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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Oct 18. 2024

남편의 재영이

   주말에 단오 구경하러 재영이가 오나 싶었는데 안 오나 보다. 애써 잊었던 빚쟁이가 갑자기 빚을 조금 갚으면 나머지는 언제 주나 기대가 생기는 것처럼 오래 못 본 재영이를 한 번 보고 나니 언제 또 보나 조바심이 생겼다. 아내에게 재영이가 오는지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걸어서 십 분 거리의 아파트로 독립한 재훈이가 토요일 저녁은 집에 와서 먹었으면 하고 바라도 타박하는 아내다. 서울 사는 재영이가 오기를 바라면 타박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암 수술을 마친 재영이가 십팔 년 만에 집에 온 것은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사 년 전 이른 봄이었다. 겨울보다 봄눈이 많은 곳이라 길거리 곳곳에 거무튀튀하게 때가 묻은 눈들이 채 녹지 않고 쌓여 있던 때였다. 여기 사람들은 아직 겨울 잠바를 입을 때였는데 내 앞에 선 재영이는 얇아 보이는 코트를 입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추워서 몸을 떠는 것인지 집에 와서 마음을 떠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내가 재영이라고 하니까 재영인 줄 알았지 길에서 마주치면 못 알아볼 뻔했다. 어느덧 마흔 중반을 넘어 비로소 내 앞에 선 재영이가 내가 아는 그 재영이와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건 안경뿐이었다. 길 잃은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부모가 남긴 표식 하나를 소중히 간직하듯 재영이는 자신을 증명할 때를 대비하여 십팔 년 전의 네모난 뿔테 안경을 여전히 쓰고 있었다. 안경이 아니었으면 내 딸이라는 것을 믿기 위해 유전자 검사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털모자 아래 겁먹어 보이는 하얗고 작은 얼굴은 선생님에게 혼나기 직전의 초등학생 같아 보였다. 모진 세월을 보냈다면서 재영이는 어째서 저토록 여리고 약한 모습인 걸까. 드잡이에 능한 억센 아줌마 같은 모습이었다면 마음이 덜 아팠을 것을.      

  

    재영이는 작고 통통하고 보송보송했었다. 서울로 대학을 간 후 가끔 집에 올 때마다 아내가 해 주는 낡은 집밥을 고봉으로 먹으며 집에만 왔다 가면 살이 찐다고 한숨을 쉬었다. 아내가 아니라는 대답을 기대하며 서울에는 엄마가 해 주는 것보다 맛있는 게 많지 않냐고 물으면 서울 사람들은 감자를 채 썰어 부쳐서는 감자전이라며 파는데 어이만큼 맛도 없다고 했다. 서울 사람들은 막국수 대신 냉면을 먹는데 얼마나 질기고 미끄덩거리는지 가위로 싹둑싹둑 썰지 않으면 면발이 그릇에서 입을 통과하여 위장까지 한 줄로 이어진다고 했다. 또 서울 사람들은 감자를 갈아 새알 모양으로 빚어 끓인 옹심이가 뭔지도 모르면서 옹심이라는 이름을 우스워한다고 했다. 뭐가 그리 바쁜지 감자전, 막국수, 옹심이 이 세 가지를 한 번씩만 먹으면 벌써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대학 기숙사에서 나와 전세방을 얻은 재영이가 처음 집에 왔을 때 음식 좀 싸 가라는 아내의 말에 재영이는 별생각 없이 그러겠다고 했다. 아내의 ‘좀’이 아이스박스 하나와 종이가방 하나일 거라고는 나도 짐작 못했다. 원 플러스 원이라면 환장하는 아내답게 짐도 원 플러스 원이었다.

   “뭐 별로 넣은 것도 없어. 만두 찐 거 조금, 고구마튀김 조금, 깍두기 조금, 배추김치 조금, 불고기 양념한 거 조금 넣었어. 박스만 커. 박스만 크지 먹을 건 별로 없어. 종이가방에는 감자전이랑 간장 넣었어. 감자 간 것도 좀 넣었으니까 다시다 넣고 옹심이 끓여 먹어. 집에 와도 금방 가니까 뭘 먹을 새가 있어야지.”

   돈은 아무리 모아도 티끌일 뿐이더만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나중에 재영이에게 들었는데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는 몹시 막혔고 맨 앞자리라 넓은 공간을 믿고 들고 탄 아이스박스에서는 쿰쿰한 김치 냄새가 스멀스멀 새어 나왔단다. 다른 승객들은 히터 때문에 땀을 흘렸고 재영이는 김치 냄새 때문에 식은땀을 흘렸단다.

   서울 터미널에서 내려서 자취방까지 한 시간 반을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가는데 환승 통로를 걸을 때 아이스박스를 묶은 노끈이 어찌나 손바닥을 아프게 파고드는지 새로운 손금 한 줄이 생기는 줄 알았다고 했다. 마침내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갈 때 등에는 가방을 메고 한 손에는 아이스박스, 한 손에는 종이가방을 들고 얼마나 낑낑대며 몇 칸마다 멈춰 섰는지 지나가던 아저씨가 지하철역 밖까지 들어줬단다. 거기서부터 육교를 하나 건너서 또 십 분을 걸어 아이스박스와 종이가방을 연실 바꿔 들며 자취방에 겨우겨우 도착했단다. 대장정이 따로 없었겠구나 싶었다. 그다음부터 재영이는 절대로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으려 했지만 아내를 이기지는 못했다. 택배로 보내면 택배비가 들지만 고속버스에 실으면 공짜이기 때문이었다.


   뿔테 안경을 빼고는 재영이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코트를 벗자 블라우스를 주름치마 안에 집어넣은 허리가 보였는데 부러질 것만 같았다. 눈이 쌓이면 부러지는 겨울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서 위태로워 보였고 탈수기에 돌린 빨래를 탁탁 털어 넌 것처럼 물기라고는 없이 바싹 말라 있었다. 나는 거칠게 튼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까만 스타킹에 싸여 있는 재영이의 발목을 보았는데 너무 가늘어서 손목 같았다. 저런 발목으로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나 생각했는데 그 위의 다리, 몸통을 보니 그 정도 두께의 발목도 과분했다. 암 수술을 받아서 저렇게 된 건지 저렇게 되어서 암 수술을 받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재영이는 긴 생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었는데 다시 집에 온 재영이는 뜨개질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 밑이 휑했다. 삐져나온 것아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카락이 다 빠진 암 환자를 바로 눈앞에서 본 것은 팔십이 넘도록 처음이었다. 큰 누님과 막내 여동생이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을 뿐 큰 병을 앓은 피붙이는 여태 없었다. 얼굴도 기억하기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요즘 병으로 당뇨병이었다니 재영이는 우리 집안 최초의 암 환자였다. 암 유전자는 우리 집 소속이 아닌데 어쩌다 회로가 엉켜서 재영이에게 도달한 것일까.      


   나는 중학교부터는 대처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신념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남의 집에 얹혀서 육 년을 살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없다고 내가 꿀리는 것을 가장 못 참아했다. 아버지가 있는 친구들도 동네의 중학교에 입학하는데,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 도시의 중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것과 어떻게 인과관계로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언제나 옳은 어머니에게 내 이해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는 내 이해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기 위해 어머니를 이해하는 일이 필요했는데 다행히 도덕 시간에 자격지심이라는 말을 배우고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 말의 뜻을 알자마자 누군가 내게 그 단어의 예를 들어보라고 한다면 내 어머니보다 적당한 예는 결코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도덕 선생님이 주변에서 본 안타깝고 한심한 자격지심의 예를 발표해 보라고 시켰다면 주저 없이 어머니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꿀리지 않게 키우려고 아주 큰 도시도 아니고 조금 더 큰 도시로 보냈으나 그 도시에서 나는 내 평생 가장 꿀리는 시간을 보냈다. 식모는 여자만 하는 일인 줄 알았는데 남자 식모도 가능했다. 까까머리 어린 남자 식모는 친척이라는 주인집에서 갓난아기를 업어서 재우고 요강도 부시고 가래통도 비웠다. 마당의 개똥을 모아 밭에 뿌렸고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주인아주머니를 따라 장에 다녔다. 늘 배가 고팠고 늘 집에 가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한석봉 어머니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만큼 단호하고 엄격한 어머니를 떠올렸다. 떡을 썰면서 글씨를 써 보는 테스트 기회라도 준 한석봉 엄마는 내 어머니에 비하면 지나치게 너그러웠다.

   주인집에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여자애가 있었다. 처음 주인집에 간 날 여자애가 나를 오빠라 부르자 주인아주머니가 가이드라인을 정해 주었다. 내 딸이 너의 이름을 부를 상황을 만들지 말라.  

   “오빠는 무슨 오빠. 겨우 두 살 차인데. 그냥 광호야, 이렇게 이름을 부르면 되지. 아니 뭐 둘이 얘기할 일도 없겠지만.”

   늘 배가 고팠지만 여자애가 나를 볼 때마다 과자며 쪼꼬렛, 귤이며 설탕 뿌린 누룽지를 주는 건 싫었다. 처음에는 당황해서 받았고 그다음부터는 안 받으면 실랑이를 하다 주인아주머니에게 들킬까 봐 받았지만 하나도 먹지 않고 버렸다. 주인아주머니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는 똥개 누렁이가 뭘 얻어먹었기에 가끔 분수에 맞지 않게 밥을 남기는 건지 욕을 하셨다. 똥개면 똥개답게 밥그릇을 싹싹 비우고 늘 더 먹고 싶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배가 고플망정 먹을 것에 꼬리를 흔드는 똥개가 되기는 싫었다.

   주인아주머니는 건망증이 심했다. 내 어머니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주인아주머니는  뭘 어디에 뒀는지 자주 잊어버렸다.

   “아니, 그게 어디로 간 거지?”

   “아니, 내가 아까 두부 사고 남은 돈을 어디다 뒀더라?”

   엉뚱한 데서 그 물건이 발견되거나 돈의 쓰임새가 밝혀질 때까지 나는 잠이 오지 않았고 밥도 먹지 못했다. 좀 전까지 내 앞에 드러누워 아양을 부리던 고양이도 갑자기 발톱을 꺼내 나를 할퀼 것처럼 무섭게 느껴졌다. 고양이의 파랗고 영악스러운 눈깔이 주인어른을 대신해서 나를 감시하고 추궁하는 것 같았다.  

   “아이고, 여기 있었구나.”

   “아이고 나도 참, 아까 두부 장수한테 줘 놓고 여태 찾았네.”

   그러면 다시 잠을 잘 수 있었고 배도 고파졌다. 고양이가 다시 내 앞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 야옹야옹 뒹굴었고 파란 눈에서도 야비한 애교가 넘쳤다.  

   어린 남자 식모는 장성한 하인이 될 무렵 주인집에서 나왔다. 그 시절은 내 평생에 예방주사가 되었다. 만병통치약이었다. 그때를 생각해도 가시지 않는 슬픔이나 고달픔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털모자를 쓴 앙상한 재영이를 십팔 년 만에 보았을 때는 약발이 듣지 않았다. 신기록은 경신되기 위해 존재한다더니 가장 마음 아픈 기억이 다 늙어서 경신되었다. 재영이 옆에는 재영이를 닮지 않은 처음 보는 학생이 멀뚱멀뚱 서서 어른들이 우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울어야 할 타이밍에 눈물이 나지 않아 곤란한, 연기를 못하는 탤런트 같은 표정이었다. 박민서. 학생의 이름은 박민서랬다. 그 학생이 나의 유일한 외손주였다. 나는 재벌이 아니어서 물려줄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다 늙어서 처음 보는 피붙이가 짠하고 나타났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제야 만나 보아 미안하다고 손을 잡고 우니 학생이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저는 괜찮아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중학생이었던 민서가 이제는 고등학생이다. 재영이는 민서 공부에 목숨을 거는 눈치다. 민서는 애초부터 서울에서 살았으니까 서울 바람이 들지는 않았겠지. 여기 촌에서 살다가 서울로 간 이들은 어김없이 바람이 들던데. 풍선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나뭇가지든 뭐든 뾰족한 데 찔려서 뻥하고 터져버리던데. 얌전히 바람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갈가리  찢어진 고무 조각이 되어서 바람이 들긴 전 작고 납작한 원래 풍선 모양으로 돌아가지 못하던데.     

   서울 가서 바람이 든 이들 풍문은 지겹도록 들었으나 직접 목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막내 여동생 경순이는 결혼해서 서울로 가자마자 바람이 들었다. 교회 바람이 들었다. 교회 바람도 서울 건 지독했다. 오대 독자인 나도 감히 반항하지 못했던 예수님이었지만 애순이 누나, 은순이 누나, 나, 경순이가 정말로 예수님을 무서워하거나 존경한 것은 아니었다.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이 우리 집이라는 작은 우주에서 예수님보다 더한 권능을 가진 어머니의 비위를 맞추는 당연하면서도 손쉬운 방법이었을 뿐이다. 또 이름마저도 똥개인 마당의 똥개가 한여름이면 혓바닥을 길게 빼고 갈증에 헐떡거리듯 단 것을 갈구하던 우리의 입 안에 사탕이나 캬라멜 같은 것을 넣을 수 있는 기회였을 뿐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탕이나 카라멜을 주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었고 그래서 정말이지 감사한 존재였지 무섭거나 존경스러운 분은 아니었다. 특히 별로 길지도 않은 주기도문에 문법적으로 틀린 문장이 꽤 있음을 알게 된 후부터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감마저 퍽 줄어들었다.

   경순이는 좀 무능해 보이는 남자와 결혼했다. 돈을 잘 벌지 못하기도 하지만 돈을 열심히 벌지도 않는 것 같았다. 결론은 똑같을지 모르나 그 둘은 굉장히 다르다고 나는 어릴 적부터 생각했다. 어쩌면 열심히 벌어도 잘 벌지 못할 내 운명을 미리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하는 속담과 귀양 간 정약용 선생도 아들들에게 서울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편지를 책 한 권 분량으로 주구장창 썼다는 것을 근거로 대는 남편과 함께 경순이는 서울로 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다. 돈이 분명히 있는 오빠가 돈을 빌려 주지 않으면 남편이 헤어지자고 할 거랬다. 경순이 남편은 무능한 남자들이 흔히 그러듯 여자의 등을 쳐서 먹고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경순이가 이혼녀가 되어 집으로 오는 것은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지금이야 입학과 졸업처럼 결혼과 이혼도 한 세트처럼 여겨지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그래서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비치는 아내에게 죽을 때까지 아킬레스건이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적금을 깨서 팔백만 원을 경순이에게 보냈다.

   아이들 다음으로 귀했던 돈을 빌려 간 경순이가 며칠 되지 않아 고속버스로 뭘 보냈다며 시간 맞춰 퇴근길에 찾아가라고 연락이 왔다. 그래도 제 올케 눈치는 보는구나 싶었다. 온몸의 기운을 적금과 함께 서울로 부치고 다 죽어 가는 아내에게 위로가 될 만한 것을 보냈겠지,  기대를 했다.

   “고모가 보낸 거 안 찾아왔어요?”

   “어, 비싼 술을 보냈던데 짐칸에서 깨져 버렸더라고. 아주 비싼 양주던데”

   “술요? 무슨 술을 누가 먹는다고 서울서 여기까지 보내, 고모도 참..... 그럴 돈 있으면 얼른 모아서 빌려 간 돈이나 갚지.”

   한심한 시누이년이라는 말을 온 힘을 다해 삼키는 듯했다. 사실...... 경순이는 물을 보냈다. 오미자물도 아니고 고로쇠물도 아니고 그냥 물. 석유통으로 쓰는 커다랗고 하얀 들통에 물을 가득 담아 보냈다. 버스 기사에게 이게 맞냐고 물으니 맞다고, 어떤 여자분이 낑낑대고 들고 오더니 턱 실으며 이게 예수님 물이니 잘 싣고 가서 우리 오빠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며 나를 불쌍해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서울 사는 미친 여동생을 가진 오빠를 대하는, 딱 그런 눈빛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들통을 건네받으며 민망한 것도 잊었다.

   “응, 오빠. 찾았어? 안 샜지? 그거? 예수님 은혜받은 물이야. 그게 어디라더라, 여보, 어디랬지? 지중해? 맞아, 지중해에서 퍼 온 물인데 짜지도 않아. 마시는 물이야. 그거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비싸게 주고 산 거야. 돈 있어도 아무나 못 사. 나하고 신랑이 워낙 예수님을 열심히 섬기니까 목사님이 특별히 한 통 사게 해 주신 거야. 그러니까 올케랑 애들이랑 잘 마셔.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사십 년 전 팔백만 원은 지금 돈으로 얼마일까. 전 재산을 빌려주면서 열두 살인 재현이가 대학 갈 때까지만 갚으라고 당부했다. 팔 년 후 재현이가 대학에 입학하자 다시 이 년 후 재영이가 대학 갈 때는 꼭 갚으라고 부탁했다.  

   “재영이 대학 가면 우리 집으로 보내. 재영이 공부 잘한다며? 그럼 서울로 올 거 아냐? 내가 먹이고 입히고 다 해 줄게. 그때 이자 갚는 셈 치고 다 해 줄게. 오빠, 서울서 대학 다니는 애들 방 얻고 밥 해 먹고 하려면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지 알아? 오빠는 걱정 마. 재영이는 내가 다 해 줄게.”        

   경순이는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지난 팔 년의 이자는 물론 앞으로의 이자까지 가볍게 퉁쳐 버리는 신기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귀신이 든 경순이 집으로 재영이를 보낼 가능성은 경순이가 돈을 갚을 가능성만큼 없었다. 자칫 재영이까지 예수물이 들까 두려워서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따위 정신머리로 살았으니 그런 꼴이 되었겠지. 남편이랑 이혼했다가 재결합했던 경순이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병에 걸렸다. 나보다 새파란 것이 어이가 없었다. 지중해 물도, 평생 예수님께 올렸던 기도도 치매 예방에는 효과가 없었다.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을 만나러 가겠다고 외칠 때가 제정신인 때인지 아닌 때인지 헷갈렸다. 몸은 멀쩡했는데 정신은 찢겼다. 내 가족 중 최초로 서울 사람이 되었던 경순이는 지중해 바다와 예루살렘을 거쳐 서울 하늘을 둥둥 날다 찢어진 고무풍선이 되었다.   


   재영이가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내가 망설였던 것은 딸이라서가 아니었다. 재현이가 이미 학비가 안 드는 전문대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공부를 못 하는 재훈이는 누가 봐도 집에서 대학을 다닐 터였으니 자식 중 한 명 정도는 공부를 잘해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을 가는 것은 내 자가용과의 만남이 몇 년 멀어지더라도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좋은 대학들은 모조리 서울에 있었다. 그것이 큰 문제였다. 서울에는 경순이의 예수님이 살았다. 또 무엇이 살고 있을까. 재영이가 대서양이나 인도양 물을 퍼서 집으로 보내는 것은 아닐까. 경순이에게는 예수님이었던 그것이 재영이에게는 무엇으로 나타날지 알 수 없어 두려웠지만 재영이의 그것이 남자일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아내는 놈이 재영이보다 열몇 살이나 많고 한 번 결혼을 했던 것에 거품을 물었다. 한 동네 사는, 간질을 앓는다는 성남이네 둘째 아들이 사지를 버르적거리며 입에 무는 거품보다도 농밀한 거품, 농밀한 분노였다. 막둥이 재훈이가 군대에 간 기간 내내 면회 한 번 못 갈 만큼 아내는 거품에 잠겨 허우적댔다. 나더러 같이 서울로 가서 재영이의 머리채를 끌고 집으로 오자고 했다가 그년이 인생 조져 봐야 부모 말 안 들은 걸 후회할 거라고 쳐내버려 두자고 했다.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재영이를 다시 보았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나를 후회했지만 그 순간에는 이미 끝난 일이었다. 당시 나는 재영이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아내가 내 몫까지, 아니 그 몇 곱절이나 타이르고 화를 내고 울면서 매달렸다. 그러나 재영이는 제 선택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진 설계가 완벽히 된 건물 같았다. 그렇다면, 재영이도 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너무도 괘씸한 나머지 재영이가 불행해져서 나와 아내 앞에서 무릎 꿇고 참회하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 아무리 자식이고 아무리 부모지만 용납할 수 있는 선은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어머니 뜻이라면 절대복종하며 살았는데 내 자식은 왜 나에게 그러지 않는가.   

   게다가 확실히 끝난 일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또 있었다. 민서였다. 아이를 밴 재영이를 집으로 데려올 수는 없었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배가 부른 딸을 집에 데려와 몸을 풀게 하고 그 아이까지 키우면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생각 따위는 죽으면 죽었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뱃속의 아이는 재영이가 확실히 놈에게로 넘어갔다는 양도계약서였다. 우리가 양도인의 지위를 인정받는다 해도 양수인인 놈이 파기할 마음이 없다면 무를 수 없는 계약이었다.

   나에게는 연을 끊었다고 했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재영이와 연락을 하고 지냈다. 텔레비전 소리가 커서 안 들릴 줄 알고 아내와 재현이는 종종 식탁에 앉아 부주의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안방 문 앞에 바싹 붙어 앉아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대화는 토막 낸 생선처럼 끊어졌다. 토막들을 이리저리 꿰어 맞춰야 했다. 어디가 대가리 쪽인지, 어디가 꼬리 쪽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명의를 빌려서...... 사업을....... 사기를...... 가로챘대. 맨몸으로......”

   “...... 재판을..... 왜.....”

   “나도...... 물어...... 모른대.”   

   “요새는......”

   “다시..... 건물 한 층...... 스케일은 큰........”

   “무슨..... 이백만 원...... 빌려 오라고...... 이천만 원...... 화가 덜...... 주제에 무슨.....”

   “...... 우리 사장도...... 백만 원...... 쩔쩔...... 나한테도...... 사업하는...... 월급쟁이.......”

   “기준은...... 척 보면....... 마누라는.......”

   “..... 선생님.......”

   “애도...... 돈 보내...... 아니야?”

   “재영이는....... 다 알아서...... 재영이도...... 생활비...... 매일매일..... 명의는 재영이...... 아니면....... 못 하는......”

    십 년 이상 형사 생활을 했던 경력이 요긴했다. 토막 난 생선의 대가리와 꼬리까지 얼추 맞춰냈다. 놈은 남의 명의를 빌려서 사업을 했는데 사기를 당했다. 명의를 빌려준 사람이 가로챘다. 그래서 놈은 맨몸으로 쫓겨났다. 그런데 재판도 걸지 않고 그냥 포기했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요새는 다시 사업을 한다고 건물 한 층을 스케일 크게 빌렸다. 그런데 고작 이백만 원이 없어 재영이에게 빌려 오라고 시키는 걸 보니 사업을 할 주제는 못 된다. 다른 사장님들도 백만 원이 없어 쩔쩔맬 때가 있는 것처럼 원래 사업하는 사람들은 월급쟁이들과 생활 패턴이 다른 법이지만 놈은 척 봐도 아닌 놈이다. 놈의 전 마누라는 학교 선생님이다. 전 마누라가 키우는 애한테 돈을 보내는 일은 전적으로 놈이 알아서 한다. 재영이에게 한 달도 아니고 일주일도 아닌 매일매일 생활비를 주는 건 뭘 해도 재영이 명의로 해야 하니 재영이를 돈줄로 옭아매기 위해서다. 요새는 선녀가 두 아이를 안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려면 선녀 옷이 아니라 비행기 값이 필요하다. 놈은 재영이가 목돈을 갖게 되면 선녀처럼 날아가 버릴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다 죽은 줄 알았던 형사 생활을 할 때의 촉이 깨어나 말했다. 한번 추적해 볼 필요가 있는 놈이라고. 확실히 사건의 냄새가 난다고. 숨죽이고 대화의 흐름을 좇으면서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겠지만 대화의 내용을 잘 기억하려고 애썼다. 몇 번에 걸친 도청을 통해 전 사업장 이름과 놈의 나이까지 정확히 알게 되자 추적에 나서기로 했다.

   정보가 충분하진 않았지만 놈이 사업을 하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곳은 운 좋게도 내 부탁을 거절할 리 없는 후배가 경찰서장으로 있는 도시였다. 아이가 여럿인 후배가 말단일 때 월급날 밑에 애 하나가 아팠었다. 애 엄마가 울면서 경찰서로 전화를 했고 후배는 내가 어떻게 해 볼게라며 전화를 끊었다. 보통 월급쟁이들이 그렇듯 월급날 밑에 후배가 해 볼 수 있는 일은 없을 터였다. 몇 푼 안 되는 내 비상금을 건네주었고 후배는 그 쥐꼬리만 한 돈을 몇 년 넘게 걸려 할부로 갚았다. 찔끔찔끔 얼마나 오래 걸려 갚았는지 쥐꼬리만 한 원금이지만 이자를 매겼다면 쥐보다 클 지경이었다. 안 갚아도 된다고 했으나 후배는 빌린 돈을 안 갚고 편할 성정은 아니었다. 나는 형사 옷을 벗었지만 후배는 긴 세월을 버텨 부탁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할 수 있는 경찰서장이 되어 있었다.

   후배는 놈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추적의 결과가 난감하게 나왔기 때문이었을 게다. 내 추리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에서 틀렸다. 놈은 사기를 당한 게 아니라 사기를 치고 날라 버린 거였다. 검찰 소환을 앞두고 잠적해 버려 기소중지가 되어 있었다. 고소를 한 피해자가 굳이 놈을 잡으려고 하지 않고 쫓아낸 것으로 만족했으니 진짜 피해자는 쫓겨난 놈일 가능성도 있다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을 후배는 애써 덧붙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간통이 있었다. 사업장에서 같이 일하던 유부녀와 바람이 났었다. 간통은 공소시효도 끝났다고 했다. 형사 시절이었다면 간통보다는 사기가 더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영이 남자 문제라면 달랐다.

   사기와 간통 중에 어느 것이 금메달이고 어느 것이 은메달이든 가장 최악인 것은 놈이 그냥 토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제가 벌인 일을 책임지고 해결하려 하지 않고 일단 토껴버리는 인간들이 어떤 인간들인지는 내가 넘치게 잘 알았다. 십 년을 그런 인간들만 잡으러 다녔으니까. 놈은 분명 공소시효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공소시효가 얼마나 지난 걸까. 아니 얼마나 남은 걸까. 후배에게 물어볼 걸 그랬나.

   공소시효를 채우도록 붙잡히지 않고 산다는 것은 긴긴 세월 정상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특히 그 기간이 젊을 때라면 인생 전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자기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은행 거래도, 집 계약도, 취직도, 사업도 자기 명의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아파도 병원에 못 간다. 남자라면 대부분 기둥서방으로 살고 여자라면 대부분 꽃뱀으로 산다. 어쨌든 기생충처럼 자기를 위해 몸을 내어 줄 숙주가 필요해진다. 빈대처럼 누군가에게 착 달라붙어 피를 빨아야 한다.      

   아내와 재현이는 놈의 정체를 모르는 게 분명했다. 놈에 대해 얘기할 때면 늘 아내 목소리의 데시벨이 높아졌지만 놈의 정체를 알았다면 그걸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크게 한 번은 앓아누웠을 것이다. 재영이에게 전화를 해서 그 놈팡이가 어떤 놈팡이인지 아냐고, 멍청한 네가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한 거라고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럼 재영이는? 재영이도 놈에 대해 모르고 있다면 너무 가엾고 억울했다. 남녀가 만나 사귀고 결혼할 때 서로 건강한지, 혹은 빚이 있는지까지는 확인할지 몰라도 사기죄와 간통죄로 기소되어 있냐고 물을 리는 없다. 묻지 않은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사기가 아닐까. 중대한 것을 말하지 않았으니 사기일까. 중대하다는 것의 기준은 누가 정할까.

   만약 재영이가 놈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건 더 최악이었다. 알고도 놈과 살았을 확률보다는 살다가 알았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으니까. 살다가 알았을 때 재영이는 놈에게 어떤 단죄를 할 수 있었을까? 내가 형사 시절 지켜본 수많은 사례를 토대로 한다면 어떤 단죄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엮여 버린 삶, 이미 망쳐 버린 삶이 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오히려 놈의 몫까지 죽도록 노력하고 애쓰며 살았을 것이다. 곧 다 끝난다는 놈의 말을 믿으면서. 혹은 믿으려고 애쓰면서. 암에 걸릴 때까지.

   놈과 같은 처지의 인간들은 천성적으로 소심하고 비겁하기 때문에 엄청난 두려움에 시달린다. 동네에 경찰차가 나타나면 커튼 뒤에 숨어서 쥐새끼처럼 실눈을 뜨고 경찰차가 떠날 때까지 조용히 하라고 신경질을 부릴 것이다. 아무리 제 명의가 아니고 제 이름이 등록되어 있지 않다고 해도 규칙적으로 어딘가에 출근해서 일하지도 못할 것이다. 애초에 그런 인간들은 규칙적으로 일하고 돈을 번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없다. 숙주로 걸려든 누군가를 등쳐 먹고 조종하며 빈둥거린다.

   추적을 끝낸 뒤 한동안 나는 아팠다. 먹지도 자지도 못했고 명치가 꽉 막혀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지 못해서 시름시름 앓았다. 병원에서는 당연히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의사들의 단골 레퍼토리, 아무래도 스트레스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아내는 나의 병을 초라해진 신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늙은 남자들의 흔한 우울증 증세라 여기는 듯했다. 내가 결정해야 하는 일들을 어디선가 자꾸 만들어 왔다. 재현이와 재훈이에게 갑자기 소소함과 중대함 사이에 있는 일들, 내가 결정 내려 주기에 적합한 일들이 자꾸 생겼다. 재영이를 속인 놈과 놈의 정체를 알고도 침묵하는 나, 누가 더 나쁜 놈일까를 매 순간 따져 보았다. 재영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과, 재영이를 구할 힘이 없다는 생각과, 구해 주기도 싫을 만큼 재영이가 괘씸하다는 생각 사이에서 매 순간 오락가락했다.      

   

   암 수술을 받고 까까머리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재영이는 왜 놈과 헤어졌을까. 집에 다시 드나들게 되고 나서 얼마 안 돼 재영이는 놈과 헤어졌다. 재현이가 전해 줬다. 아버지는 그냥 알고만 계시라고 했다. 여태도 놈에 대해 그냥 알고만 있었으니 새삼스럽게 내가 대단한 일을 할 리는 없었다. 놈의 간통죄와 사기죄 때문에 헤어진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면 이제 와서 그것이 이별의 이유가 될 리 없었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면 클라이맥스가 없는 드라마처럼 밍숭밍숭 조용하게 마무리될 리 없었다. 아마도 놈이 제 인생의 암덩어리였음을 진짜 암덩어리를 만나서 알게 된 것 아닐까. 안팎의 암덩어리를 같이 잘라내기로 결심한 것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민서는 이민서가 아니라 박민서다. 혼인신고도 못해 서류상으로 남남인 놈의 성을 따랐다. 그게 법적으로 가능한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데가 없었다. 주민센터 직원의 실수가 아닐까. 이재현, 이재영, 이재훈도 최재현, 김재영, 신재훈이 될 수 있었던 걸까. 마트에서 비누를 살 때 애경이니 엘지니 브랜드를 고르듯 아이의 성도 마음에 드는 것으로 다양하게 고를 수 있는 걸까. 어쨌든 민서는 박민서다.

   그 아이가 없다면 재영이에게 있었던 일들이 믿기지 않을 것 같다. 피해자 몸속에서 나온 DNA처럼 민서는 아무것도 더 필요 없는 재영이 불행의 압도적인 증거다. 그래서 처음 보았을 때는 울컥하는 감정에 미안했지만 그 이후로는 그 아이를 보는 것이 거북할 때도 있었다. 난도질된 재영이의 삶이 떠올랐다. 민서만 없다면 재영이는 재현이나 재훈이처럼 그냥 늦도록 결혼을 안 한, 흔한 골칫덩어리 자식일 수 있지 않을까. 민서만 없다면 재영이의 지난 일들을 완전범죄처럼 감쪽같이 덮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쥐 잡아먹은 피를 수염에 묻히고도 방금 잠에서 깬 듯한 나른한 표정을 짓는 고양이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롭게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그 아이가 재영이 아이라는 것도 잘 믿기지 않는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을 빼고는 재영이와 닮은 데가 없다. 닮은 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다. 차분하지 않고 깔끔하지 않고 수수하지 않고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다.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참지 못한다. 어쩌다 와도 안녕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단 두 마디면 끝이다. 어떻게 지내셨어요도, 건강하셨어요도 없다. 집에 도착한 날 안방 침대 모서리에 앉아 같이 텔레비전을 잠깐 보다가 어색한 공기가 민서 탓인 양 허둥대던 재영이가 이제 그만 옥상으로 올라가라고 하면 쌩하니 일어선다. 카운트다운을 세고 있었던 것 같다. 이 방에서 나간다. 파이브, 포, 쓰리, 투, 원. 제로.

   놈에 대해 몰랐듯 재영이는 민서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 아닐까. 하지만 민서는 제 엄마를 속일 아이로는 안 보였다. 속일 만한 거라고는 성적뿐인데 성적표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놈의 사기와 간통처럼 감출 수는 없을 게다. 그리고 누군가를 속이려면 놈처럼 잘해 주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법인데 민서는 재영이에게 그조차도 하지 않는 듯했다. 재영이는 촌스러운 음식으로만 차려진 밥상 앞에서 연신 민서 눈치를 보느라 눈알을 또르륵 또르륵 굴렸고 화장실이며 침대가 서울집만큼 깨끗하지 못해선지 옥탑방에 도착하면 짐을 풀기 전에 대청소부터 했다. 민서 때문에 늘 빨리 서울로 가 버리는지도 모른다.

    민서 그 아이는 누군가를 속일 만큼 치밀하지도 못해 보였다. 우리 집에 다녀가면 꼭 하나씩 물건을 흘리고 가거나 심지어 외갓집 식구들에게 받은 오만 원짜리 몇 장이나 되는 돈을 두고 갔다. 재현이나 내가 우체국에 가서 택배로 보내 주곤 하는데 그런 정신머리로는 남을 속이지도 못한다. 그러고 보니 민서가 재영이를 닮긴 했다. 공부만 잘하고 다른 건 아무것도 못하는 헛똑똑이라는 점에서.

   아내는 민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민서 때문에 재영이가 놈팡이와 헤어지지 못하고 인생을 망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내 어머니를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자식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사니까 재영이도 그러긴 했을 거다. 가끔 장모님 같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한 집안에 그런 예외가 둘씩이나 연달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아내와 다르다. 민서가 있어서 재영이가 그 긴 세월을 버텼던 건 아닐까. 아마도 자주 죽고 싶었을 재영이가 민서가 있어서 열심히 암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를 한 건 아닐까. 민서가 재영이의 비타민이고 오메가쓰리였던 것은 아닐까. 우리 모두를 다 합쳐도 민서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될 것이다. 다만 앞으로도 그럴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재영이 문제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 나이가 되어 아내로부터 사랑까지는 받지 못해도 그토록 엄청난 원망을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건물 지붕쯤은 우습게 무너뜨리는 물기 많은 봄눈처럼 아내의 원망이 나를 무너뜨리려고 덤볐다. 막을 수도 멈출 수도 없었다. 굵고 튼튼한 나무는 눈 무게를 이겨내지만 나는 더 이상 굵고 튼튼한 나무가 아니었다. 뚝뚝 부러지는 가느다란 나뭇가지처럼 내 체면과 위엄도 뚝뚝 꺾였다. 재영이 때문에도 아팠고 아내 때문에도 아팠다.

   그놈이 두려워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어려워하는 재영이 편이 있어야 했다. 결혼식도, 혼인 신고도 안 한 채 재영이를 데려갔는데 온 식구가 하하 호호하면 그러고 살아도 되는 거라고 인정하는 것 같았다. 내가 화가 났고 놈을 못마땅해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아내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오히려 재영이 편이 없어서 놈팡이가 더 막 할 거라고 했다. 친정 식구가 없다는 것이 결혼한 여자에게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 자기도 친정이 별 볼 일 없어 얼마나 서러웠는지 아냐고 화를 냈다. 재영이 문제로 싸울 때면 아내의 감정이입은 심각했다. 재영이를 옹호하는 건지 재영이를 빌미로 지난날 쌓아두었던 자신의 화를 푸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재영이 문제로 시작된 싸움은 항상 장모님 이야기로 끝났고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었다.          

  

    재영이를 못 보던 긴 세월 동안 재영이를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동네 막국숫집에 일하러 다니던 아내와 출근하지 않은 내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니 아마 마지막 주 일요일이었을 것이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외풍이 센 방 안 공기는 차가워도 온돌 바닥은 짤짤 끓었고 두꺼운 이불이 적당한 무게로 몸을 누르고 있었다. 나란히 누운 아내와 나 사이에는 약간의 공간이 있었고 찬바람이 들어올세라 이불을 바닥으로 늘어뜨려 그 공간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이불이 좀 짧았다. 빠진 이빨 사이로 공기가 새듯 아내와 나 사이의 공간으로 찬 공기가 지나갔다. 일어나서 이불을 하나 더 꺼내 각자 덮으면 완전하게 따뜻하련만 그러면 잠이 깰 터이기에 살짝살짝 이불을 당기면서 선잠에서 깊은 잠으로 접어들려 하던 찰나였다.    

   갑자기 선뜩한 기운이 옆구리를 찔렀다. 칼침을 맞고 형사 생활을 그만둔 후 종종 꾸던 사나운 꿈에서처럼 옆구리에 차가운 칼날이 들어오는 줄 알았다. 흠칫 몸을 떨며 눈을 번쩍 떴다. 나는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아주 잠깐 시간이 흘렀고 통증은 없었다. 꿈을 꿨나 하면서 옆에 누운 아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아내와 나 사이의 공간에 빠진 이빨 사이에 끼운 금니처럼 재영이가 쏙 들어와 있었다. 바닥에 닿지 못했던 이불을 들추고 제 몸으로 빈 공간을 꽉 채우고 있었다. 제 엄마 목덜미에다 이마를 들이밀고, 내 옆구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모로 누워 있었는데 어딜 나갔다 왔는지 냉장고의 냉동칸을 열었을 때처럼 차가운 냉기를 이불속에서 뿜어내고 있었다.

   이불속 뜨거운 공기가 잠깐 주춤하더니 이내 재영이를 감싸서 뎁혔다. 곧 쌔근쌔근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천장을 보면서 다시 옆구리가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재영이는 꿈을 꾸는지 가끔 잉잉 소리를 내면서 움찔움찔 움직였다. 그때마다 옆구리가 간지러웠다. 이불속에서 살그머니 빠져나와 내 몫을 빼니 넉넉해진 이불로 아내와 재영이를 폭 덮어 주었다. 둘은 번갈아가며 규칙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숨 쉬는 간격이 서로 달라 엇박자가 났지만 몇 번에 한 번씩은 공배수에서 만나 동시에 숨을 쉬는 게 신기했다.

   불현듯 어떤 깨달음에 퍽하고 부딪쳤다. 이제 내 삶에서 유일한 임무는 이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자식들이 그 온도와 질감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구나.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하는구나. 다들 자가용을 타도 나는 일 년에 절반을 내복을 입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해야 하는구나. 다들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을 때 나는 보온이 잘 되지 않는 보온도시락의 식은 밥을 미지근한 국에 말아먹어야 하는구나. 내 어머니의 외아들로서의 의무가 내 아이들의 아버지로서의 임무와 바통 터치되었구나.

   그리고 아내, 내 유일한 임무의 유일한 동업자인 아내가 있었다. 처녀 적에는 드물게 큰 키에 드물게 잘 어울리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드물게 튀는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던 멋쟁이였던 아내, 비록 술주정뱅이긴 했지만 홀어머니 손에서 귀하게 자란 외동딸 아내가 잠들어 있었다, 이제는 커트 머리를 파마로 말고 막국숫집 주방에서 국수를 삶는 아내, 홀에서 서빙을 하는 것보다는 오른팔이 아프고 뜨거운 물에 데어도 국수를 삶고 찬물에 헹구는 일이 더 좋다는 아내가 피곤한 얼굴로 재영이를 안고 있었다.      

  

    오후 세 시, 윙하고 믹서기가 도는 소리나 나고 고소한 기름 냄새가 돌더니 새참 시간에 아내가 막걸리 한 잔과 감자부침개를 안방으로 들여왔다.

   “날도 더운데 감자부침개를 했네.”

   “이 정도가 뭐 덥나. 단오 지나야 한창 덥지. 이따가 재영이한테 반찬 보내려고 감자부침개 좀 했어요. 단오 구경 오나 했더니 민서 시험 기간이라고 못 온대요.”

   “민서가 지금 이 학년인가? 아직 대학 가려면 일 년도 더 남았구먼.”

   “아니래요. 민서는 영재학굔가를 다녀서 올해 졸업하고 대학 갈 수도 있대요. 그런데 올해 졸업해도 의대 안 되면 일 년 더 공부해서 내년에 갈 거라고 하던데 요새는 대학 가는 게 뭐 그리 복잡한지 난 잘 알아듣지를 못해서.”

   내일 재영이에게 택배를 보낸다면 감자부침개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재영이가 좋아하는 고구마전도 부치고 오징어채도 볶고 더덕도 무치고 비빔밥 나물들도 데치고 소불고기 양념도 재웠을 테지. 이왕 하는 김에 재현이가 좋아하는 동그랑땡과 꼬치 산적도 했겠지. 내가 좋아하는 잡채도 했을까. 재영이에게 반찬을 보내는 날이면 재현이와 나도 덕을 보기 마련이다.


   한때 아내는 매일 새벽 도시락 다섯 개를 쌌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식구들에게 찬밥은 먹이면 안 된다는 내 어머니의 고집 때문에 한여름에도 보온도시락통에 쌌다. 내 것 하나, 야간자율학습까지 하는 재현이와 재영이 것 각각 두 개씩. 재훈이가 늦둥이었길래 망정이지 적당한 터울로 낳았다면 도시락이 일곱 개일 뻔했다. 거기다 여섯 식구가 먹을 아침밥까지, 한 솥 가득 쌀을 안쳐도 점심에는 국수를 삶아야 한다고 했다.

   공무원들은 질 나쁜 정부미를 싼 값에 살 수 있어 쌀값은 그냥저냥 댈만했는지 밥은 아끼지 않았지만 반찬은 달랐다. 사무실에서 혼자 먹는 도시락의 반찬은 일 년 내내 김치와 감자볶음, 된장국이었다. 아이들의 도시락에서는 된장국이 빠졌다. 국통 뚜껑을 꽉 닫아 두면 열다가 쏟기 일쑤고 살짝 닫아 두면 먹기 전에 쏟기 일쑤라 했다. 모두가 점심을 먹으러 간 사무실에서 위염 때문에 집밥 도시락을 먹는 걸로 되어 있던 나는 김치와 감자볶음만으로 점심을 먹을 재현이와 재영이를 생각했다. 재현이와 재영이가 학교에서 먹은 배추는 몇 포기일까. 감자는 몇 푸대일까. 다 큰 아이들이 뒤늦게 고백한 바, 재현이는 계란말이, 재영이는 오징어채 볶음이 도시락 반찬으로 그렇게나 먹고 싶었단다. 친구들의 도시락 반찬이 새로 개봉하는 영화들처럼 바뀌는 것이 신기했단다. 그랬겠지. 저희들 도시락 반찬은 무한 재방송하는 드라마 같았으니까.

   도시락통들은 주말이면 쉬었다. 다라이에 가득 담겨 있다가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빨간 물이 든 통은 김치를, 누런 물이 든 통은 감자볶음을 담을 거였다. 주말에는 비번인 도시락통들을 대신하여 맷돌과 프라이팬과 찜통이 바빴다. 검은콩을 맷돌로 갈아 콩국수를 하고 프라이팬으로 수십 장의 부침개를 부치고 찜통 가득 감자와 옥수수, 고구마를 쪄냈다. 무엇이든 농사로 얻을 수 있는 흔하고 양 많은 것들을 어머니와 아내는 부지런히 갈고, 부치고, 쪄댔다.  


    이제 우리 집 밥상은 24시간 무인경비시스템처럼 계란말이가 지킨다. 재영이가 없어도 오징어채 볶음 역시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계란말이와 오징어채는 이제 우리도 먹고살 만하다는 증거, 지금까지 열심히 잘 살았다는 훈장 같은 것이다.

   경제적 여유와 백종원 요릿법이 더해져 이제는 우리 집 밑반찬도 평범한 수준까지 올라갔다. 돈을 주고 산 재료로 만든 반찬으로서 처음 등장했던 것은 멸치볶음이었다. 재현이가 얼마나 감탄을 하던지. 멸치볶음에 대한 감탄은 서울서도 날아왔다. 엄마, 이제 멸치볶음도 해 먹는구나! 바닷가에서 살 때 이웃들이 한 마리씩 줘서 맨날 공짜로 구워 먹던 새치와 끓여 먹던 명태도 지금은 멸치처럼 돈을 주고 사 먹는다. 유료화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 집에서는 새치나 명태보다 멸치의 급이 높다. 멸치도 생선이냐는 말은 적어도 우리 집에선 통하지 않는다. 멸치야말로 진정한 생선이다.

   옥탑방에서 함께 사는 재현이나 십 분 거리의 아파트로 독립한 재훈이나 장가를 못 간 게 유일한 흠이지 나무랄 데 없는 자식들이다. 마누라와 아이가 없어서 그런지 아내와 나에게 극진하다. 과일이며 빵이며 홍삼을 아내에게 혼나면서도 미처 먹을 수 없을 만큼 사 온다. 다 늙었지만 영양제만큼은 영양 과다가 걱정될 만큼 유행 따라 다 먹고 있다. 하루 종일 테레비를 보다 보니 때마다 영양제도 유행이 있었다. 얼굴을 알만한 연예인들이 비슷한 포즈와 비슷한 허풍으로 이름까지 비슷한 약들을 선전했다. 전립선에 좋다는 영양제 광고를 무릎에 좋다는 영양제가 밀어 내고 다시 눈에 좋다는 영양제가 그 자리를 꿰찼다. 그 영양제들이 하나씩 우리 집으로 들어와 제가 등장하는 광고들을 같이 지켜본다.

   건물 지하에 세 놓는 것은 포기했지만 일 층과 이 층은 아직 세가 끊길까 봐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건물이 낳는 월세와 재현이가 보태는 생활비를 합치면 풍족해진 반찬, 새참으로 마시는 술과 안주 정도는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꽤나 안락한 노후가 보장된다.


     이제 재영이만 건강해지면 더 바랄 게 없다. 스트레스가 제일 나쁘다는데 재영이가 민서를 의대 보내려고 너무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내도 재영이가 제 형제들 곁으로 오고 싶다면 그냥 둬 줬으면 좋겠다. 재영이가 아프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제는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쯤은 근처의 비행장 때문에 종종 들리는 비행기 소리처럼 가볍게 무시해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암만 재발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뭐든 다 괜찮다.

   따끈따끈하고 노릇노릇한 감자부침개를 젓가락으로 찢어 주며 아내가 말한다.

   “요번 토요일에 재훈이가 저녁 먹으러 온대서 삼겹살 구우려고요. 당신 씹기 좀 불편해도 재훈이가 삼겹살 좋아하니까.....”

   “재훈이가 밥 먹으러 온다고? 삼겹살 좋지, 좋아. 나야 뭐 얼마나 먹는다고. 애들이 좋아하는 거 먹어야지. 당신도 삼겹살 좋아하고. 내가 원마트 가서 사 올까?”

   계단 오르내릴 때마다 무릎이 아프다면서 무슨 마트냐고, 그런 거 사 올 생각 말고 아프단 소리나 제발 좀 그만하라고 한다. 전반부는 걱정이고 후반부는 핀잔인 건 아내의 주특기 화법이다. 후반부는 가만히 있었으면 안 들었을 핀잔일까. 아니, 심부름 갈 생각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으면 또 그것대로 핀잔을 얻어먹었으려나. 걱정이 깔린 핀잔이라면 얼마든지 들어도 괜찮다. 토요일 저녁에는 아들들과 술 한 잔 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은퇴 직후 생계를 위해 여전히 돈을 벌어야 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대학원이나 유학을 간다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사업을 한다는, 벌어 놓은 돈도 없는데 결혼을 한다는, 결혼하고 나서 제 새끼들의 교육비를 보태 달라는 자식들이 친구들에게는 많았다. 은퇴한 중늙은이들이 오래 할 수 있는 일은 딱 두 가지였다. 경비 아니면 운전. 치킨집이나 음식점 창업도 할 수는 있지만 오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친구들이 퇴직금을, 아니 평생을 탈탈 넣어 가게를 오픈할 때마다 화분을 보내느라 상당한 돈이 들던 때도 있었지만 친구들의 가게 수명은 화분의 꽃나무와 경쟁할 수준이었다. 신속하게 죄다 망해 버렸고 날린 퇴직금을 노잣돈 삼아 세상을 등진 친구도 있었다. 내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늘 하는 말이 ‘위를 보지 말고 아래를 보고 살아라’인데 젊었을 때는 내 아래에 몇 명 없었다. 늙어서도 내 위치는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제는 내 아래에 사람이 늘었다. 사는 거, 참 쉽지 않다.


    죽을 때까지 지금처럼만 살 수 있다면 나는 더 바랄 게 없다. 나날이 힘이 세지는 아내가 가족의 중심이 되어 주고 재현이와 재훈이가 착실하게 돈 벌고, 재영이의 암이 재발되지만 않는다면 진짜 더 바랄 게 없다. 민서가 의대를 가는 것이야 뭐, 플러스알파, 보너스 같은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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