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눈 수술을 하고 한여름 소불알처럼 축 늘어져 있더니 재현이는 하루 만에 둠싯둠싯 출근을 했다. 하루 더 쉬었으면 좋으련만 제 상황은 제가 제일 잘 아는 법이니 굳이 말리진 않았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단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았고 지금 회사에서도 쉬는 날 출근은 자주 해도 출근날 쉬어 본 적은 없는 재현이다. 출근 부문에서는 확실히 챔피언일 테니 고작 눈 수술로 챔피언의 지위에 오점을 남기고 싶진 않을 것이다.
늘 그렇듯 셋이 아침을 먹었다. 아내의 카스테라는 절반쯤 남았고 나는 이제 겨우 두 입 먹었는데 재현이는 남은 우유를 후루룩 털어 넣더니 입을 닦고 일어섰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빚쟁이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나듯이 식탁 의자를 거칠게 밀면서 일어나느라 어김없이 의자 바로 뒤에 세워 뒀던 선풍기를 넘어뜨렸다. 아침부터 쿠당탕 큰 소리를 내고 아이고 탄식을 내뱉으면서도 선풍기를 좀 멀찍이 세워 두고 바람을 쐬라는 내 말은 절대 듣지 않는다. 저놈의 선풍기가 박살이 나면 내 말을 들으려나. 재현이는 선풍기를 일으켜 세우고 정지 버튼을 누르는 대신 코드를 쭉 잡아 뽑는다. 코드를 뽑을 때는 줄 가운데를 잡지 말고 콘센트에 꽂히는 끝부분을 잡고 빼라고 이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내 말마따나 코드를 뽑는 방법 때문에 뭔가가 고장 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입을 닦은 휴지가 어김없이 바닥으로 날려 떨어지지만 선풍기에 밀려 재현이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다녀오겠다고 우렁차게 소리를 지르고는 쿵쾅쿵쾅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아직 눈도 잘 안 보일 텐데 좀 천천히 내려갈 것이지 폭이 좁은 계단을 어쩌자고 저렇게 뛰어 내려가나 싶었다. 한 칸도 아니고 두 칸, 세 칸씩 건너뛸 터였다. 일 층 철제문이 삐걱삐걱 익숙한 비명을 질렀다. 살짝 놓아야 꼭 닫히는데 보나 마나 온 힘을 다해 열어젖히고 뛰어나가는 바람에 문짝은 몇 번의 반동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하다가 틈을 남기고 멈출 것이다. 무릎 때문에 계단이라면 지긋지긋한 아내나 내가 내려가서 다시 닫고 와야 한다.
재현이는 어릴 때부터 덤벙덤벙하고 빈틈이 많았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재학증명서를 떼어오라고 하면 재영이는 한 번도 잊지 않고 곧바로 떼어왔지만 재현이는 꼭 하루 이틀이 더 걸렸다. 그때는 내가 젊었던 터라 아이들의 소소한 실수나 잘못에도 불같이 화를 낼 때였고 재현이는 나를 무서워하면서도 한결같았다. 재현이 말로는 학교까지 재학증명서, 재학증명서를 웅얼거리며 가는데 교문 앞 버스에서 내리면서 딱 잊어버린다고 했다. 설사 학교에 가는 동안 재학증명서, 재학증명서를 중얼거리며 가지는 않더라도 반대로 학교가 딱 보이면 생각이 나야 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이전에도 같은 일로 여러 번 혼난 적이 있다면 더더욱 생각이 나지 않을까. 그것이 지극한 상식 아닌가.
아내는 늘 내 상식이 지나치다고 했다. 한 번도 잊지 않는 재영이가 특이한 거지 두 번 세 번 말해야 하는 재현이가 너무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어째서 기억해야 할 것을 매번 잊어버리는 것이 정상이고 잊지 않는 것이 특이한 것이라고 하는 걸까. 한평생을 같이 살았지만 여전히 아내와 나의 상식은 프로야구 1위 팀과 꼴찌 팀의 게임 차만큼 심한 차이가 난다. 아내가 재현이를 두둔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어젯밤 뉴스를 볼 때도 그랬다.
“일흔이 넘은 할애비가 비가 저렇게 억수같이 쏟아지는 논두렁에 나가긴 왜 나가. 저 빗속에서 뭘 하겠다고. 해마다 저래 가지고 죽는 사람들 보면서도 매번 저런 사람들이 있다는 게 참 이해가 안 되네.”
“비가 쏟아지니까 걱정돼서 나가 본 거지. 당신도 비 오면 건물에 물 새는 데 있나 돌아보잖아요. 저 할아버지도 그런 거지.”
“그거랑은 다르지. 비 새는 데가 있나 건물 안에서 돌아보는 거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논두렁에 나가는 거랑 어떻게 같나.”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다들 걱정되니까 좀 위험해도 나가보는 거라고요.”
사람들은 어쩌면 그렇게 부주의할까. 신기할 지경이다. 하루종일 뉴스를 보다 보면 영화 필름을 돌리는 것처럼, 작년 뉴스를 재방송하는 것처럼 똑같은 사고가 반복됐다. 매년 노인들이 폭염 속에서 밭일을 하다가 쓰러져 죽었고 계곡이나 해수욕장에서는 나이를 불문하고 피서객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실수로 버린 담배꽁초가 산을 홀라당 태우고 실수로 끄지 않은 가스렌지 불이 집을 홀라당 태웠다. 횡단보도의 파란 불을 미처 못 보고 우회전하던 차들이 보행자를 치었고 교차로에서 노란 불이 켜졌는데도 질주하던 차들이 교통사고를 냈다. 인도를 침범해 남이 가게 유리창을 박살 낸 차주들은 항상 급발진을 주장했고 대리를 부르면 될 것을 술 먹고 운전대를 잡아 음주 사고를 낸 이들은 딱 한 잔만 마셨다고 우겼다. 찜통더위에 차의 뒷좌석에 앉혀 두었던 아이들이 정신을 잃은 채 구조되었고 어린이집 차가 방금 내린 아이를 못 보고 후진하다가 네댓 살밖에 안 된 아이들을 치었다.
제일 한심하고 절대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이 태풍이 오니 조심하라고 텔레비전의 기상 캐스터가 그렇게 목이 터져라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등산이나 낚시를 가서 고립되었다가 구조되거나 실종되었다가 죽은 채로 발견되는 사람들이었다. 태풍이 오는데 산에 가서 텐트를 치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인가. 정신병 검사를 해 봐야 할 사람들 아닌가. 구조대원들이 밧줄에 몸을 매단 채 위태위태하게 그런 멍청한 사람들을 구하는 장면을 보면 내가 다 화가 났다. 그런 사람들을 구조하다가 해마다 죽어가는 구조대원들이 불쌍했다. 죽은 구조대원들의 가족들은 평생 어떻게 사나 싶었다. 누군가의 아버지, 아들, 남편인 구조대원들이 대의도 명분도 없는 죽음을 당하게 하느니 저렇게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굳이 놀러 가서 죽을 위기를 자초한 사람들은 구조해 주지 말아야 한다고, 아니면 구조비용을 왕창 물리거나 구조대원들이 죽었을 때 전재산을 몰수해 보상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도 아내는 나보고 너무 냉정하다고 했었다. 그 사람들이 일부러 그랬겠냐는 것이다. 구조대원들이 사람 가리면서 출동하면 되겠냐고 했다. 아니, 남들은 다 조심할 때 굳이 위험한 데로 놀러 가서 남의 목숨을 담보로 제 목숨 구해달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너무한 민폐 아닌가. 먹고사는 일 때문도 아니고 등산이나 낚시 때문에, 그것도 험한 날씨를 알고도 목숨을 걸었다면 더더구나 그렇지 않은가.
출근을 하던 시절 나는 초겨울부터 초봄까지 매일 더 일찍 일어났다. 여기는 겨울눈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모임에나 지각생이 흔한 것처럼 봄에 내리는 지각눈도 그 못지않게 많다. 이월이나 삼월에 폭설이 내리는 일이 흔하다. 어쩌다 그런 게 아니라 매해 그렇다. 일 년만 살아 보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는 일이다. 여기 안 살아도 매해 폭설 뉴스를 듣는 전국의 국민들이 다 알 일이다. 제주도에 귤 농장이 많다는 것을 꼭 가 봐야 아나. 봄에 씨 뿌리고 가을이면 추수하는 것처럼 정해진 일이고 보이지 않아도 어디선가 당연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겨울이 시작되면 늘 더 일찍 일어났다. 전날 밤 일기예보도 챙겨 보지만 아무리 일기예보라도 백 퍼센트 맞지는 않으니까 차라리 매일 더 일찍 일어났다. 혹시라도 눈이 오면 오토바이를 못 타고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다가 갈아타고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눈이 오면 사무실에서 서너 명은 꼭 지각을 했다. 눈이 와서요, 아침에 깨니까 눈이 쌓였더라고요, 눈 때문에 길이 막혀서요, 눈 때문에 버스가 잘 안 오더라고요..... 수십 년 동안 같은 이유가 반복되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식당도 수십 년 하면 몇 번은 새로운 메뉴를 개발할 텐데 좀 새로운 핑계라도 생각해 내든가 차라리 그냥 늦어서 미안하다고 깔끔하게 사과하고 마는 게 낫지 않을까. 감자가 땅에서 열리는 것을 모르는 서울애들처럼 몇 년, 혹은 수십 년을 여기서 살고 있으면서 이곳의 눈 내리는 패턴을 몰랐다고 말하는 것이 한심했다. 어째서 사람들은 그토록 부주의하고 핑계가 많은 것일까.
아내는 카스테라를 다 먹고 나는 삼분의 일 정도가 남았는데 다시 일 층 철제문이 비명을 지르더니 리모컨의 되감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좀 전의 장면이 거꾸로 되돌려졌다. 타이밍으로 짐작건대 재현이가 오늘은 주차장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것이다. 쿵쾅쿵쾅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다급한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삼층을 지나 옥탑방 방향으로 멀어졌다. 잠시 후 다시 쿵쾅쿵쾅 소리가 커지더니 일 층 방향으로 멀어져 완전히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철제문은 오늘 아침에만 세 번째 비명을 질렀다. 카스테라를 다 먹으면 계단을 쓸며 내려가 일 층 문을 꼭 여며야 한다.
옥탑방까지 한 번 더 왔다 갔으니 재현이는 운전을 서두를지도 모른다. 여유가 있을 때도 재현이는 운전을 터프하게 했다. 급하게 멈추고 벌컥 출발했다. 좌회전 우회전 때마다 교차로에 임박해서 운전대를 확실히 꺾었다. 아내는 재훈이가 운전하는 차를 타면 안 그러는데 재현이가 운전하는 차를 타면 멀미를 했다. 민서는 큰외삼촌 차를 타는 게 놀이동산의 열차를 타는 것처럼 신난다고 좋아했다.
작년 겨울인가, 퇴근한 재현이 눈에 반창고가 대어져 있었다. 보이는 쪽 눈이었다. 기함을 할 일이었다. 아내와 나는 이미 한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재현이의 보이는 쪽 눈에 다래끼만 나도 가슴이 벌렁벌렁하는데 반창고라니,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다행히 눈이 아니라 눈썹 바로 위, 그러니까 이마의 아래쪽을 다쳐서 붙인 반창고가 눈을 가린 거라 했다. 아침에 출근하다가 회사 근처까지 간 지점에서 살얼음에 차가 미끄러져 논두렁 아래로 굴렀단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 덮인 논바닥에 차가 뒤집혀 있었는데 저 혼자 기어 나와 보험회사에 직접 전화까지 했단다. 전화를 하는데 손에 피가 묻어 있어 제 몸을 보니 전부 멀쩡하더란다. 눈으로 찝찝한 액체가 흘러 손으로 닦으니 피더란다. 순간 저도 깜짝 놀라 눈 위를 더듬어 보았는데 다행히 피는 이마에서 나고 있더란다. 그래서 카카오 택시를 불러 병원으로 갔단다. 병원 로비에 있던 사람들은 얼굴의 반쪽이 피칠된 재현이가 걸어 들어오자 꺅 소리를 지르며 흩어지고 몇몇은 성급히 112 신고까지 했단다. 상처 다섯 바늘을 꿰매고 그대로 출근을 했단다. 재현이 말마따나 차는 맥주캔을 우그러뜨린 것처럼 찌그러져서 결국 폐차시켰는데 신기하게도 재현이는 이마가 찢어진 상처뿐이었다.
그때는 내 말에 아내가 토를 달지 못했다. 내가 재현이를 평소에 야단치는 것은 다 그런 일이 있을까 봐였다. 평상시 부주의함은 소소한 낭패를 낳을 뿐이지만 그 부주의함이 회사 일이나 운전할 때 발휘되면 차원이 다른 결과를 낳는 법이다.
재현이는 회사에서 돈을 만지는 일을 한다. 다른 직원들은 모두 하수처리 관련 자격증을 가진 현장 인력이고 재현이는 총무부의 한 명뿐인 직원이면서 총무과장이다. 아내는 사장이 재현이면 껌뻑 죽는다고, 재현이가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늘 말한다. 사장이 회사의 돈 관리를 몽땅 맡길 만큼 재현이를 신임하고 있는 것은 맞아 보인다. 하지만 그 이유는 사장이 재현이와 고등학교 동창이라 수십 년을 보아 왔고 또 나나 아내까지 다 알고 지내기 때문에 돈 사고를 칠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재현이는 회삿돈이 펑크 나면 제 주머니를 털어 넣으면 넣었지 회삿돈을 일 원이라도 가져갈 직원은 아니다. 또 워낙 성실해서 제일 먼저 출근하고 제일 늦게 퇴근할 뿐 아니라 결혼도 안 했으니 동서남북 출장 다니는 일도 시키기 편하고 어쩌다 본사 직원들이 주말에 점검을 와도 제까닥 달려 나오는 직원이니 믿음직스럽긴 할 것이다. 심지어 명절처럼 며칠 쉴 때면 회사 마당에서 키우는 닭이며 개며 고양이의 밥까지 매일 한 번씩 가서 챙기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장점을 인정한다 해도 일을 꼼꼼하게 잘하느냐의 차원으로 가면 이야기가 다를 수도 있다. 어디에나 부족한 실력을 몸으로 때우는 직원이 있는 법인데 나는 재현이가 그런 직원일까 봐 걱정된다. 아내는 재현이가 회사 일만큼은 실수 없이 정확하게 잘하니까 사장이 총무과 일을 시키는 거 아니겠냐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나는 글쎄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회사에서 멀쩡할 리 있을까. 바가지가 장소 가리면서 샐까.
재현이는 우리 집 장남이다. 언젠가 나와 아내가 죽고 나면 제 동생들의 구심점이 되어야 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는 것도 재현이의 몫이 될 터였다. 아내와 나는 죽으면 묘를 쓰지 않고 화장을 하기로 벌써 합의를 보아서 몇 시간씩 운전을 해서 성묘를 다닐 재현이 일 하나는 이미 덜었다. 제사상 차리는 일도 아내가 더 힘이 빠지기 전에 곧 정리할 생각이다. 아내가 일흔을 넘긴 후에는 내 조상을 위해 제사상을 차릴 때마다 올해까지만 지내고 그만둬야지, 그만둬야지 하면서 여태까지 왔는데 정말로 없애려는 마음이다. 오대 독자로서 몸에 밴 의무감 때문에 미적거리고 있지만 아내에게 못할 노릇이다. 성묘나 제사 말고도 재현이 시대를 위해 없앨 것은 미리미리 없애려고 마음먹고 있다. 재현이 성격상 우리가 죽은 뒤에 제가 뭔가를 없애거나 그만두는 일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집안의 외아들이나 장남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시간과 노력, 돈의 상당 부분을 그 역할에 할애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겪어 봐서 잘 안다.
당장 우리 부부는 보험 하나를 못 들어 만에 하나 큰 병에라도 덜컥 걸리면 생돈을 까먹어야 한다. 남들은 서너 개씩 보험을 들어 놔서 아파도 보험금 타 먹고, 죽으면 자식들에게 보험금을 유산으로 남기던데 우리는 까딱하면 자식 돈 갉아먹고 죽을지도 모른다. 치료비를 쓰다 쓰다 우리가 모아 둔 돈이 작살나면 그때부터는 아이들 부담, 그중에서도 재현이 부담이 제일 클 것 아닌가. 먹고살 만한 지금도 아내가 악착같이 돈을 아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가끔은 살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하는 생각에 생일날 케이크 하나 사도 그 돈이면 빵이 몇 갠 줄 아느냐고 진심으로 화를 내는 아내가 좀 야속하지만 자식들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면 있는 돈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아내의 생각이 옳긴 하다.
언제부턴가 재영이가 나에게 매달 용돈을 보내 주고 있다. 임차인들이 제대로 바통터치 하며 이어질 때는 그나마 살만했는데 그게 드문드문 끊어지기 시작하자 술과 담배가 주 용도인 내 용돈부터 줄었다. 하루에 한 갑 피우던 담배가 반 갑으로 줄었다. 아내 말처럼 건강에도 안 좋은 담배인 건 맞지만 돈이 없어 줄인다니 좀 서글펐다. 나는 입도 뻥긋 안 했는데 때마침 재영이가 용돈을 보내 주기 시작했다.
“아버지, 누나가 아버지 드리래요. 엄마한테 말하지 말고 아버지 쓰고 싶은 데 쓰래요. 모으지도 말고 꼭 쓰시래요.”
재영이는 서울 백화점에서 아내나 내 옷이며 신발을 종종 사 보냈다. 젊어서는 한 번도 못 입어 본 메이커 옷을 다 늙어서라도 입어 보니 좋긴 좋았다. 얼마나 비쌀까 걱정은 되었지만 아내가 사 주는 옷과 달리 확실히 천이 보드라웠다. 무엇보다 아내는 검정색이나 남색 옷만 사 주는데 재영이가 사 보내는 옷들은 때깔이 화사하고 고왔다. 택배가 도착하면 항상 아내는 재영이에게 전화를 해서 화를 냈다. 니 아버지는 맨날 집에만 있어서 아무것도 필요 없는데 왜 돈을 쓰느냐, 이런 거 살 돈 있으면 너나 맛있는 거 먹고 건강해라, 민서 대학 졸업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한 푼이라도 모아야지, 돈이란 게 늘 있는 게 아니다,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했다. 고마워서 하는 빈말이 아니라 아내는 진심으로 재영이에게 화를 냈다. 그래서 재영이는 내 용돈을 통장으로 보내지 않고 재훈이를 통해 보내는 것일 테다. 내 통장은 아내가 관리하니까.
재훈이가 독립하고 나서는 재현이가 돈을 전해 주었다.
“아버지, 재영이가 아버지 드리래요. 모으시지 말고 쓰고 싶은 데 꼭 쓰시래요.”
민서가 가끔 올 때 오만 원 주던 용돈을 십만 원 줄 수 있게 되었고 천 원 마트에서 치약이며 화장지며 비누를 살 때 개수를 신중히 헤아리며 미리 계산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고 나면 남은 돈은 형사 시절 방검복처럼 내 마음을 든든히 하는 데나 쓰였지 다른 데 쓸 데도 없었다.
남자들은 돈벌이를 종료하면 서로 만나지 않게 된다. 여자들이 노래 교실 끝나고 간다는 보리밥집이나 칼국숫집, 동창회를 한다는 돈가스집이나 옹심이집은 남자들에게 어색하다. 누가 봐도 저렴한 가격이 주목적인 곳에서 만나기에는 서로 자존심이 상한다. 또 남자들은 만나면 꼭 술 한 잔을 해야 하는데 그런 데서 소주를 시키고 노닥거렸다가는 딱 진상 취급을 받을 것이다. 최소한 돼지갈빗집 정도에서는 만나야 밥도 먹고 술도 한 잔 할 수 있는데 퇴직한 남자들 중에 그 정도의 돈을 쓸 수 있는 남자는 흔치 않다.
쓰지 않아도 돈이 수중에 모인다는 것은 굉장히 흐뭇한 일이었다. 아내가 그악스럽게 돈을 모으는 것이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런 재미가 있어서인가 싶었다. 나는 한평생 내 돈이라는 것을 모아보지 못했다. 월급은 고스란히 아내에게로 갔고 나는 용돈을 받아 썼다. 설령 내가 돈 관리를 했다고 해도 모일 돈은 없었다. 물론 아내라고 해서 돈을 제대로 써 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눠주는 역할이라도 해 보지 않았나. 재영이가 주기적으로 보내 주는 용돈은 모을 수 있는 내 평생의 첫 가욋돈이었다. 약간 기뻤다.
천만 원이 좀 넘게 돈이 모였을 때 우수리는 내 비상금으로 떼고 천만 원을 아내에게 주었다.
“이거, 당신이 갖고 있다가 나 죽으면 써.”
“당신이 돈이 어디 있다고 이렇게 큰돈을 줘요? 모을 돈 있으면 그냥 담배라도 피우고 싶은 대로 피우든지 해요. 용돈 오만 원만 더 달라더니 웬 돈을 모았어.”
재영이가 놈과 헤어지자마자 이제 집에 돈 보내지 말라고 재영이에게 호통을 쳤던 아내가 천만 원이 재영이가 보낸 돈이라는 것을 알면 펄펄 뛰겠지만 어쨌든 아내는 행복해 보였다. 나중에 자식들에게 줄 부담을 천만 원어치만큼 덜었기 때문에 행복해 보였다.
아내는 우리가 죽기 직전까지 쓸 돈에 대한 걱정이 태산 같다. 나중에 만약 운이 좋아 돈을 별로 안 들이고 단번에 덜컥 죽어 버린다면 억울할 정도다. 암이라도 걸리면, 요양병원에 몇 년씩 있게라도 되면 죽을 때까지 하루하루가 돈이라고 했다. 애 하나 대학 보내는 것 이상으로 죽는 데 돈이 든다고 했다. 맞는 말이긴 하다. 나도 어머니는 입원한 지 며칠 만에 돌아가셔서 안 그랬지만 장모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칠 년을 요양병원에 계셨기 때문에 돈 문제로 고생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죽기 위해 쓸 돈 때문에 살아 있을 때 먹고 싶은 것도 못 먹는다는 게 나는 좀 아리송하다. 매일 소갈비를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새참으로 막걸리나 마시고 담배나 피우고 싶은 만큼 피우는 것도 못하면서 죽을 때 쓸 돈을 모아야 하는 걸까. 그리고 우리가 장모님을 떠나보내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장모님을 원망하지 않았듯 우리 애들도 우리의 죽음을 위해 돈 쓰는 걸 아까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애 셋을 키우면서 장모님의 마지막을 지켰지만 재현이나 재영이, 재훈이는 셋이 합쳐 봤자 애라고는 민서 하나뿐이고 우리가 죽을 때쯤 민서도 돈을 벌고 있을 확률이 높다. 장모님은 딸만 하나였으니 모든 게 아내의 독박 부담이었지만 우리 애들은 셋이 아닌가. 십시일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 며느리가 제사 음식을 나누어 해 오듯 부담이 분산될 것은 확실하다. 그러니 아내의 걱정은 지나친 것이 아닌가 말이다.
나는 돈보다는 다른 걱정이 최근에 생겼다. 몸도 성치 않은 재영이가 민서를 데리고 혼자 살고 있다. 5년이 지나면 완치 판정을 받는다지만 암이 재발하는 경우도 많다. 재발한 암은 처음 암보다 고약하고 사납다고 들었다. 민서가 계획대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대에 합격한다고 해도 제 밥벌이를 온전히 하려면 칠팔 년은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의대는 등록금도 억 소리 나게 비싸다는데 재영이가 혼자 그 뒷바라지를 다 할 수 있을까. 헤어진 놈이 애 공부에는 지극정성이라 공부에 드는 돈은 대줄 거라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다. 다른 여자가 생길 수도 있고 돈벌이가 시원찮아질 수도 있으니까 결국 최종 책임은 재영이가 져야 한다. 민서가 의사가 된다면 그때부터는 재영이가 좀 편해질까. 민서가 돈을 잘 벌어 제 엄마를 먹여 살릴까. 요새 의사가 아니라 의사 할애비라도 그런 자식 없는데 민서라고 특별할 리는 없지 않을까.
아파트를 사서 독립한 독신인 재훈이는 벌써 대출금의 절반 정도는 갚았다고 한다. 공고와 전문대를 나왔지만 웬만한 대학졸업자들보다 돈을 잘 번다. 그러나 한여름 땡볕과 한겨울 찬바람을 견뎌야 하는 노가다 일이라 마흔이 넘은 재훈이가 지금 하는 일을 몇 년이나 더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얼마 전 내시경 검사를 했더니 여기저기 용종이 발견돼서 여러 개를 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우리에게나 막둥이지 재훈이도 이제 중년이 되었음이 느껴졌다. 나중에 아파트를 연금으로 돌려 노후를 대비한다고 하지만 부인도 없고 자식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아파트에 남겨질 걸 생각하면 미리 외롭다.
재영이와 재훈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살아있는 한 결국은 재현이가 보살펴야 할 것이다. 재현이가 그 역할을 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다. 재현이는 술이라도 한 잔 마신 날이면 꼭 재영이와 재훈이에게 전화를 건다. 안 받으면 몇 번이고 건다. 눈치를 보니 재훈이는 전화벨 소리에서 술 냄새를 맡고 전화를 받지 않는 것 같고 재영이는 시간 날 때마다 집에 좀 오라는 오래비 술주정을 받아주는 것 같다. 멀쩡한 정신일 때도 동생들 걱정을 오질 나게 많이 한다. 동생들을 보살피라고 유언을 남기지 않아도 재현이는 간이며 쓸개며까지 동생들에게 다 빼줄 아이다. 오죽하면 우리 부부가 죽으면 이 건물은 재현이 거라고 아내가 벌써부터 선언을 했을까. 유산이랄 것도 없는 변변치 않은 재산을 탐낼 재영이나 재훈이는 아니지만 아내는 순둥이 재현이의 장남 지위를 확실히 해 두고 싶어 했다.
재현이를 중심으로 셋이, 아니 민서까지 넷이 우애롭게 지낼 것은 믿는다. 다만 늙어 아무것도 못해 줘도 부모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다. 부모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자식들이 일정한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끌어당겨 준다. 중심이 되어 준다. 중심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일정하게 정해진 길을 따라 도는 것과 중심이 되어 행성들이 벗어나지 않도록 끌어당겨 주는 것은 고됨의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 고된 역할은 재현이가 짊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재현이는 강하고 철저하고 야무져야 한다.
나야 아내와 아이들의 보살핌 속에서 살다 죽을 테니 걱정할 게 없다. 또 내가 죽더라도 아내만 있으면 죽은 내가 섭섭할 정도로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 분명하다. 아내 성격상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 한 재현이의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재영이와 재훈이를 건사할 테니까 아내를 중심으로 올망졸망한 행성은 문제없이 돌 것이다. 문제는 아내까지 죽고 나서다. 아내까지 죽고 나면 남편이나 부인 없는 삼 남매만 덩그러니 남겨질 것이다. 특히 재현이는 밖에서 일절 사 먹는 일도 없이 제 엄마가 해 주는 밥만 줄곧 먹는 아이다. 그런 재현이가 육십이 넘고 칠십이 넘어서도 이 건물에 혼자 살면서 제 손으로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면서 동생들까지 건사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내 남은 목숨을 떼어 아내에게 덧붙여 주고 싶을 정도다.
재훈이는 몰라도 재현이는 어떻게 해서든 결혼을 시킬 걸 그랬다는 후회가 크다. 사실 재작년에 재현이가 한참 늦은 결혼을 할 뻔했었다. 재현이는 몹시 원했고 아내는 뜨뜻미지근했고 나는 몹시 반대했다. 이미 아는 아가씨였다. 재현이가 한때 진지하게 사귀었던 아가씨고 꽤 결혼 가까이 갔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뭐 때문인지 깨졌다. 재현이가 서른 초반일 때였고 아가씨가 세 살 연상이라고 했다. 아내 말로는 집 근처에서 몇 번 아가씨를 봤는데 키는 좀 작아도 날씬하고 예쁘다고,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고 했었다.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고 나이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남자가 연상의 여자와 결혼한다는 것이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으나 세상이 변했다니 어쩔 수 없었다. 재현이가 아가씨와 헤어지는 바람에 변한 세상에 애써 마음을 맞춰 욱여넣은 일은 다행히 헛수고가 되었다.
재작년은 재현이가 오십 줄에 임박했을 때였다. 아가씨는 오십을 넘었으니 아가씨라고 불리기에도 민망할 나이였다. 재현이가 삼십 대 초반일 때는 세 살의 연상이 영 못마땅해도 애써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재작년에는 아니었다. 내가 인생을 살아 보니 여자들이 훨씬 빨리 늙었다. 외모가 빨리 늙는 거야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에 비례하여 성정이 빠르게 거칠어지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나는 아내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데도 예순 살이 넘어서부터는 꼼짝을 못 하고 살아왔다. 수십 년간 보통 남자들보다 많이 저축해 두었건만 나의 위엄과 권위는 빠른 속도로 소진되었다. 재현이가 오십이 다 되어 연상과 결혼을 한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꼼짝도 못 하고 쥐어 잡힐 것이 뻔했다. 오십이 넘은 여자가 어떤지 재현이는 모른다. 연애를 하며 가끔 만나면 여전히 아가씨일지 모르지만 결혼을 해서 같이 살 게 되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오십이 넘어 굳이 결혼을 하려는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애를 낳을 것도 아니고 너무 뻔하지 않은가. 젊었을 때는 잘 놀고 돈 잘 쓰는 세련된 남자들과 즐기다가 다 늙어서는 무던하고 착하고 말 잘 듣고 잘 휘둘리는, 노년을 책임져 줄 남자를 찾는 것 빼고는 무슨 의도가 있겠는가 말이다.
“재현이는 뭐 다른가. 재현이도 지금 나이에 뭐 죽도록 사랑하는 여자 찾는 거 아니지. 솔직히 밥 해주고 빨래해주고 늙었을 때 병수발도 들어줄 마누라가 필요한 거잖아요. 아가씨가 똑같은 생각을 한다고 쳐도 그게 흠이 되나.”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지. 재현이보다도 나이가 많은 여자가 어떻게 재현이에게 밥 해주고 빨래해주고 병수발을 들어주나? 그 반대가 되면 어쩌냔 말이야. 남자가 연상, 여자가 연하로 결혼하는 데는 이유가 다 있는 거라고. 과부는 구슬이 서 말이고 홀아비는 이가 서 말이라고 당신이 맨날 그러잖아? 남자가 죽으면 여자는 혼자 살 수 있지만 여자가 먼저 죽으면 남자는 개밥의 도토리 신세인 거 맞지.”
“아니, 아가씨가 겨우 세 살 연상인데 왜 누가 먼저 죽니 마니를 따져요? 그리고 만약 내가 덜컥 병이라도 들어 봐요. 당신이랑 재현이랑 어떻게 사나. 아가씨가 이제 나이를 먹어선지 뭐 바라는 것도 없고 따지는 것도 없대요. 조금만 반반하면 뭐를 차려달라는 둥 꼴 같지 않게 구는 아가씨들에 비하면 나는 훨씬 믿음이 가더만. 우리 집 꼴도 따지고 들면 뭐 떳떳할 건 없어요. 재영이도 저 꼴이지 재훈이도 결혼 안 했지, 재현이는 장남이지. 우리가 지금 뭐 가릴 땐가.”
“남자는 오십이어도 꿀릴 게 없지. 재현이가 뭐 장가를 갔다 온 것도 아니고. 오십이 넘은 여자랑 결혼해 봤자 애를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보기에 우습기만 하지. 여태 결혼 안 하고 있다가 오십이 넘은 여자랑 결혼해 봐, 남들이 뭐라고 할지.”
내가 절대 허락을 안 한 때문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선지 재현이의 결혼 타령은 잠잠해졌다. 재현이가 한동안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고 살이 쪽쪽 빠지는 걸 보니 마음은 안 됐지만 선이야 재현이가 보려고만 하면 아직은 끊이지 않을 것이고 더 젊은 아가씨를 만날 수도 있을 터라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때는 우리 부부가 죽고 재현이만 덩그러니 남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었다. 한 마디로 배가 불렀었다.
점심상을 치운 아내가 옆방으로 직행하지 않고 옥탑방으로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요즘 옆방에서 재훈이가 남겨 두고 간 컴퓨터를 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각 채널마다 쏟아지는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을 테레비로 모조리 보고도 다시 컴퓨터로 본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이라 새 프로그램을 봐도 노상 재방송을 보는 기분이더만 그걸 굳이 컴퓨터로 또 보냐니까 맨날 똑같은 내용인데도 내가 뉴스를 열심히 보는 것과 똑같다고 했다. 그런데 아내가 유튜브에 빠진 것이 나에게는 퍽 잘 된 일이다. 안방 텔레비전의 리모컨 지휘권을 온전히 차지하게 된 것만 해도 좋은 일인데 아내가 좋아하는 원 플러스 원처럼 좋은 일이 하나 더 딸려 왔다. 밥상 메뉴가 달라졌다.
젊었을 때 아내는 끼니때마다 무엇을 해서 식구들을 먹일까 고민했다지만 나는 미안하게도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조차 못 한다. 그때의 먹는 일은 먹고 나서 하는 일 때문에 필요한 일종의 준비단계나 몸풀기 단계였기 때문에 중요도가 없었다. 뜻도 모르면서 그냥 무의식적으로 외웠던 국민교육헌장 같은 거였다. 밥을 먹어야 돈을 벌러 가고 밥을 먹어야 다음 날 돈을 벌기 위해 잘 수 있었다. 뭘 먹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먹는다는 사실만 중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먹고 텔레비전 보고 자는 일이 하는 일의 전부가 되어선지 무엇을 먹게 될 것인가에 관심이 생겼다. 그런 점에서 아내가 백종원의 요리에 푹 빠져 쌈장을 야무지게 껴안은 케일쌈밥이나 삼겹살집에서나 보았던 폭발하는 계란찜을 선보일 때 반가웠다. 감자볶음처럼 수십 년간 먹은 반찬도 백종원 스타일로 리모델링되어서 새 반찬을 먹는 기분이었다.
물론 천하의 백종원도 아내가 어떤 반찬을 할지에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 아내가 어떤 반찬을 하느냐는 오직 재현이의 입맛에 달렸다. 아내의 원칙은 한결같다. 돈 버는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을 한다는 것. 그래서 내가 돈을 벌 때는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했었고 지금은 재현이가 좋아하는 반찬을 한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백종원 식으로 한다는 것 정도다. 다행히 재현이는 자기 스타일처럼 입맛도 토종 한식파라 내가 덕을 많이 본다. 만약 재현이가 민서가 사족을 못 쓰는 스파게티나 피자, 햄버거, 돈가스를 좋아했다면 나의 입맛은 사상 전향하듯 강제로 개조되었을 것이다.
토요일 저녁에 근처에 사는 재훈이까지 넷이 밥을 먹는 일이 종종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다. 나는 이제 이가 안 좋아 질긴 것을 잘 못 먹지만 나는 이제 돈을 버는 사람이 아니다. 돈을 버는 두 아들들은 엄마가 구워 준 고기를 쌈을 싸서 와구와구 잘 먹는다. 저는 먹지도 않는 회를 재훈이가 잔뜩 사 올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아내는 재훈이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재훈이만 먹을 만큼의 고기를 별도로 구워 주면서 다 같이 고기 먹으면 되니까 비싼 회 사 오지 말라고 잔소리를 한다. 고기보다 회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재훈이가 제 엄마 말을 안 듣는 것이 퍽 좋은 일이다.
요새 아침마다 줄곧 먹는 소화도 잘 되고 보들보들한 쌀 카스테라도 재현이가 엄청 맛있다고 한마디 하는 바람에 정착된 빵이다. 밥 하는 일을 여름철 꼬이는 파리처럼 귀찮아하던 아내가 아침에는 빵을 먹겠다고 선언한 지는 꽤 됐다. 처음에는 아내가 식빵을 잔뜩 사 와서 냉동고에 넣었다. 렌지에 돌린 식빵은 테두리가 질기고 가운데 부분은 축축했다. 크기는 커서 한 조각을 먹으면 빠듯했지만 두 조각은 먹지 못할 정도였다. 재현이가 식빵을 굽는 기계를 사 왔다.
“엄마, 이거 토스트 식빵이야. 길거리에서 파는 토스트 만드는 식빵. 이건 구워 먹는 거지 그냥 먹는 거 아닌데. 이 테두리가 너무 질겨. 식빵 먹으려면 요 앞 파리바게트에서 사. 거기 식빵 종류 되게 많아.”
맨날 똑같은 말로 싸우는 국회의원들에게 질리는 것처럼 식빵이 지긋지긋해졌을 무렵 찐빵이 등장했다. 시장에서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찐빵을 잔뜩 사서 얼려 두고 아침마다 렌지에 돌려줬다. 한 번 얼렸다 녹여서 그런지 냉동 생선이 생물을 못 따라가듯 원래의 찐빵 맛은 덜했다. 생선은 반드시 생물만 고집하는 아내가 어째서 빵은 그토록 얼리는 걸 좋아하는 것일까. 재현이가 처음에는 찐빵을 두 개씩 먹다가 한 개만 먹게 되었을 때 이런저런 빵들을 보내던 재영이가 마침 카스테라를 한 박스 보냈다. 서른 개나 보냈다고 했다. 아내가 전화를 해서 왜 이런 데 돈을 쓰냐고로 시작해서 테이프를 틀 듯 늘 하던 소리를 한바탕 늘어놓았다. 재영이가 인터넷에서 평이 좋아서 샀다면서 빵집보다 훨씬 싸다고, 하나에 천 원 정도밖에 안 한다고 했지만 아내의 걱정을 없애지는 못했다.
아내의 걱정을 더 크게 하는 일은 다음 날 아침에 생겼다.
“우와, 엄마 이 카스테라 되게 맛있다. 어디서 샀어? 비싸나? 내가 돈 줄 테니 우리 이거 계속 사 먹으면 안 되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재현이가 대신해 줬다. 메이커 빵집 것보다 덜 달면서 부드럽기는 더한 카스테라는 토스트 식빵이나 찐빵과는 차원이 다르게 맛있었다. 그날 저녁 재현이가 큰 우유 묶음을 사 왔다.
“엄마, 앞으로 내가 우유 사 올 테니 아침마다 카스테라 먹자. 아버지는 어때요?”
나야 땡큐였다. 그런데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였나, 아침 식탁에 카스테라 한 개와 찐빵 두 개, 우유 세 잔이 놓였다. 우유 한 잔, 물 두 잔이 아닌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엄마, 내가 돈 준다니까. 좀 이러지 마. 아니면 나도 그냥 찐빵 줘. 나도 찐빵 먹을게.”
웬만하면 허허실실인 재현이가 짜증을 냈고 아내가 재영이에게 뭐라 했는지 몰라도 하루 세 개씩 카스테라는 끊이지 않고 아침 식탁에 올라오게 되었다.
한참 만에 옥탑방에서 내려온 아내가 부엌에서 뭔가를 뚱땅뚱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새참을 준비하는 것일 게다. 나는 젊어서부터 천천히 꼭꼭 씹어서 소식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아내 말에 의하면 나의 그런 식습관은 똥 누는 시간까지도 규칙적인 것과 함께 내가 아주 오래오래 살 확실한 근거다. 아내는 내가 지나치게 건강을 챙긴다고 싫어한다. 어디가 조금만 아프면 총알같이 병원으로 달려가고 그 좋아하는 술과 담배를 곧바로 줄인단다. 그런데 그 말을 칭찬이 아니라 조롱투로 한다. 내가 아파서 병수발을 들게 될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아내가 왜 내가 건강을 챙기는 것을 못마땅해할까. 그럼 내가 아파도 술과 담배를 평소처럼 마시고 피우면 더 좋아할까.
똥 누는 시간까지도 규칙적인 것은 맞다. 늘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물 한 컵을 마시고 똥을 눈다. 역시 늘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양의 밥과 새참을 먹고 담배를 피운다. 아무리 맛있는 것을 해 줘도 코딱지만큼만 먹는다고 아내가 짜증을 내도 평생 몸에 밴 습관을 어쩔 수는 없다. 한 번에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찔끔찔끔 나누어 자주 먹는 것이 아내에게 미안하긴 하다. 아침 일곱 시, 낮 열두 시, 저녁 여섯 시가 땡 하면 세끼 밥을 먹고 아침 열 시와 오후 세 시, 밤 아홉 시에 세 번의 새참을 먹는다. 아침은 간단히 카스테라로 먹고 점심은 보통 국과 김치로 먹는다. 국은 한 통씩 끓여 두고 며칠씩 먹지만 가끔은 국 대신 고등어조림이나 새치구이, 오징어초무침 같은 방금 한 반찬이 등장하기도 한다. 또 가끔은 칼국수를 끓여 주거나 옹심이도 해 준다. 저녁은 재현이도 퇴근하고 먹어야 하니 아내가 가장 신경을 쓴다. 김치찌개나 청국장을 끓이고 소불고기나 삼겹살, 돼지갈비, 꼬치산적과 동그랑땡, 잡채 같은 것들을 번갈아 가며 한다. 세 번의 새참은 막걸리 한 잔과 안주다. 안주는 땅콩이나 과자를 줄 때도 있고 전날 저녁에 먹다 남은 반찬을 줄 때도 있고 감자전이나 빈대떡을 부쳐줄 때도 있다. 노래 교실에 가는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아내가 점심 반찬과 오후 새참을 미리 해 둔다. 식탁 위에 밥그릇, 국그릇, 수저, 물컵도 놓아둔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주는 대로 잘 먹는다. 아내가 우리 집 세 남자에 대해 공통되게 칭찬하는 것이 짜다 싱겁다 아무 말 없이 주는 대로 잘 먹는다는 것이다. 여전히 부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내를 보면 미안하지만 아내가 해 둔 음식을 꺼내 먹는 것과 싱크대에 다 먹은 그릇을 갖다 두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평생 해 보지 않은 일을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오늘 새참은 전이다. 재현이가 전을 좋아하기 때문에 본게임 전 시범경기처럼 저녁 반찬 전 나의 새참으로 자주 등장하는 메뉴다. 다행히 나는 재현이처럼 하나하나 이쑤시개에 꽂는 품을 들여야 하는 꼬치산적보다는 그냥 척하고 부치면 되는 감자전이나 빈대떡을 더 좋아한다. 이따가 택배 기사가 오면 재영이한테 반찬을 보낸다고 했으니 오늘 새참 메뉴는 보나 마나 감자전이다. 재영이는 꼬치산적이나 빈대떡은 먹지 않는다. 역시 감자를 가는 소리가 웽하고 들린다. 감자는 손으로 갈아야 맛있다던 아내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언제부턴가 믹서기로 감자를 간다. 이럴 때는 나가 봐야 한다.
“꼬치산적도 할 거지? 내가 꼬챙이 끼울까? 일루 줘 봐.”
“아침 먹고 다 꽂아 놨어요. 가서 텔레비전 봐요. 감자전 부쳐서 갖고 들어갈게.”
내 나이에 하루 세 번의 끼니와 세 번의 새참을 아내가 꼬박꼬박 차려 주는 것은 참으로 황송한 일이다. 퇴직한 초반에는 친구들과 꽤 자주 만났었는데 다들 요리를 배운다, 집안일을 돕는다 하면서 살아남을 방법을 익히느라 분주했다. 어느 집이나 아내들이 무서워졌다. 젊어서 큰소리치던 대가를 이제 치르는 거라고들 했다. 나는 설거지 한 번을 안 해 봤다. 믹스 커피 타 먹는 것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부엌일의 전부다.
돈 벌 때와 대우가 달라졌다고 서러워하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깜빡깜빡 잊는다. 달라진 대우를 서러워할 만큼 돈을 많이 벌어다 준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빚 안 지고 살아온 것도 내가 남다르게 돈을 잘 벌어서가 아니라 아내가 남다르게 돈을 잘 아껴서다. 미니스커트에 선글라스를 쓰던 곱고 화려했던 아가씨가 한겨울에 보일러 잠깐 트는 것에도 화를 낼 만큼 악착스럽고 짠내 나는 할머니가 된 것도 다 따지고 보면 내 탓이다.
그럼에도 가끔 서러운 것은 아내의 야박해진 대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칠십이 넘은 아내는 젊었을 때와 거의 다름없는 일을 한다. 팔십이 넘은 나는 젊었을 때 하던 역할의 반의 반의 반도 하지 못한다. 그냥 주는 대로 먹고 입으면서 하루종일 텔레비전을 보다가 잔다. 그나마 건물이 있어 소소한 건물 수리나 계단 청소 정도가 다행히 내 몫의 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들어가는 첫 박자가 어려운 노래를 부를 때처럼 아내를 칭찬할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아내는 내 팔자가 최고라며 한탄하지만 죽을 때까지 이렇게 시간들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가끔 서럽다는 것을 아내는 알까.
“막걸리 한 잔 해요.”
“최미옥이도 한 잔 하지?”
“그럴까? 감자전도 있는데?”
“잔 하나 더 가져올게.”
“아이고, 놔둬요. 내가 가져 오지.”
아내가 잔을 하나 더 가져왔다. 아내는 아이들이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감자전을 젓가락으로 척척 찢어 준다.
“고추 들어간 건 한 장만 부쳤는데 더 부칠 수 있어요.”
“한 장도 많지. 더운데 고생했네.”
아내가 리모컨을 집어 들고 숫자 버튼을 눌렀다.
“맨날 하는 건데, 뭐. 어, 임영웅 나오네. 쟤는 어떻게 저렇게 노래를 잘하는지. 군고구마 팔다가 출세했네. 쟤도 쟤지만 쟤 엄마가 얼마나 고생을.......”
볼 때마다 반복돼서 외워진 아내의 임영웅 예찬을 들으며 막걸리를 마시고 감자전을 먹는다. 달큰하고 고소하다. 가끔은 무기력해서 서럽지만 할 일이 없어 느긋하고 안온한 시간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다시 가족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여전히 종종거리는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죽을 때까지 이런 평화라도 계속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