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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May 11. 2024

불가능은 없다

   남편은 아내를 의심하고 있다. 의심이 시작된 것은 오래 전인데 확인 후 결과가 두렵고 정확히 확인할 방법이 없어 줄곧 의심만 하고 있다.


   좀 이상하다는 낌새는 많았으나 본격적인 의심이 시작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십오 년 전쯤, 학력 위조 사건이 전국을 휩쓸 때였다. 열어도 열어도 끝없이 나오는 러시아 인형처럼 매일매일 새로운 유명 인사의 학력 위조가 들통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미투가 일상화되었지만 들통 사건의 원조인 학력 위조 사건은 그 당시 충격이 상당했다. 남편에게 가장 충격이었던 것은 전 국민이 다 아는 배우가 전 국민이 다 아는 대학을 졸업했다며 모교에 가서 강연도 하고 그랬는데 알고 보니 입학도 한 적이 없었던 사건이다. 입학과 졸업은 하지 않았으나 친구들과 종종 캠퍼스에서 어울렸고 가끔 도강도 했단다. 그 정도의 이력으로 전 국민에게 유명 대학의 졸업생으로 알려지고 졸업생들 사이에서 동창생으로 여겨졌다니 남편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내의 이상한 낌새 중 하나는 학번이었다. 무슨 이야기 중에 학번을 물었는데 아내는 잊어버려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을 졸업한 남편이지만 보통 사람들이 다 대학 학번을 기억할 거라고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아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아내는 남편이 피곤할 정도로 지독한 학벌주의자다. 아내는 명문대 끝자락에 있는 대학의 국문과를 졸업했다, 고 했다.


   남편은 연애를 할 때 아내의 친구들을 만나면 항상 이렇게 소개되었다.

   "인사해. 내 남자 친구야. 이 사람, 서울대 나왔어."

 처음에는 민망했지만 손해 보는 일은 아니기에 가만 있다 보니 곧 익숙해졌다. 그러나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일도 있었다. 아내는 남편의 친구들을 만나기 전이면 꼭 무슨 대학을 나온 친구냐고 물었다. 명문대를 나온 친구와 만난 후에는 역시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호평을 내놨고 그렇지 않은 친구를 만난 후에는 역시 공부를 못 했던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혹평을 내놨다. 그리고 지금은 아들이 친구 이야기를 하면 그 부모님은 어느 대학 나왔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해서 남편과 싸우곤 한다. 그런 아내가 자신의 대학 학번을 잊어버렸다? 당시에는 무심코 넘겼지만 생각할수록 말이 안 되는 일인 것 같다.


  그리고 아내는 좀 이상한 표현을 자주 구사했다. 연애 초기에는 서로가 서로의 친구를 소개할 일이 꽤 있기 마련이다. 아내는 자신의 친구를 소개할 때면 꼭 '막연한 친구야'라고 표현했다. 막연한 친구? 아하, 막역한 친구구나. 처음에는 국문과 출신이지만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연한 친구들이 계속 등장했다. 남편은 바로 잡아 줄까 여러 번 망설였으나 아내가 자존심 상할까 봐 그냥 막연한 친구들을 연달아 소개받는 쪽을 선택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의 대학 동창들을 만나 자리에서 아내가 말했다. 아, 우리 남편이랑 막연한 친구들이시군요.  


   또 아내는 프라이드를 프라이버시라고 표현했다.

   "걔가 프라이버시가 너무 강해서....."

   "나야 프라이버시가 상당하지...."

  "공부를 잘했던 사람들은 전부 프라이버시가 강하지."

처음에는 역시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남편이 서너 번 '프라이드를 말하는 거지?'라며 바로잡아 줬음에도 여전히 아내에게는 프라이버시가 프라이드다. 아내가 정말 프라이버시를 말해야 하는 순간에는 뭐라 표현할지 궁금하긴 했으나 실수를 계속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 발표의 마지막 문구를 바꾸는 게 어때? '자존감을 갖자' 말고 '사람은 모름지기 프라이버시를 가져야 한다'로."


   서서히 덮쳐 오는 백내장처럼 뭔가 뿌연 것들이 감지됐었는데 학력 위조 사건이 터지면서 이거다 싶었었다. 그게 십오 년 전쯤 일이다. 남편은 막연하지 않고 막역한 친구에게 이런 생각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야, 그게 말이 되냐? 제수씨가 설마 그런 걸 속이겠어?"

   " 왜 말이 안 돼?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맨날 막장 드라마랑 예능 프로만 보는 것부터 이상했어. 그러면서 베개만 한 양장본 책을 잔뜩 사. 읽지도 않으면서. 이상하지 않아?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나도 한 번 결혼했던 거 아내가 모르잖아. 결혼했던 것도 숨길 수 있는데 졸업 대학 속이는 거야 껌 아닐까?"

   "그거야 결혼할 때 누가 결혼했었냐고 묻는 것도 아니고 혼인관계증명서 떼어 보는 것도 아니니까 가능하지만......"

   "그래, 바로 그거야! 너는 결혼할 때 니 와이프 졸업증명서 떼 봤냐? 나도 내 와이프한테 서울대 나왔다고 말만 했지 졸업증명서 보여 주진 않았거든. 누가 그런 걸 속인다고 생각하겠어? 그러니까 속일 수 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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