주요 부위만 나뭇잎 처리된 채 욕조에서 목욕을 하거나 물놀이를 하는 아기들...... 그는 구독을 누르고 새 영상의 알림을 받음으로써 유튜브 속에서 남의 아기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 영상의 조회수와 구독자 수는 엄청났다. 영상 앞머리에 광고가 몇 개씩 붙어 있었고 차라리 대놓고 하지 싶을 정도로 어색한 간접 광고도 상당했다.      


   그는 아기들 영상을 즐겨 보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하는 사려 깊은 사람이다. 아기들 영상은 부모들이 찍어 부모들이 돈 버는 것 아닌가. 물론 가끔 출연하기도 하지만 주로 웃음소리나 추임새만 넣는 부모들. 물론 그 돈을 아기들을 위해 쓰긴 하겠지. 빌딩을 산 부모도 있다던데 그 빌딩도 나중에 아기 것이 되긴 하겠지. 그렇지만 아기들이 사는 평생 동안 저 영상들은 불사조처럼 사라지지 않을 텐데 아기들은 커서도 제가 찍힌 영상들을 사람들이 영원히 감상하는 것을 좋아할까. 기저귀만 찬 진정한 하의 실종 패션, 가운데 잎사귀 하나만 붙이고 목욕하는 전라의 모습을 사춘기가 되어 보았을 때 어릴 적 자신은 귀여웠구나 하고 웃어넘길까. 자신의 모습을 지우고 싶어도 한번 찍힌 유튜브 영상은 화석처럼 계속 발굴될 텐데 괜찮을까. 육아 프로그램이 지상파에서 한창 유행했을 때 다정한 모습으로 출연해 세상 행복한 육아를 선보이던 연예인 부부가 방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혼을 하며 이번에는 지상파에서 쌈박질을 선보일 때도 아이 걱정부터 했을 만큼 사려 깊은 그다. 유튜브에 영원한 박제로 남을 아기들 걱정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에 비하면 엄마를 주인공으로 치매 유튜브 영상을 찍는 건 데미지가 훨씬 덜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데미지라는 것이 아예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인지 능력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테고 엄마가 살 날은 얼마 남지 않은 게 확실하댔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똑똑하면서도 좀처럼 장담하지 않는 의사들이 확실하다고 보증한 사실이다. 그러니 엄마는 당신의 영상이 불사조가 되든, 화석이 되든, 박제가 되든 알지 못할 것이다. 더하여 엄마의 소원대로 치매라는 폭탄을 밟고도 4년을, 아니 엄마의 궁극적 소원대로 죽을 때까지 집에서 그의 돌봄을 받다가 삶을 마감하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아니 어쩌면 세계 최초로 ‘치매 환자의 리얼한 하루’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유튜버가 되었다. 아무 말 대잔치로 멀쩡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거나 실제로 자살로 몰아넣는 유튜버들에 비하면 그는 '치매 걸린 엄마를 집에서도 돌볼 수 있다'는 공익적 가치를 전파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조회수는 가파르게 늘고 있고 구독자 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롯데타워를 오르는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기저귀 등 노인용품을 파는 업체들로부터 광고 러브콜도 잇따르고 있고 아기 유튜브에서는 볼 수 없었던 후원금도 쇄도하고 있다.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효자다, 나는 불효자지만 당신은 끝까지 어머니 잘 모시라는 응원과 함께. 물론 코를 높이면 예쁘긴 하지만 팽하고 코를 풀지 못하듯 애로사항도 있다. 치매 걸린 어머니를 앵벌이 삼느냐, 하다 하다 못해 이제 치매 유튜브 방송이라니 세상이 말세다, 너도 늙어서 치매 걸리면 니 자식이 유튜브 할 거라는 악성 댓글들이 바로 그것이다.그러나 그들도 조회수를 올려 주고 있으니 고맙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유튜브계의 진정한 파이어니어다.

이전 09화 불가능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