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먹었나? 여기는 벌써 먹었지. 여태 밥도 안 먹고 뭐 하나? 택배 내일 도착할 거야. 내일 민서도 집에 오지? 으응, 민서가 꽤 늦게 오는구나. 그래, 물 좀 넣고 데워야지, 안 그러면 짜. 우리도 소갈비는 못 사 먹어. 노래 교실 같이 다니는 정육점 친구가 고기를 그냥 줘서 해 본 거야. 내가 김치며 반찬이며 명절이면 전도 좀 해 주고 그러니까 가끔 고기를 주더라고. 감자부침개는 후라이팬에 뎁혀 먹어야 맛있어. 렌지에 돌리면 뻐덕뻐덕해. 열 장이 뭐가 많나? 서너 번 먹으면 끝이지. 하긴 서울 사람들은 코딱지만큼씩 먹으니까. 민서는 몇 시쯤 오는데? 민서 있을 때 갈비 먹으라고 금요일에 맞춰 보냈는데. 걔가 갈비는 잘 먹더라고.
어제? 그럼, 노래 교실 갔지. 점심은 옹심이 먹었지. 그래, 감자바우에서. 뭐라고? 잘 안 들려. 핫 뭐? 핫플레이스? 으응, 유명하다고? 별 지랄들 다 하네. 옹심이 가게가 출세했네, 출세했어. 하긴 서울 사람들은 호떡집에도 줄 서드만. 너 지난번에 왔다가 못 먹은 중앙시장 호떡집, 서울 사람들이 마카 한 시간씩 줄을 서고 자빠졌대. 감자바우도 테레비에 한 번 나오더니 사람이 바글바글해. 주말에는 앉을 자리가 없대. 뭐 좀 유명해지면 마카 어떻게들 알고 오는지. 팔천 원짜리 옹심이 먹으러 서울서 강릉까지 온다니까. 없다 없다 해도 돈이 썩어들 나는 거지 뭐. 우리야 평일 낮에 가니까 먹을 수 있지. 맨날 뭐 먹나, 뭐 먹나 하면서 갔던 데만 또 가. 막국수, 옹심이, 보리밥 맨날 그래. 맛있기는 뭐가 맛있나. 할머니들이 싼 데 찾아다니며 먹는 거지. 지난번에는 돈가스 집에를 갔는데 맛있더라. 돈가스를 못 먹긴 왜 못 먹어. 없어서 못 먹지. 엄마가 예전에나 그런 거 못 먹었지 지금은 돼지고기 좋아해.
오늘 저녁은 김치찌개 끓여 먹었지. 된장찌개? 아이고, 된장찌개는 생각만 해도 지겹다. 그래, 진짜 기네스북에 올랐겠네. 시집와서 365일 줄창 된장찌개만 끓여 댔으니. 니들 어릴 때는 돈이 없으니까 그랬지. 아니지, 된장찌개는 돈이 안 들지. 감자, 호박 같은 건 밭에 널렸으니까 두부만 좀 사면 됐지. 두부도 초당 고모할머니한테 많이 얻어먹었고 두부 없으면 그냥 호박장 끓여 먹고. 그래, 시장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다라이로 두부 팔던 할머니. 그때는 김치찌개를 어떻게 끓여 먹나? 배추랑 양념이랑 김치 담그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데 아까워서 김치를 찌개에 넣을 수가 있었어야지. 지금이야 뭐 돈이 흔한 세상이니까. 빚을 내서라도 잘 먹고 잘 쓰고 사는 세상이잖어. 돼지고기 송송 썰어 넣고 김치찌개 끓이면 아빠랑 오빠도 잘 먹어. 김치찌개가 뭐가 어려워? 김치 좀 넣고, 파 좀 넣고, 고춧가루 좀 넣고, 뭐라고? 몇 숟갈? 아이고, 그냥 좀 넣으면 되지, 숟갈은 뭔 숟갈.
단오? 다음 주지. 요새는 단오도 옛날 같지 않아. 살 게 뭐 있나? 없어. 옛날에는 구경할 게 없으니까 단오가 인기였지, 지금은 안 그래. 더워서 너 와야 구경도 못 해. 그놈의 약 때문에 더워서 죽겠다며? 참, 이제 거의 5년 돼가지 않나? 그래, 힘들어도 좀만 참아. 이왕 먹은 거 5년 채워야지. 지난번에 얘기한 노래 교실 할머니는, 아 왜 그 유방암 재발했다는 할머니 말이야. 그래, 그 할머니. 다시 항암 치료한다고 이제 노래 교실 못 나온다고 울더라. 너도 항상 조심해야 돼. 5년 지나면 완전히 끝인 줄 알았는데 것도 아니더라. 그래, 얼른 저녁 먹고 낼은 민서랑 갈비 뎁혀서 감자부침개랑 먹어. 물 꼭 넣고 뎁혀! 그래, 또 전화할게.”
이왕 보낼 때 반찬이랑 감자부침개를 좀 더 보낼 걸 그랬다. 택배비 본전 뽑는다고 많이 보내봤자 다 먹지도 못하고 버린다고 재현이가 얼마나 성화를 부리던지. 이제 재영이가 집에 와도 평소에 식구들 먹던 대로 먹지 잡채에 전에 갈비에 그렇게 산해진미 절대 차리지 말라고, 내가 그러면 재영이가 부담스러워서 오히려 자주 못 온다고 신신당부도 했다.
재영이도 이제 오십이 다 되어 가지만 나는 재영이가 집에 오면 부엌에 발도 못 디밀게 한다. 친정이지만 워낙 가끔 오니 손에 익지 않은 남의 살림을 거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 낡고 오래된 집의 구질구질한 부엌살림을 남에게 보이기 싫다. 설거지라도 하겠다고 바득바득 나서는 걸 매번 극구 말렸는데 그런 게 부담스러웠나?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전화할 때마다 엄마도 이제 칠십이 넘었는데 삼시세끼 밥 하는 거 힘들겠다고 늘 걱정하는 재영이니까. 그래도 감자부침개는 더 보냈어야 한다. 지난번에 통화할 때 재영이가 민서 가졌을 때랑 암 진단받았을 때 감자부침개가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서울서는 먹을 데가 없어서 못 먹었다는 말을 해서 그날 밤새도록 울었다. 며칠간 남편이 꼴도 보기 싫어서 귀가 잘 안 들리는 내가 더 높이곤 하던 테레비 소리 좀 줄이라고 몇 번이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물론 재영이가 잘못했다. 백번, 천 번 잘못했다. 딱 봐도 놈팽이인 놈한테 꽂혀서 그렇게 반대하는 살림을 차릴 때는 나도 정말이지 어디 한번 고생 좀 해 봐라 하는 마음이었다. 나이 차이도 차이지만 한번 결혼했다가 애까지 딸린 놈팽이라니. 꽃 같은 내 딸이, 말이 되는가 말이다. 딸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때는 정말이지 어디 살아 봐라, 피눈물 흘려 봐야 내 말 안 들은 걸 후회하지 하는 마음이었다. 십팔 년 간 연을 끊고 살면서 보고 싶을 때와 미울 때의 횟수가 팽팽했다. 그러면서도 내 저주 때문에 재영이가 불행해질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혹시 내 눈이 틀려 그 놈팽이가 좋은 놈이기를 바라기도 했다.
뼈 빠지게 공부시켜서 서울의 좋은 대학 보내면 좋은 남자 만나 행복하게 살 줄 알았다. 저보다 못 배우고 못난 촌 계집애들도 시집가서 잘들 사는데 바보 같은 게 어디서 그런 놈팽이를 만나 가지고, 이 촌구석에서 청소 한 번, 설거지 한 번 안 시키고 키운 딸이다. 동네 엄마들이 자기 딸에게 이년, 저년, 이 기집애, 저 기집애 하는 소리를 맨날 들어도 나는 단 한 번도 재영이를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 놈팽이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열불이 나서 봄까지 내복을 입는 남편이 앵앵거리건 말건 한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대관령 바람으로 식혀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자식이다. 어떻게 자식하고 연을 끊나. 죽을죄를 지었을 때 연을 끊으면 남인 거고 그렇지 않은 게 가족 아닌가. 연쇄살인범 엄마도 방송에서 보니 우리 아들은 착하다 하던데 그게 부모 아닌가. 남편이 서슬이 퍼래서 재영이하고 연을 끊지 않으면 자기하고는 못 산다고 노발대발할 때 나는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젊어서 연애하면서 한창 좋을 때도 남편이 무서웠는데 그렇게 무서웠던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어디서든 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남편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나와는 딴 세상 사람이었다. 뭐가 불만이고 뭐가 잘못이고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를 마음에 담아 두고는 못 사는 남자였다. 경우에 없거나 틀린 말은 안 했으나 듣기 거북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가족에게도 그랬고 남에게도 그랬다. 까탈스러운 성미답게 일을 워낙 깔끔하게 처리해 직장에서 눈칫밥은 안 먹는 것 같았으나 퇴직하고 나니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자식에 대해서도 서릿발 같았다. 재영이가 핏덩이 민서를 안고 몇 년 만에 집에 왔을 때 발도 못 디밀게 했다. 나더러 쫓아내라고 했다. 안 그러면 나도 쫓아낼 거라 했다. 재영이를 돌려세우면서 다시 기차를 타고 먼 길을 울며 갈 재영이보다도 당장 등 뒤에서 벼락을 날릴 남편이 더 신경 쓰였던 나도 참 한심했다. 지금 같으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벼락은 이제 내가 더 잘 날린다. 재현이 말마따나 제우슨가 뭔가 하는 양놈의 신보다도 더 잘 날린다.
당신이 뭐라 하든 나는 재영이를 만나며 살 거고 집에도 오게 할 테니 그게 싫으면 당신이 집을 나가라고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른 것은 재영이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3기라고 했다. 4기면 다 죽던데 3기면 사는 건가. 3기 앞쪽인가 뒤쪽인가. 얼굴도 가물가물한 재영이가 전화를 걸어 이틀 뒤에 수술한다고, 미안하다고, 보고 싶다고 우는데 전화기를 들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내 팔을 잡으며 왜 그러냐고 묻는 남편을 하마터면 후려칠 뻔했다.
다음 날 재현이와 재훈이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갔다. 재영이 대학 졸업식 뒤로 서울은 처음이었다. 멀미를 하다 죽어도 가야 하는 서울길이었다. 서울에 들어서면서는 재훈이가 운전대를 잡았는데 가다가 서다가 얼마나 차가 꺽꺽거리는지 맥주잔이 넘칠랑 말랑 하듯 새벽에 먹은 밥이 목구멍을 넘어올랑 말랑 했다. 역시 서울은 사람 살 데가 못 되지 싶었다. 이렇게 감질나는 데서 어떻게 사나.
재영이 집은 먼지 하나 없었다. 현관 바닥이 방바닥처럼 깨끗한 것은 손님이 오니까 치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휘 둘러본 집은 손님이 온다고 벼락치기로 치운 게 아니었다. 천정도 벽도 바닥도 온통 하얀 것이 방문만 해도 우산을 준대서 딱 한 번 가 봤던 아파트 모델하우스 같았다. 짙은 갈색 소파에 먼지 하나 없었고 서랍장 위에는 수건이 군대처럼 각 잡혀 차곡차고 개켜져 있었다. 주방을 슬쩍 보니 이것저것 늘어져 있기 쉬운 식탁 위에도 크리넥스 각티슈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이 사는 집 같지 않고 재영이가 어릴 때 사 줬던 인형집 같았다. 집안 전체를 호스로 물청소를 하는지 어디를 봐도 깨끗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런 데서 사는데 왜 암에 걸렸나.
놈팽이는 과일을 깎고 씻어 오와 열을 맞춰 접시에 담아 내놨다. 쟁반과 둥그런 접시와 포크 여섯 개의 꽃무늬가 일치했다. 세트구나. 우리 집은 밥그릇과 국그릇의 무늬도 다른데 재영이는 죄다 세트로 쓰는구나 싶었다. 재현이는 민서를 곁에 세우고 집을 둘러본다고 이방 저 방 문을 열어 보고 있고 재훈이는 바닥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들 둘을 데리고 온 김에 놈팽이를 드잡이 하고 싶었지만 민서가 있었다. 또 재영이의 병수발을 놈팽이가 들어야 할 터였다. 산동네 살 때 찔끔찔끔 나오던 수돗물처럼 이어지던 대화도 금세 끊어졌다.
“식사들 하러 가시죠.”
놈팽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재영이가 물었다. 조직 검사한 병원에서 암이라는 소리를 듣고 대학병원으로 갈 때도 담담했다던 애가 똥 마려운 사람처럼 조급해했다.
“그래, 엄마 밥 먹으러 가자. 어디로 갈까?”
“뭘 어디로 가? 잠실로 가야지. 이 동네에는 좋은 데가 없잖아. 차 한 대로는 못 가니까 처남도 운전하고 가야겠네. 어차피 차로 움직일 거면 강남으로 갈까?”
“오빠가 서울에서 운전할 수 있을까? 길도 모르는데. 그냥 요 근처에서 먹어요.”
“요 근처 어디 먹을 데가 있다고? 서울까지 오셨는데 아무 거나 대접하란 말이야?”
낼이면 수술대에 누울 애한테 말꼬리를 치켜세우는 꼴이라니. 재훈이가 바닥 대신 놈팽이를 노려 봤다.
“알았어요. 재훈아 너가 운전할래?”
재영이는 놈팽이와 재훈이 눈치를 계속 봤다. 나나 재현이는 좋은 게 좋은 거고 다 참고 이해하고 살자는 쪽이지만 재훈이는 달랐다. 놈팽이가 싫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있는 재훈이가 놈팽이의 심기를 상하게 할까 봐 재영이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호스로 물청소하는 인형의 집에 들어선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재영이가 십팔 년을 어떻게 살았는지 다 알아 버렸다. 바보 같은 것. 걱정 말라고, 잘 살 거라고 늘 순둥순둥하던 것이 놈팽이한테 미쳐서 생전 처음 보는 독사 눈을 뜨고 나한테 그렇게 포악을 떨더니 여태 이러고 살았구나 싶었다.
“내일 수술할 사람이 가고 싶다는 데 가요. 그까짓 밥 아무 데서나 먹으면 어떻다고. 사람이 살동말동 하는 판에. 밥 먹으러 서울 온 것도 아니고.”
재훈이가 놈팽이를 쏘아보며 목소리를 깔았다. 그렇게 한 끼를 먹고 다음 날 수술을 받을 재영이를 남겨 두고 별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꼭 길바닥에 몰래 애를 버리고 오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이백만 원을 안 빌려준 게 그렇게 후회가 되었다.
연을 끊고 몇 년 지나선가, 재영이가 문득 전화를 걸어 이백만 원만 빌려 달라고 했다. 서울서 대학 다닐 때도 돈 보내달라는 말을 단 한 번도 안 했던 재영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용돈을 보내 주면 그걸로 끝이었다. 다른 집들은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 사흘 도리로 용돈 떨어졌다고 전화를 한다는데 재영이는 돈 떨어지지 않았냐고 물으면 항상 괜찮다고 했던 아이다. 그런 아이가 연을 끊은 엄마에게 몇 년 만에 전화해서 돈을 빌려 달라고 하다니. 혀를 깨물고 죽으면 죽었지 그런 말을 할 아이가 아니었다. 이백만 원도 없어서 마누라한테 돈 빌려 오라고 하는 놈팽이라니. 억장이 무너지는 만큼 화가 끓어올랐다. 너 빌려 줄 돈은 없다고 전화를 탁 끊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재영이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늙은 남편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줄줄 흘렸다. 수술 잘 받고 퇴원하면 집에 오라고 했다. 그때까지도 서슬의 끄트머리가 살아 있어 삼시 세 끼와 삼시새참을 때맞춰 꼬박꼬박 대령하게 하던 남편이 그날은 하루 종일 굶었다. 하긴, 그날도 밥 타령을 했으면 영원히 굶게 되었을 테지만. 그날로 남편과 나의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재영이가 죽을 뻔한 것이 남편 탓은 아니건만 남편은 자신이 한몫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남편이 두 몫, 세 몫 했다고 생각했고.
남편이 죽고 혼자가 된 할머니들이 노래 교실에 꽤 많다. 촌이니 큰 부자는 없지만 집 한 채와 넉넉한 연금이나 유산을 남기고 남편이 죽으면 관을 묻고 돌아오면서부터 벙싯벙싯 웃는단다. 정년퇴직을 한 남편들이 몇 살까지 사는 것이 적당하냐를 두고 찧고 떠들기도 한다. 결국 남편들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과 진배없다. 나는 그런 말들을 듣기는 해도 내 입으로 뱉어 본 적은 없다. 심심해서 어울리기는 해도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벌리는 것은 경박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아직 주름살도 기미도 없는 매끈한 피부 덕분에 새시집 가도 되겠다는 시샘 가득한 소리를 들을 때면 미쳤다고 새시집을 가나 하면서도 남편 없이 혼자면 얼마나 홀가분할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이제는 남편이 없어서 아쉬울 것은 정말 하나도 없으니까. 이제는 기운조차도 내가 더 세다.
남편은 이제 소금에 절여진 배추처럼 숨이 다 죽었다. 아첨하는 순한 양이 되었다. 김치가 맛있게 담가졌다는 둥 도라지 무침이 새콤하니 맛있다는 둥 내 비위를 맞추려 애쓴다. 내가 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자기 신경 쓰지 말고 매일이라도 놀러 다니라는 둥 서울 재영이네 집에도 좀 다녀오라는 둥 아첨의 강도가 높아진다. 담배 살 돈도 부족할 텐데 천 원 마트에 가서 비누며 화장지며 치약도 부지런히 사다 나른다. 젊을 때 좀 그렇게 할 것이지, 부아가 치밀다가도 마음이 짠해선지 여태 꽉 잡혀 살아온 인이 배겨서인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사는 날까지는 잘해 주자는 착한 마음이 들 때가 많다.
얼마 전에는 남편이 천만 원이라는 목돈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매달 용돈을 타 쓰는 남편으로서는 퇴직금 이후 만져 본 가장 큰 돈일 게다. 퇴직금으로 낡은 건물이나마 건물주가 되었을 때는 건물에서 돈이 방귀처럼 뽕뽕 나올 줄 알았다. 농협이 이사 가서 동네 상권이 죽는 일과 아무리 독촉해도 월세가 밀리는 세입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밀리는 월세야 보증금에서 까는 거니까 한숨과 함께 잊어버릴 수 있지만 아예 빈 층이 생기는 것은 남편의 용돈을 깎아야 하는 일이었다. 깎을 수 있는 여분의 씀씀이는 남편의 용돈뿐이었다.
자기가 살면 얼마나 살겠냐고, 꼭 5만 원을 깎아야 하겠냐고 하소연하는 것을 매몰차게 자르고는 내 마음도 짠했다. 혀를 깨물고 죽으면 죽었지 남에게 비굴한 소리는 안 하던 남편이었다. 가오를 잡을 땐 그게 못마땅하더니 가오가 죽자 그것도 못마땅했다. 하지만 술담배 줄이면 건강에도 좋다고 눙쳐 버렸다. 짠한 건 한순간이지만 앞으로 세입자를 못 구하면 계속해서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할 터였다.
그런데 천 원 마트를 들락거리면서도 목돈이 남편에게 있다는 건 애들이 용돈을 쥐여줬기 때문이리라. 내가 즈이들 아빠 허리띠를 졸라매는 걸 알고 나 몰래 쥐여줬겠지. 어버이날이나 생일에 남편 통장으로 입금되는 돈은 내가 다 안다. 남편 통장 관리도 내가 할 뿐 아니라 그런 공식적인 돈은 애들이 송금한 후에 알려 주니까 내가 모를 수 없다. 고로 그런 돈은 남편 통장에 있지만 남편 돈이라고 할 수 없다.
그 문제로도 나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자주 한다. 나는 자식들로부터 돈을 받는 것이 정말 부담스럽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싫다. 시집와서 다달이 남편 월급을 쪼개고 쪼개고 다시 쪼개어 살면서 생일이니 어버이날이니 명절이니 하는 특별한 날들이 얼마나 특별하게 부담스러웠는지 모른다. 애들도 똑같을 것 아닌가.
그래서 얼마 전에는 재훈이한테 이천만 원을 줘 버렸다. 재훈이가 근처의 아파트를 사서 독립한 후로는 다달이 주는 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았다가 대출금 갚는 데 보태라고 줬다. 같이 살 땐 밥이며 빨래라도 해 줬지, 아무것도 안 해주면서 자식 돈을 어떻게 받나. 재훈이가 펄쩍 뛰며 엄마도 참 어지간하다고 했지만 통장으로 쏘아 버렸는데 지가 어쩌겠는가. 막내인 재훈이가 때 되면 휴대폰을 바꿔 주고 요금도 제 통장에서 내주는 것만 해도 부담스러워 죽겠다. 휴대폰 값을 줘도 절대로 안 받는다. 그깟 휴대폰, 내 돈으로 사면 마음도 편하고 좋을 텐데.
같이 사는 재현이가 생활비를 주는 건 군소리 없이 받는다. 지하는 빈 지 일 년도 넘었고 1, 2층에서 나오는 월세로 우리 생활비며 세금이며 공과금을 다 감당할 수는 없다. 재현이가 생활비를 대 주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다. 꼬박꼬박 밥도 해 주고 청소며 빨래도 해 주니까, 재훈이처럼 집 얻어 혼자 나가 살아도 그 정도는 쓸 테니까 받는다. 대신 재현이가 있을 때와 없을 때는 반찬이 다르다. 또 우리 죽고 나면 이 건물은 재현이 거다. 그러면 재현이에게도 빚은 안 지는 것 아닌가.
이런 나와 달리 남편은 애들이 주는 돈이며 선물을 그냥 넙죽넙죽 받는다. 남편의 말은 단순하다. 달라고는 안 하지만 주면 받는다나. 암말 없이 받으니까 애들이 자꾸 주는 거고 그런 게 다 애들한테는 부담이라고 아무리 일러 줘도 이해를 못 한다. 죽을 때 물려줄 것 없는 부모는 자식들한테 받을 생각도 하지 말아야 된다고 하면 여태 키워줬는데 주는 것도 못 받냐고, 애들도 줄 만하니까 주는 거 아니겠냐고 한다. 남들도 자기처럼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줄 안다. 나처럼 힘들어도 힘들다 못하고 부담스러워도 부담스럽다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모른다.
재영이가 십팔 년 만에 집에 온 후부터 다달이 보내던 돈도 놈팽이와 헤어지고 나서는 절대 보내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빈말로 오해할 여지가 있는 좋은 말로 얘기한 것이 아니다. 이백만 원도 없어서 나한테 손 벌렸을 때를 잊지 말라고, 입에 담기 불길했지만 암이 재발하면 어쩔 거냐고 했다. 돈이 생기면 무조건 쓰지 말고 모으라 했다.
그동안도 재영이가 주는 돈은 받을 때마다 놈팽이가 연상돼 꺼림칙했다. 놈팽이가 자신에 대한 승인으로 이해할 것 같아 약이 올랐다. 그런데 놈팽이와 헤어진 재영이가 주는 돈은 더 꺼림칙해졌다. 나보다 먼저 죽을까 봐 자나 깨나 걱정인 딸에게 뭐라도 주고 싶지 받고 싶지는 않았다. 할머니들이 노래 교실 끝나고 나면 밀린 카톡에 한꺼번에 답장을 쓰듯 재영이도 밀렸던 효도를 하고 싶겠지만 내 마음이 불편한 것은 아주 질색이다.
민서가 공부를 마치려면 아직 멀었고 놈팽이가 헤어진 후에도 민서에게 드는 돈을 대주는 것 같지만 그걸 믿어서는 안 된다. 재현이 말로는 놈팽이 혼자서는 사업이 오래 못 버틸 거라고, 그동안도 재영이 덕에 펑펑 벌고 펑펑 쓴 거라고 했다. 또 여자 없이는 못 사는 놈 같던데 딴 여자라도 생기면 재영이와 민서는 락스에 씻기는 변기의 얼룩처럼 깨끗이 지워질 거다. 민서? 여자 생긴 사내놈들이 제 자식 돌아보는 걸 나는 본 적이 없다.
내가 놈팽이 욕을 할 때마다 재영이는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한데 나는 그게 또 못마땅하고 불안하다. 재영이가 펄쩍펄쩍 뛰며 나보다 더하게 놈팽이 욕을 해야 안심이 될 텐데 재영이는 도무지 그러지 않는다.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재영이는 놈팽이를 믿는 눈치다. 적어도 자식 공부를 나 몰라라 할 사람은 절대 아니라나. 민서가 의사 되는 게 놈팽이의 평생 꿈이자 유일한 꿈이란다. 재훈이에게 돈을 쏘아 보낼 때 재영이에게도 그러려고 했다가 놈팽이를 감싸는 그 말이 생각나서 마음을 돌려세웠다.
지금은 재영이가 빈털터리니까 놈팽이가 민서를 챙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영이한테 돈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있는 돈도 가져갈 인간이다. 돈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재영이는 아직도 모른다. 돈이 있어야 남편한테도 꿀리지 않고 큰소리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제 손에 돈이 없어 여태 그러고 살았다는 걸 모른다. 놈팽이가 왜 저에게 현금은 절대 주지 않고 필요한 것들을 모두 직접 사줬는지 이유를 모른다.
그리고 민서, 민서를 보면 착잡하다. 내가 그렇게 뜯어말려도 재영이가 놈팽이와 헤어지지 못한 것이 다 민서 때문일 것이다. 재영이가 암에 걸릴 때까지 놈팽이에게 꼼짝 못 하고 잡혀서 산 것도 다 민서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뭣 때문에 노름만 하는 놈팽이 곁에서 노름돈까지 벌어 줬겠는가.
젊었을 때 여고 동창들을 만나면 다들 저희 아들딸이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고 자랑했었다. 나만 자식 없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은 재영이가 제일 잘 갔다. 한 턱 내면서 아주 고소했다. 요새 여고 동창들은 손주들이 그렇게 공부를 잘한다고 또 자랑질이다. 내가 원체 공부에 관심이 없어 잘은 모르지만 민서는 영재고라는 희한한 이름의 학교에 다닌다. 학비도 공짜고 기숙사비도 공짜인 학교다. 얼마나 공부를 잘하는 애들만 오면 나라에서 돈을 다 대주냔 말이다. 동창네 손주들은 죄다 내가 이름을 아는 요 동네 고등학교에 다니니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꼴이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재영이는 결혼을 한 적이 없고 민서도 존재하지 않는 아이기 때문에 민서가 영재고에 다니는 것도, 설사 민서가 의대를 가더라도 이번에는 자랑을 할 수가 없다. 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남편 복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는 옛말을 생각하면 재영이 걱정이 더 커진다. 옛말은 틀리는 적이 없다. 척하면 척이다. 민서가 하는 꼴을 보면 절대로 의사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본 의사 선생님들이 어릴 때 민서 같았을 리가 없다. 대한민국에서 영점 몇 프로 안에 들어야 의사가 된다는데 그런 훌륭한 사람들이 설마 민서 같았을까.
민서는 외갓집에 올 때마다 데면데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서 휴대폰만 쳐다본다. 한 마디라도 말을 걸어 보려는 노력이라고는 안 한다. 나나 외삼촌들이 뭘 물어도 네, 아니오로 끝이다. 밭 갈러 끌려 나온 게으른 소 같다. 처음에는 다 커서 갑자기 알게 된 외갓집 식구들이고 외동으로 자란 탓에 낯을 많이 가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린이날, 제 생일, 크리스마스 때 용돈을 보내 줘도 전화는커녕 문자 한 번이 없는 애다. 나하고 동시에 용돈을 보냈을 재현이, 재훈이는 애도 키워보지 못했으면서 요새 애들은 다 그렇다며 억지로 민서 편을 들다가도 민서가 좀 그렇긴 하지, 라며 말끝을 흐린다. 아주 틀려 먹었다.
아직 공식적인 암 환자인 제 엄마를 얼마나 종 부리듯 부려 먹는지 꼴 보기 싫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올 때마다 민서는 옥탑방에 콕 박혀 있고 과자며 과일이며 재영이가 다 갖다 바친다. 3층에서 옥탑방까지 노상 오르락 내리락이다. 등산을 했으면 설악산도 올라갔다 왔을 것 같다. 결명자차 끓인 물은 애가 싫어한다면서 편의점 가서 물까지 사다 바친다. 암 수술받은 지 아직 5년도 지나지 않은 제 엄마를 위하는 기색이라고는 손톱만치도 없다.
일 년에 서너 번 외갓집에 오면 온통 저 가고 싶은 데로만 재영이를 끌고 다닌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서 카페니 빵집이니 온통 그런 데만 다니고 재영이가 좋아하는 막국수 집에 가면 몇 젓가락 뜨는 둥 마는 둥 한다. 어쩌다 가면 국물까지 다 마시는 막국수를 이제는 많이 먹어서 별로 안 먹고 싶다며 매워서 한 숟갈도 못 뜨는 짬뽕 순두부 집에 가자고 하는 재영이를 보면 참 불쌍해 죽겠다. 그렇게 키워 봐야 너도 내 꼴 난다는 말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서울 가서 공부해야 한다고 옥탑방에 딱 하루 머물고 휭 가버리는데 있는 동안 방 꼴을 보면 가관도 아니다. 고등학생이 뭔 화장을 그렇게 하는지 화장품이 한가득인데 방바닥에 죄다 늘어놓는다. 아래층에 먹을 게 널렸는데도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는지 먹다 남은 음식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 드라이기 쓰고 나서 코드를 뽑을 줄 모르고 마신 것보다 남은 게 많은 음료수 캔은 먹은 자리에 고대로 놓아둔다. 재영이가 민서 흉 잡힐까 봐 치우느라 치우는데도 그 정도다. 여름이면 에어컨, 겨울이면 보일러를 얼마나 펑펑 틀어대는지 하룻밤에 한 달치 전기, 가스를 쓰고 간다.
사람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감추지 못한다고 했던가. 민서에게 다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했건만 얼마 전에 재영이가 처음으로 혼자 다니러 왔다. 주중에 쉬는 날이 생겼다면서 아침에 일찍 왔다가 밤늦게 갔다. 그날은 재영이가 하루 종일 내 차지였다. 손을 잡고 단오 터를 지나 시장까지 걸어갔다. 노래 교실 이야기며 임영웅 이야기며 남편 이야기며 재현이 눈 수술한 이야기까지,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젊은 사람들이 가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아주 이쁜 빵도 먹었다. 점심도, 저녁도 재영이가 좋아하는 걸로만 해 먹였는데 옹심이를 한 그릇 다 비우며 감자바우보다 맛있다고 했다. 남편도 어디가 아프고 어디가 아파서 일주일에 몇 번은 병원에 다니고 매일 어떤 약을 먹는다고 재영이를 곁에 두고 모처럼 긴 말을 했다. 재영이가 하나뿐인 딸이라는 게 새삼스러웠다. 여태까지 재영이가 집에 왔다 가도 본 것 같지 않았던 것은 민서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저녁까지 먹고 나서도 기차 시간까지 여유가 많았다. 저도 제 시간을 좀 가져야 할 것 같았다.
“친구라도 좀 만나고 가지?”
“만날 친구가 어딨나.”
“모처럼 와서 집에만 있다 가지 말고. 사람은 친구가 있어야 해. 너도 더 나이 들기 전에 친구들하고 연락도 트고 그래야지.”
“친구는 뭐. 하도 오래 연락을 끊어서 이제는 연락할 방법도 없는데.”
“그 왜 강문 머스마 있잖아. 걔랑 연락됐다며? 걔한테 애들 연락처 물어봐.”
“걔도 젊을 때 백혈병 치료하고 그러면서 친구들하고 연락 끊었대. 이혼하고 그랬으니까 복잡했겠지. 온다는 말도 안 했어. 걔는 되게 바쁠걸.”
어릴 때 재영이가 그 머스마를 잠깐 만났던 것 같다. 재훈이가 누나가 그 형이랑 다니는 걸 봤다고 몇 번 말했었다. 재영이는 한창 좋은 대학을 다니며 이쁠 때였는데 머스마는 바닷가에서 아버지가 하던 일 물려받아 일한다고 했었다. 만나 봤자 일 년에 서너 번 만났으니 말 그대로 잠깐씩 만나기만 했을지도 모른다.
재영이가 다시 집에 올 수 있게 되면서 그 머스마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게 되었다. 여름이면 바닷가 땡볕에서 일하고 겨울이면 바닷바람 맞고 일해 그렇지 돈은 발 번단다. 이십 대 초반에 동창회에 외제차를 끌고 나타나서 동창들이 쑤군댔단다. 동창 중에 가장 공부를 잘했고 가장 좋은 대학을 간 재영이가 그게 외제차인지 몰라 봐서 재영이에게 관심을 가졌었단다. 최근에 다시 연락이 닿아 알게 된 바에 의하면 백혈병 걸려서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고 이혼했는데 딸은 전처가 키우고 있다고 했다. 자기가 공부를 워낙 못했던 탓에 이혼했더라도 딸 공부 뒷바라지는 잘하고 싶어 하는데 딸이 영 공부에 젬병이어서 속을 썩인다고 했다. 오죽 공부를 못하면 시내 고등학교도 못 가고 어디 외곽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서로 비슷한 처지니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그렇게 지내면 적적함이 덜할 것 같다. 지금은 민서가 딱 붙어 있어서 외로운 줄 모르겠지만 좀 있으면 민서도 대학에 갈 거다. 재영이가 그랬듯 민서도 대학생이 되면 엄마 곁을 아주 떠날 텐데 재영이는 그걸 모른다.
재영이도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에는 이 주에 한 번씩 집에 왔었다. 그때는 KTX도 없어서 버스를 왕복 열 시간씩 타야 했다. 좀 지나자 한 달에 한 번씩 왔고 좀 지나자 명절에나 한 번씩 왔다. 집에 오는 횟수가 줄어드는 만큼 집으로 오는 마음도 줄었다.
원래도 나긋나긋한 딸은 아니었던 재영이는 대학을 다닐 때 서울 생활에 대해 일절 말이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도 언젠가 지하철 안에서 나쁜 놈이 가방을 칼로 긋고 하필 그날 받은 돈 봉투를 훔쳐 갔다고 울면서 전화를 하는 바람에 알았다. 무서워서 무작정 지하철에서 내려서 바깥으로 올라왔는데 자취방으로 돌아갈 돈이 없다며 울었다.
재영이가 민서는 서울 애들처럼 키우고 싶어서 먹지도 자지도 않고 돈을 벌었다고 말하는 걸 듣고서야 그 옛날 재영이의 서울 생활이 힘들었다는 걸 알았다. 서울 애들처럼이라....나는 서울서 살아 보지 않아서 서울 애들 같은 게 어떤 건지 모른다. 하지만 갑자기 결연해지는 재영이의 표정과 말투에서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용돈을 풍족히 받으며 사는 것이 서울 애들처럼 사는 것이구나 짐작했다.
나도 최선을 다해 살았다. 말단 공무원이었던 남편 월급으로 빚 없이 삼 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보냈다. 두 아들은 공부를 못해 큰돈이 들지 않았지만 재영이를 대학 보낼 때는 발 밑이 흔들흔들했다. 맨 땅에서도 멀미가 났다. 재현이가 해양전문대를 나와 배를 탔길래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재영이 졸업을 어떻게 시켰을까 싶다. 남편보다 몇 배나 꼬장꼬장한 시어머니를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기도 했다. 시어머니가 자리에 누운 지 일주일 만에 살집이 빠지는 것도 없이 돌아가시자 모두 내가 효부라서 그렇다고 했다. 젊어서 과부가 되어 나 하나만 바라보고 산, 내 유일한 아킬레스건인 친정엄마도 돌봐야 했다. 삶이 고단해서 술고래가 된 친정어머니를 툭하면 힐난하는 남편을 꾹 참아내야 했다.
재영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는 바다가 보인다는 것 때문에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서는 동네 막국숫집에서 일도 했다. 그때도 저녁 시간 한 시간은 집에 와서 식구들 밥을 해 먹이고 설거지를 했다. 다시 막국숫집으로 달려갈 때마다 남편보다 내가 더 친정엄마를 욕했다. 젊어서 좀 있던 재산을 술로 다 마셔버리고 맨날 주정을 하던 엄마. 공부를 잘해서 명문여고를 졸업한 내가 사범대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빨리 돈 벌어서 자기 좀 호강시키라던 엄마. 그때 빚을 내서라도 대학을 갔으면 국수를 삶지는 않았을 텐데 엄마의 넋두리에 주저앉았다.
경찰이었던 사위가 경찰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본다고 했을 때 과자 부스러기만 한 힘이나마 동네에 자랑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쉬워하던 엄마, 여름에도 서늘한 대관령 밑 집에 살면서 눈이 내리는 한겨울에 냉장고가 고장 난 것이 뭐 그리 급한 일이라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사위를 불러 대던 엄마, 사흘 도리로 응급실에 가야 한다며 전화해 딸년이라고 하나 있는 게 제 엄마 신경도 안 쓴다고 울던 엄마가 나도 지긋지긋했지만 남편이 장모를 지긋지긋해하면 갑자기 효녀가 되어 남편에게서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나는 애들 인생에 큰 도움은 못 주더라도 절대로 절대로 손톱만큼의 부담도 주지 않는 부모가 되고 싶다. 친정엄마 덕분에 그런 생각이 좀처럼 뽑히지 않는 사마귀처럼 뿌리 박혔다. 애들이 돈을 주거나 뭘 사 오면 진심으로 화가 나는 것도 그래서이다. 부모에게 뭐 해 주려 하지 말고, 나도 지들에게 손 안 벌릴 테니 지들도 부모에게 손 벌리지 말고 제각각 잘 살기나 했으면 좋겠다.
아들 둘은 결혼을 안 했고 재영이는 놈팽이와 살다 민서를 달고 헤어졌다. 내가 그랬고 다들 그렇듯 알아서 결혼도 하고 애도 낳으며 살 줄 알았다. 그런 평범한 삶도 부모가 가르치고 신경 써야 가능한 일인지 지금도 나는 모르겠다.
특히 재영이를 생각하면 마음에 걸리는 게 몇 가지 있다. 대학교 입학식 하루 전인가, 보따리 몇 개를 싸서 택시를 태워 혼자 보낸 것이 그중 하나다. 그때는 동네에서 개인택시를 하는 이에게 부탁해 택시를 태워 보내는 것도 엄청 돈이 드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름 호강시킨다고 생각했었다. 학원 한 번 안 보내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학에 합격했는데 어떻게 애를 혼자 서울로 이사 보내냐고 타박들 했지만 멀미를 심하게 하는 나로서는 서울행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멀미를 해도 딱 한 번인데 딸을 위해 그것도 못하냐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재영이를 혼자 보냈다.
그리고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서울에 가 보지 않은 것도 마음에 걸린다. 일 년을 기숙사에 있던 재영이가 방을 얻어야 한다고 했을 때 전 재산을 끌어모아 전셋돈만 부쳐 줬지 가 보진 않았다. 재영이가 서울 바닥을 혼자 헤집고 다니면서 방을 볼 때 전셋돈을 사기당할까 봐 노심초사하면서도 서울까지 가 볼 엄두는 못 냈다.
졸업식에는 그래도 가 봐야겠어서 졸업식 하루 전 재훈이를 앞세우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는 오백만 원을 더 보탠 전세방에 재영이가 살 때였는데 시골집보다도 볼품없는 집이었다. 우리 집 전 재산의 값어치는 서울에서 너무 헐했다.
자투리 땅에 욱여넣었는지 집 모양이 비뚜름했다. 어설픈 대문을 열고 들어가 현관문을 여니 가운데 긴 복도가 있고 양 옆에 방들이 쭉 있었다. 방 하나는 공동으로 쓰는 주방, 또 방 하나는 공동으로 쓰는 화장실이고 나머지 방들에는 여학생들이 한 명, 혹은 두 명씩 들어 있었다. 여인숙처럼 생긴 집이었다. 그것이 내가 재영이 집에 가 본 처음이었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암 수술 하루 전에 가 본 화이트 하우스였고.
잘 사는지 좀 자주 들여다보고 그랬어야 했나. 그랬으면 재영이가 놈팽이에게 낚이지 않았을까. 민서를 갖기 전에 빼낼 수 있었을까. 서울 전세방을 본 후로는 재영이가 사는 모습을 차라리 안 보고 싶었다. 졸업식 때 본 재영이 방은 내가 얼마나 못난 부모인지를 너무 여실히 드러내어 나에게도 상처가 됐다. 내가 어떻게 해도 재영이에게 살 만한 방을 얻어 줄 수가 없다는 것이 슬펐다. 그래서 안 보고 안 듣고 그냥 잘 살겠거니 믿고 싶었다. 쓸데없이 공부를 잘해서 생고생을 한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거나 집에서 대학을 다닌 딸들은 부모 품 안에서 순탄하게 직장 생활하다가 결혼하고 애도 낳고 집도 사고 잘들 사는 데 비해 재영이처럼 서울로 간 딸들은 서울스럽게 살았다.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다. 안목서 크게 횟집 하면서 돈을 쓸어 담는 정현이 엄마도 나만 보면 정현이가 시집갈 생각을 안 한다고 하소연하고 초당서 순두부집으로 돈을 너무 많이 버는 게 힘들어서 그만두고 놀고 있는 윤미 엄마도 맨날 같은 소리다.
그럴 때마다 나도 재영이가 결혼을 안 해 걱정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나중에 들통이 날 땐 나더라도 지금은 재영이가 결혼식도 안 올리고 살면서 다 큰 애가 있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할 수가 없다. 나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이 재영이 꼴을 모를 수도 있으니까 굳이 치부를 미리 까발릴 필요는 없다.
재현이와 재훈이는 내가 재영이를 창피해하는 걸 못마땅해한다. 지난 추석에 재영이가 민서를 데리고 집에 왔을 때도 그 문제로 다퉜다. 재영이가 명절에 온 건 거의 이십 년 만이었다. 제사를 지내본 적 없는 민서는 명절 음식 만드는 것도 처음 본다면서 신기해했다. 송편 빚는 걸 해 보겠다고 반죽을 주물럭거리며 속에 넣을 밤이 달달하니 맛있다며 연실 입에 넣었다. 그건 어릴 적 재영이하고 똑같았다. 전을 부쳐보겠다고 부침가루를 온통 펄럭거리더니 뒤집을 때마다 기름을 튀기고 어떤 건 덜 익히고 어떤 건 다 태워 먹고 난리도 아니었다. 외삼촌 둘은 민서가 어지럽힌 걸 치우며 기름 조심하라고 잔소리하느라 바빴다. 오랜만에 명절 같았다. 따끈따끈한 명절 음식을 모처럼 온 가족에게 먹일 수 있어 신이 났다.
그렇게 법석을 떨고 있는데 정육점 친구가 고기를 좀 갖고 왔다고, 요 앞이라고 전화가 왔다. 깜짝 놀라서 재영이더러 얼른 민서 데리고 옥탑방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재영이하고 민서는 손도 못 씻고 부랴부랴 옥탑방으로 쫓겨 갔다. 송편이며 전을 들려 정육점 친구를 보내고 나니 뜻밖에도 재훈이가 화를 냈다.
“엄마, 누나한테 왜 그래?”
“뭘? 내가 뭘?”
“누나가 창피해? 정육점 아줌마가 누나랑 민서 보는 게 창피해?”
재훈이가 화를 내는 이유가 비로소 파악이 됐다. 그게 화를 낼 일인가? 어이가 없었다.
“그래, 창피하다, 창피해. 그럼 결혼식도 안 하고 애 낳은 게 안 창피하나?”
“그게 뭐가 창피해. 요새 이혼하는 거 일도 아니야. 누나가 몇십 년 만에 명절에 집에 왔는데 꼭 그래야 해? 민서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미안해? 내가 왜 미안해? 내가 그 놈팽이랑 살라고 했나? 그냥 이혼한 것도 창피할 판에 결혼도 안 하고 갈라섰는데 당연히 창피하지!”
재현이가 말리고 나섰지만 이왕 말 나온 김에 할 말을 하기로 했다.
“말 나온 김에 엄마가 말하는데 니들 재영이 보고 고향 와서 살라는 둥 그딴 소리 하지 마. 엄마는 그 꼴 못 본다. 재영이가 여기 와 살아 봐라. 다들 얼마나 쑥덕거리고 찧고 해 쌓겠나. 나 죽기 전에는 안 된다, 안 돼!”
“엄마, 남들은 엄마 신경 안 써. 뭐라 해봤자 잠깐이야, 잠깐. 금방 잊어버린다고. 누나가 고향 와서 살고 싶으면 사는 거지 엄마가 그걸 왜 뭐라 해?”
“그래, 니들이 그러겠다면 그러는 거지. 어쩔 수 없지. 근데 나는 싫다고. 내가 내 입으로 싫다는 말도 못 하나?”
“우리가 그랬기 때문에 누나가 암에 걸릴 때까지 붙잡혀서 그렇게 산 거야. 모르겠어?”
반찬은 매주라도 해서 서울로 보내 줄 수 있다. 민서가 대학 졸업할 때까지 여차하면 재현이와 재훈이가 등록금을 대 주겠다고 하는 것도 괜찮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재영이가 암이 재발하면 병원비도 대 줄 수 있다. 하지만 재영이가 고향에 와서 사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싫다. 서울서는 앞집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지만 시골은 좁고 소문이 많다. 정이 많다는 것은 쓸데없는 관심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 정말이지 싫다.
우리가 그때 재영이를 그렇게 내치는 바람에 재영이가 놈팽이에게 꼼짝없이 잡혀 살았다는 재훈이 말에 뜨끔했다. 형제자매 하나 없이 골칫덩어리인 친정 엄마뿐인 내가 친정이 없는 서러움을 왜 모르겠는가. 놈팽이가 바라던 걸 우리가 먼저 해 준 꼴이라는 것을 나도 안다. 지금도 재영이에게 친구라고는 대학 동창이라나, 교수가 된 친구 딱 한 명뿐이다. 놈팽이 만나고 연락이 끊겼다가 놈팽이랑 헤어지고 연락이 닿았다고 한다. 놈팽이가 친구들을 일절 못 만나게 했다고 한다. 아마 우리가 재영이하고 연을 끊는다고 했을 때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거다. 애써 끊으라고 종용해야 할 판에 우리가 먼저 끊어줬으니 말이다. 선녀가 나무꾼에게 납치당하고도 애 낳고 살았던 이유는 가족들이 모두 하늘나라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레박도 없고 비행기도 없고 주변에 도움을 청할 사람도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재영이가 내 곁에서 사는 건 싫다. 두 아들들이 재영이 보고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부추기는 것을 안다. 민서만 대학 가면 굳이 서울서 살 필요가 있느냐, 시골서 사는 것이 건강에도 좋을 거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형제들 곁에 있는 게 낫지 않겠냐 하면서 말이다.
말은 쉽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재현이나 재훈이의 역할이 크겠지.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 때는 모든 게 내 몫일 게다. 멀리 사는 딸과 옆에 사는 딸에게 기대되는 엄마의 역할은 천지차이다. 건강하고 젊을 때는 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다가 병들고 나이 들어 엄마 곁으로 오겠다는 심보도 얄밉다. 싸게 사려고 멀리 시장까지 낑낑대고 갔다 왔는데 바로 옆의 마트에서 더 싸게 팔 때처럼 약이 오른다. 자식만 부모가 야속한 것이 아니다. 부모도 자식이 야속할 수 있다.
재영이가 놈팽이랑 헤어질 때는 속이 다 후련했다. 놈팽이가 육십이 넘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게 얼마나 쌤통인지 재영이도 혼자가 되었다는 걸 잊을 정도였다. 그랬던 것이 요새는 이왕 산 거 더 참고 살라고 할 걸 후회가 된다.
칠십이 넘을 때까지 셋이나 되는 자식새끼들 건사하느라 그 흔한 해외여행은커녕 비행기도 한 번 못 타 봤다. 백수를 누린 꼬장꼬장한 시어머니 비위 맞추느라 간이며 쓸개며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외동딸, 외동사위 노릇을 졸라대는 술주정뱅이 친정엄마 때문에 남편에게 기 한번 못 펴고 세월이 다 갔다. 지금도 남편과 큰아들에게 밥 차려 대령하느라 좁은 부엌 바닥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결혼 안 한 두 아들과 결혼도 안 하고 애를 낳은 딸이 하나 있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나도 좀 몸 편히, 마음 편히 살아 보면 안 되나. 아직도 그러면 안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