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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Sep 13. 2024

눈에는 눈, 비밀번호에는 비밀번호

   된장찌개에 넣을 두부를 썰다가 손만 씻고 달려왔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지갑을 쥔 손과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을 양쪽 허벅지 위에 올리고 숨을 골랐다. 어린이집 앞에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휴, 늦지 않았구나.

   “할머니! 할머니가 왔네!”

   “아이고, 우리 건우! 내 새끼!”

   엄밀히 가계도를 따지면 건우는 그녀의 새끼가 아니라 그녀의 새끼의 새끼지만 뭐 아무려면 어떤가. 새끼의 새끼도 새끼지.

   “응? 왜 자꾸 비밀번호가 틀리지? 이러니 늙으면 죽어야지. 건우야, 너 비밀번호 아니?”

   음전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현관문 앞까지 왔지만 지나 온 놀이터에 미련이 남은 건우는 고개를 저었다. 제법 날카로운 네 번의 경고음을 듣고 나니 그녀는 더럭 불안해졌다. 통장 비밀번호를 다섯 번 틀리게 눌렀다가 통장이 먹통이 되었던 일이 떠오르면서 아들네 집 도어록을 망가뜨릴까 봐 겁이 난 것이다. 그랬다가는 사람을 불러서 키를 뜯고 새 키를 달고, 아이고, 그럴 수는 없었다.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며느리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동시에 전화를 받지 않는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둘 다 야근을 한대서 아들네 집에 와서 건우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도 아들네 부부가 돌아오지 않아 자정이 넘어서까지 집에 가지 못하고 기다렸던 날. 더 늦으면 지하철도 끊기고 택시를 타야 해서 애가 탔던 날. 마침내 아파트 입구에서 만났다며 아들 부부가 같이 들어왔던 날. 자고 가라고 해도 그냥 갈 참이었지만 자고 가라는 말을 아무도 하지 않아 섭섭했던 날. 등 뒤에서 너무 빠른 템포로 현관문이 닫혔고 현관문 앞에서 그날 저녁 시간이 찍힌 영화표를 주웠던 날. 둘이 영화를 본다고 건우를 좀 봐달라고 했어도 얼마든지 봐줬을 텐데 생각했던 날. 미안하니까 그랬겠지 너그럽게 이해하며 할증까지 붙어 이만 원이 넘게 나온 택시비를 그녀 돈으로 냈던 날.

     

   “건우야, 우리 요 앞에 햄버거 집에 갈까? 할머니가 집 비밀번호를 잊어버렸는데 엄마아빠가 전화를 안 받네. 햄버거 먹고 있자.”

   “아냐 아냐. 나 놀이터 가서 놀래. 배 안 고파, 안 고파.”

   어린이집 음식이 부실하다고 노상 걱정인 며느리 생각이 났지만 저녁 식사가 조금 늦어진다고 해서 큰일이 날 것도 아니었다. 건우는 놀이터에서 모처럼 목줄이 풀린 강아지처럼 즐거워했다. 반대로 그녀는 무릎이라도 까지면 큰일인 건우 뒤를 쫓아다니느라 오래 데친 시금치처럼 흐물흐물해졌다. 한 시간이 좀 되기 전에 드디어 전화가 왔다.

   “엄마, 전화했었어?”

   “그래, 왜 그렇게 전화를 안 받냐. 건우 엄마도 그렇고.”

   “그 사람도 일하느라 그랬겠지. 왜 전화했어?”

   “현관 비밀번호를 자꾸 틀려서. 건우생일 아니었나?”

   “어, 맞는데...... 그게......”

   방어할 시간이 있었다면 아들은 아무도 상처받지 않을 맞춤한 거짓말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그러나 바쁜 와중에 엄마가 무심코 훅 날린 잽을 맞은 아들은 순발력이 떨어졌다.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쓸데없이 순발력 좋게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는 한 시간 반 정도 거리에 사는 아들과 며느리는 그녀가 반찬을 가져다주길 원했다. 그녀가 가장 원하는 것은 해 먹든 사 먹든 저희들끼리 알아서 반찬을 해결하는 것이고 차선책은 저희들이 반찬을 가져가는 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주는 사람 맘대로 되지 않았다. 한 달에 두 번 운동 삼아 그녀더러 다녀가라고 했다. 지난 일요일, 약속한 시간에 맞춰 반찬 꾸러미를 들고 가 초인종을 눌렀는데 잠잠했다. 세 번을 눌렀는데도 잠잠했다.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 어머니. 제가 깜빡 잊고 밖에 나와 있어요. 그냥 문 앞에 두고 가세요.”

   “문 앞에? 누가 가져가면 어쩌려고.”

   “아이, 어머니도 참. 반찬을 누가 가져 가요. 택배도 다 문 앞에 두고 가는데요. 걱정 말고 두고 가세요.”

   “날도 더운데...... 비밀번호 불러 다오. 내가 얼른 냉장고에 넣어 두고 가마.”

   미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침묵이 잠깐 흘렀다.

   “그럼 경비실에 맡겨 두세요. 거긴 시원해요.”

   며느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기 너머에서 그냥 비밀번호를 알려 드리라는 아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비로소 아까의 며느리 침묵이 이해되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신경질적인 실랑이가 이어지더니 아들이 전화기를 낚아챘다.

   “엄마, 비밀번호 1024야. 건우 생일. 냉장고에 넣어 두고 가. 엄마 오라고 해 놓고 깜빡해서 죄송해요.”

   전화가 탁 끊어지면서 방화벽처럼 ‘그렇다고’로 시작되는 며느리의 말을 차단했다. 방화벽 너머의 말은 ‘비밀번호를 알려 주면 어떡하냐’였겠지. 아들이 알려 준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찬 데 있다가 더운 데 나오면 맺히는 반찬통의 물방울처럼 그녀의 눈에서도 물방울이 맺히려 했다. 집안에 CCTV가 있는 것도 아니련만 그녀가 집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찍힐 것만 같은 조급함으로 냉장고에 마구마구 반찬통만 넣고 물 한 잔도 마시지 않고 나왔다. 다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반찬통을 가지런히 좀 정리해서 넣어둘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삐뚤빼뚤한 반찬통 배열이 시어머니의 옹졸함의 증거라고 며느리가 오해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집에 오니 딸이 냉장고를 열고 가져갈 반찬을 챙기고 있었다. 제 오빠네 집에 반찬을 가져다주는 날을 알고 때맞춰 와서 제 몫을 가져가는 것이다. 딸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하소연한 것이 잇따라 터지는 가스통처럼 연달아 섭섭함을 폭발시켰다.

   “엄마, 그런 걸로 섭섭해하지 마. 나는 올케가 이해되는데. 나도 시어머니에게 집 비밀번호는 안 알려 줘. 우리 없을 때 올 일도 없잖아.”

   “그럼 오라고 한 시간에 저희들이 집에 있어야지. 내가 가겠다고 했냐? 지들이 반찬 갖고 오라고 해 놓고.”

   “그래, 그건 올케랑 오빠가 잘못한 거 맞지만 그래도 비밀번호를 남이 아는 건 찜찜하지. 프라이버시 침해지.”

   남? 찜찜? 프라이버시? 아직 터질 가스통이 남아 있었다.

   “그럼 너는 왜 아무도 없는 내 집에 와 있냐? 왜 허락도 없이 냉장고를 뒤지냐? 나는 프라이버시가 없냐?”

   “아니, 엄마는, 왜 화를 내? 아까 그 경우랑 이 경우가 어떻게 같아? 시어머니가 며느리 집에 가는 거랑 딸이 엄마 집에 오는 거랑은 경우가 다르지. 그리고 엄마가 무슨 프라이버시야. 자식들이 집에 자주 와 주면 고마운 거지.”       


   전화기 너머에서 무안해하던 아들은 여태 어디 있었냐고 물으며 바뀐 비밀번호를 알려 주었다. 오늘 밤에 며느리는 또 새로운 비밀번호를 조합해 내야 할 테다. 건우를 씻기고 재우고 나자 또 아파트 입구에서 만났다며 아들과 며느리가 같이 들어왔다. 다행히 버스가 끊기기 전이었다. 그녀의 눈치를 보던 아들이 택시비를 쥐여 주었지만 운동 삼아 버스 타고 가겠다고 받지 않았다.      


   “엄마, 어디 있어?”

   “왜? 엄마 찬거리 사러 마트 왔는데. 내일 너희 반찬 해다 주는 날이잖니?”

   “문이 고장 났나? 비밀번호 틀렸다고 계속 삑삑거리네. 급한 일이 생겨서 건우 좀 맡기려고 왔는데.”

   “건우 엄마는 뭐 한다고 토요일 저녁에 애를 나한테 맡겨?”

   “건우 엄마도 일이 좀 생겨서 그래. 엄마 빨리 올 수 있지?”

   “안 되는데. 친구들하고 같이 왔어. 장 보고 삼 층에 한식뷔페 생겼대서 같아 먹기로 했어.”

   “아이 참, 어떡하지. 엄마, 저녁 안 먹고 오면 되잖아. 택시 타면 금방 올 수 있는데. 건우랑 일단 들어가서 기다릴게.”

   “오늘은 안 되겠다. 그냥 가거라. 그리고 비밀번호 바꿨다. 너희도 앞으로 내 집에 올 때 미리 약속하고 오너라. 나도 남이 내 집 비밀번호 아는 거 찜찜하고 나도 프라이버시란 게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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