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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Oct 17. 2024

남편의 장모님

    아내는 종교를 믿는 것조차 돈이 드는 일이라 싫어한다. 아내에게는 돈이 믿음이고 신이고 종교다. 그렇게 아내가 돈, 돈 하게 된 것은 내가 돈을 많이 벌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아내가 나를 못마땅하게 된 것은 돈 때문이 아니다. 내가 아내에게 점수를 잃은 것으로는 장모님 문제가 가장 클 터이다. 아내는 시어머니 흉을 본 적이 없으나 나는 장모님 흉을 많이 봤다. 흉을 봤다기보다는 장모님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할 때면 아내에게 하소연을 한 건데, 물이 반밖에 안 남았다는 말과 물이 반이나 남았다는 말의 의도는 달라도 결국 남아 있는 물의 양은 같듯이 내 의도가 어쨌든 결과는 같았다.


    나는 아내보다 장모님을 먼저 만났다. 술 취한 손님이 행패를 부린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는데 장모님은 신고자가 아니라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었다. 행패라고 해 봤자 영업시간이 끝났는데도 나가지 않고 술을 더 달라고 혀 꼬부라진 소리를 연신 해 대는 정도였다. 술병 하나가 떨어져 깨져 있고 의자 하나가 넘어져 있는 걸 보니 아줌마치고는 구력이 상당한 주정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촌에서 그 정도 일로 경찰을 부르는 일은 없는데 그동안 가게 주인이 어지간히 시달렸던 모양이었다. 장모님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술주정뱅이가 되기에는 많이 젊었고 많이 멋쟁이였고 삶에 찌든 기색은 별로 없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 일어나세요.”

   “누구야, 누구! 술이나 더 가져와.”

   “경찰입니다. 경찰서로 같이 가셔야 해요. 여기 사장님이 신고했어요.”

   “경찰서? 경찰서? 제가요? 제가 왜요?”

    경찰서라는 말에 술이 금세 깨면서 존댓말까지 튀어나왔다. 야간 근무의 주 고객은 대부분 술 취한 사람들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하면 어제도 보았고 오늘도 보고 내일도 볼 풍경이 펼쳐졌다. 너 내가 누군지 아냐고 묻는 질문이 가장 흔했다. 꼭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자기가 누군지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런 과시용 질문에 꼭 맞는 대답을 테레비에서 마동석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찾았다. 그거까지 내가 알아야 하니? 술주정뱅이가 동네 술집에 출동하는 말단 경찰에게 두려움을 갖는 경우라면 뻔했다. 사실은 별로 취하지 않았거나 정말 보잘 것 없는 신세거나.

    경찰서에서 수화기를 쥐어 주고 가족을 부르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이 아닌 딸이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의 엄마가 술이 너무 과해서 그만, 죄송합니다.”

    연실 수그리는 고개에서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이성으로 볼 수도 있는 젊은 남자를 대하는 부끄러움이 묻어났다. 척 봐도 주정뱅이 엄마에게는 과한 딸이었다.

   “내일 신고한 술집에 가셔서 사과는 하세요. 그래야 사건이 종결됩니다. 뭐 변상해 달라는 말은 안 할 테니 걱정 마시고요.”

    호의로 한 말인데 아차 싶었다. 변상을 걱정할 처지인 게 뻔히 보인다는 말을 한 것 같았다. 점수를 따려고 한 말에 점수를 잃은 것 같았지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다음 날 주정뱅이 아줌마가 다시 경찰서에 찾아온 것을 보면.

   “아이고, 순경 선생님. 어제는 미안했어요.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좀 속상한 일이 있어서 어제 술을 너무 마셨나 봐요. 나 원래 그런 사람 아니에요. 아무렴요, 절대 그런 사람 아니에요. 내가 너무 미안해요.”

   “인사까지 오실 필요는 없는데요. 이제 술 많이 드시지 마세요. 따님이 걱정 많이 하시던데요.”

   따님 이야기가 나오자 주정뱅이 아줌마는 생글생글 웃기 시작했다.

   “인사 와야지요. 좀 전에 술집에도 가서 사과했어요. 그 술집 주인장 말로 순경 선생님이 오늘 전화해서 그만한 일로 손해배상 받고 그러면 동네 장사하는 데 좋을 게 없다고, 그냥 한 번 봐주는 게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고 하데요. 뭐 내가 그 집 워낙 단골이고 물어줄 만큼 잘못한 것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누가 내 편을 들어주면 고맙지요. 남편도 없는 처지에.”

   젊은 총각 순경이 왜 자기편을 들었는지 눈치챈 웃음이었다. 남편도 없이 딸 하나 키우며 사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를 짧게 이야기한 후 시집갈 나이가 된 그 딸이 얼마나 예쁘고 착한지를 길게 이야기한 것을 보면 말이다.  

   “젊은 총각이 생긴 것도 신성일이랑 똑같은데 아이고, 말하는 건 신성일보다 더 멋지니 어쩔까. 저, 중앙시장 입구에 칼국숫집 있는 거 알지요? 엄마 칼국수. 내가 거 사장이에요. 국수 자시러 꼭 오쇼. 순경 총각은 무조건 공짜, 공짭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예쁘고 착한 외동딸은 역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외아들 순경 총각을 그다지 맘에 들어하지 않을 테지만 그 엄마는 달랐다. 부쩍 시장 순찰을 자주 돌게 된 나를 볼 때마다 가게에서 달려 나와 손을 잡아끌며 큰소리로 총각을 외쳤다. 술주정뱅이들은 공통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 예외 없이 성량이 풍부했다.

   “순경 총각, 순경 총각! 일루 와. 점심시간인데 국수 한 그릇 해. 안 그래도 손님들 국수 삶으랴 총각 오나 밖에 쳐다보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네. 아이고, 내가 이런 순경 총각을 사위로 보면 얼마나 좋을까.”

   사위 소리 나오는 데 한 달이 채 안 걸렸고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주정뱅이 아줌마는 경찰 총각의 장모님이 되었다. 아내는 홀어머니를 등에 업은 내 처지 때문에 결혼을 망설였지만 아내의 처지도 만만치 않았다. 나 역시 아내를 보면 골백번이라도 결혼하고 싶었으나 장모님을 생각하면 망설여졌으니까.


    같은 홀어머니지만 내 어머니는 장모님과 스타일이 달랐다. 카랑카랑하고 억척스러웠고 자존심이 강했다. 아버지가 돈 한 푼 안 남기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딸 셋과 아들 하나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어머니는 양팔에 사람이 매달려도 끄떡없이 버티며 웃는 역도 선수 같았다. 머리에 물건을 이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잡다한 물건을 파는 행상부터 시작해 어엿한 미장원 주인이 될 때까지 어머니는 단 한 번도 힘들다거나 아프단 말을 하지 않았고 웬만한 운명은 업어 쳐서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재영이가 공부를 어설프게 잘해서 서울대는 못 가고 그 밑의 사립대를 가게 되었을 때 솔직히 아내와 나는 망설였다. 아들도 아니고 딸을 굳이 대학 보내려고 기둥뿌리를 뽑는 일은 촌에서 드물었다. 재영이와 가장 친한 친구도 연년생 남동생이 다음 해에 대학을 가야 해서 재영이만큼 공부를 잘했음에도 지방대를 간다고 했다. 재영이를 결국 서울로 보내기로 결심한 데는 재현이가 외항선을 타면서 동생 학비를 벌겠다고 나선 것도 한몫했지만 어머니의 불호령이 더 큰 이유였다.

   “딸이라고 공부 대충 시키려 하지 말아라. 돈 아까워하지도 말아라. 재영이 딱 보니 공부 빼놓고 잘하는 거 아무것도 없는 애다. 지가 타고난 팔자가 공분데 부모가 그거 막으면 안 된다. 어릴 때 피아노 한번 못 가르치고 여태 학교만 보내며 돈 한 푼 안 쓰고 키웠는데 대학은 제 실력대로 보내 줘야지. 부모는 죽을 힘을 다해 자식 앞길을 틔워 줘야지 이것저것 재면 안 되는 거다. 정 힘들면 내가 남의 밭에 가서 김이라도 맬 테니 걱정 말고 재영이 서울 보내라.”

   피아노 학원 얘기를 그때까지 기억하고 계셨다. 워낙 촌 동네라 학원 다니는 아이들이 없었는데 공부 좀 한다는 여자애들이 피아노 학원은 꼭 다녔다. 그건 일종의 불문율이고 훈장이었다. 재영이는 초등학교 내내 일등이었다. 작은 시골학교에도 종종 서울서 전학 오는 애들이 있었다. 얼굴이 하얀 전학생들과 옷차림이 세련된 전학생 엄마들은 이런 촌 학교에서는 일등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오히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재영이 덕분에 자존심이 상할 일은 없었다. 시내의 큰 학교 아이들을 다 제치고 시 수학경시대회에서 일등을 한 후로는 졸업할 때까지 학교 선생님들 입에서 ‘얘가 걥니다’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재영이를 피아노 학원에 보낼 것인가를 두고 아내는 한동안 심각하게 고민했다. 한번 보내면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보내야 하는데 한 달 반찬값과 맞먹는 고정 지출이 생기는 일이라고 했다. 돈이 더 나올 데는 없으니 어딘가에서 돈을 더 줄여야 했다. 그나마 줄일 수 있는 품목은 할부로 열심히 사댔던 동화책이었는데 결국 아내는 피아노 학원을 포기하고 동화책을 선택했다.

   재영이는 줄창 책을 읽었다. 여름방학이면 마당 평상 그늘은 항상 재영이 자리였고 수건을 돌돌 만 베개가 하나 놓였다. 재영이는 매일 같은 자리에 누워서 책을 읽었다. 감자나 옥수수를 한 솥씩 삶아 두면 책을 읽느라 제 오빠와 남동생이 다 집어 먹는 것도 몰랐다. 촌애답지  않게 식탐이 없었다. 아내는 그런 재영이가 기특해 부대 피엑스에서 싸게 사 온 써니텐을 재영이에게만 한 잔씩 주곤 했다. 부대에서 낙하산 줄을 얻어다 마당 소나무에 그네를 매어 준 후로는 그네에 앉아서 흔들흔들하며 책을 읽었다. 동네 아이들은 여름이면 피부 껍데기가 얼룩덜룩 뱀처럼 징그럽게 벗겨질 때까지 바닷가에서 살았다. 개학날 보면 재영이만 서울 애들처럼 하얬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런 재영이를 보고 쟈는 뭐가 돼도 될 것이라고 칭송하며 해가 져야 집에 돌아와 백사장의 모래만큼 많은 밥을 퍼 먹고 곯아떨어지는 새까만 자식들을 타박했다.

   겨울 방학이면 재영이는 아랫목에 배를 깔고 가슴팍에 베개를 받치고 또 책을 읽었다. 온 동네 애들이 비료 푸대 안에 지푸라기를 넣고 조금이라도 경사가 진 곳이면 남의 묘지 위에서도 비료 푸대를 탈 때였다. 눈은 지겹도록 내렸고 경사진 언덕과 묘지도 지천에 널렸다. 집집마다 저녁이면 내일 다시 젖을 옷과 신발을 말리느라 난리였다. 연탄불 위에 연탄집게를 놓고 그 위에 신발을 말리다가 신발이 고등어처럼 새카맣게 타버리는 일이 어느 집에나 흔했다. 아내도 아들들 신발을 그렇게 태워 먹은 날이면 그게 아까워서 가슴까지 태워 먹곤 했다. 동네 사람들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집에서 책만 읽는 재영이를 보고 쟈는 뭐가 돼도 될 것이라고 칭송하며 해가 져야 집에 돌아와 젖은 빨래더미를 한 무더기씩 벗어 두고 그만큼의 밥을 먹어 대는 축축한 자식들을 타박했다.    

   사실 재영이가 뭐가 돼도 될 조짐은 훨씬 더 어릴 때부터 있었다. 여름에 서울서 피서객들이 몰려들면 모두가 민박 손님을 받았다. 우리도 재영이와 어머니가 함께 쓰는 방을 서울 손님들에게 내어 주고 쏠쏠한 부수입을 올렸는데 재영이는 서울 사람들을 본 후로 하얀 난닝구 빤스 바람으로 바닷물에 뛰어드는 걸 질색하게 되었다. 왜 우리 동네 애들은 수영복을 안 입냐고 했다. 서울 애들은 저렇게 알록달록 예쁜 그림이 그려진 투명 튜브를 타는데 왜 우리 동네 애들은 검정 고무 튜브만 타냐고 했다. 확실히 재영이는 서울 사람이 될 것 같은 조짐이 어릴 때부터 있었다.

   그런 재영이에게 아내는 열심히 책을 사줬다. 책장수는 우리 동네에 오면 우리 집에만 들렀다. 방학 때면 백 권씩 책을 사고 다음 방학 때까지 할부로 책값을 나눠서 줬다.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에 할부가 가능했던 것은 공무원이라는 알량한 내 신용 덕분이었다. 책을 읽는 속도를 감당할 만큼 새 책을 댈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재영이는 그 책들을 몇 번씩 읽었다. 아내가 유일하게 아끼지 않는 돈이 재영이 책값이었다. 내 월급에서 일 년에 이백 권의 책값을 빼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궁금했지만 아내에게 묻지 않았다. 모르는 게 더 편한 일도 있는 법이니까. 알아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경우도 있는 법이니까. 어머니가 일주일에 하루씩 밭에서 나는 감자며 고추, 호박, 대파 따위를 시장에 가져다 팔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시내까지 한 시간을 걸어갔다가 빈 다라이를 들고 다시 한 시간을 걸어오셨다고 했다. 겨울이면 찐빵을 쪄다 파셨다고 했다. 아내가 제발 버스라도 타고 다니시라고 해도 멀미 나서 버스 못 탄다며 끝까지 걸어 다니셨다고 했다. 꼬깃꼬깃한 종이돈과 반질반질한 동전을 아내에게 주며 재영이 책 사는 데 보태라고 하셨단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내게 장모님 같은 어머니는 낯설었다. 시장 사람들에게 슬쩍슬쩍 칼국숫집에 대해 물어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장모님의 이력은 이랬다. 젊어서 남편이 죽었지만 상당한 재산을 남겼다, 딸 하나 키우는 건 일도 아닐 정도였다, 그런데 술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술로 돈을 다 날렸다, 결국 몇 푼 안 남은 돈을 끌어모아 코딱지만 한 칼국숫집을 차렸다, 술만 마시면 신세타령이 시작되면서 남편 없이 딸 하나 키우는 일의 고달픔이 고름 터지듯 솟구친다, 얼굴이 반반하고 남자들에게 잘 웃어 칼국수는 맛없어도 손님은 많다, 문 닫을 때면 항상 손님과 주거니 받거니 한 술 때문에 알딸딸하다, 그래도 딴 여자들에게 머리끄덩이 잡히는 일을 안 하는 건 딸 때문일 거다, 딸이 지방 명문고를 나와 사범대에 가고 싶어 했으나 얼른 돈 벌어서 엄마 호강시키라며 주저앉혔다, 딸은 엄마와 완전 다르다, 엄마가 개차반이라도 딸을 보고 가끔 중매를 서는 이들이 있는데 십중팔구 주제를 모르는 엄마로부터 거절의 불호령을 듣고 어이가 없어한다, 사위에 대한 꿈이 어마어마하다, 고로 그 집 사위가 되려면 개차반 장모를 갓난아기 다루듯 정성으로 어를 수 있는 무한한 인내심을 가져야 할 거다, 설령 그런다 해도 장모 때문에 평생 고생할 걸 각오해야 할 거다......

   장모님은 내가 신성일을 닮아서가 아니라 순경이었기 때문에 사윗감으로 낙점한 게 분명했다. 실상은 여기저기서 드잡이 당하는 따까리였지만 당시 시골 어른들에게 순경은 꽤나 대단한 존재였다. 딸을 앞세워 사위에게 어떤 것을 기대하는지가 너무도 뻔해 결혼이 망설여졌다. 장모님에게도 주한 미군이 필요했던 것인데 장모님은 기대를 감추지도 않았다.

   “요새 시장 사람들이 나한테 꼼짝도 못 해. 아무렴, 꼼짝도 못 하고 말고. 김 순경이 내 사위가 될 판인데. 남편 없는 과부라고 깔보더니, 내가 아주 속이 다 후련해. 딸 둔 덕을 이제야 보네. 아들 없는 서러움이 다 날아갔어.”


   아내와 결혼을 할 때는 장모님의 술이 가장 걱정이었는데 포인트가 빗나간 걱정이었다. 장모님은 꾸준히 술에 취하셨으나 그때는 전화로 넋두리만 좀 들어주면 끝이었다. 나이가 드시면서 몸은 쇠약해지는데 들이붓는 술의 양은 줄지 않으니 금세 골아떨어지시는 듯했다. 술이 장모님을 케이오시키는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 장모님 건강이 걱정 안 된 것은 아니나 어차피 마실 술이라면 빨리 취하는 것이 나로서는 편한 일이었다.

   진짜 걱정할 일은 예상과 달리 멀쩡한 정신일 때 주로 벌어졌다.

   “김 서방, 우리 집 냉장고가 고장 났어. 빨리 좀 와 봐.”

   “냉장고가요? 안 그래도 재현이 엄마가 냉장고 곧 사 드려야 할 거라고 했는데. 그런데 장모님 지금 눈이 많이 와요. 눈 좀 그치면 제가 시내 가서 사서 보내 드릴게요.”

   “눈이 언제 그칠 줄 알고 눈 그칠 때까지 기다리나? 오늘 내로 당장 사서 보내 주게. 그리고 자네도 같이 오고. 늙은이 혼자 있으면 제대로 놔주지도 않는다구. 얼마 전에 가스레인지, 그것도 엉터리로 연결해 놓고 가 버렸잖나. 그러니 이번에는 자네가 같이 오게.”

   일요일 오후, 사위가 집에 있는 걸 아는 장모님의 재촉 전화에 오 분 간격으로 시달리느니 움직이는 게 나았다. 사채업자의 빚 독촉 전화에 버금가는 끈질긴 다그침이 이어질 터였다. 눈 때문에 오토바이는 탈 수 없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에 도착한 후 냉장고를 사서 대관령 밑 장모님 집에 도착하려면 네댓 시간은 걸릴 것이다. 그것도 배달이 곧바로 된다는 가정 하에서였다. 눈이 와서 안 된다, 배달이 밀렸다 하면 웃돈이라도 얹어 줄 각오였다.

   그 네댓 시간 동안 나의 위치를 추적하는 전화에 시달리는 것은 아내의 몫일 터였다. 몇십 년만의 혹한이라는 뉴스를 들으며 옷을 서둘러 챙겨 입기 시작했는데 옷걸이에서 잠바를 내리던 아내가 갑자기 털썩 주저앉더니 전화를 걸었다.       

   “엄마, 오늘 영하 이십 도래, 이십 도! 눈도 엄청 와. 대관령 밑이니 거기는 더하지? 이 날씨에 배달차가 어떻게 거길 올라간다고 그래? 밖에 좀 봐. 지금 다니는 차 있는지. 아니, 반찬이 왜 상해? 영하 이십 돈데! 그냥 문 밖에 내놔. 좀 얼면 어때. 반찬 있어봤자 얼마나 있다고. 재현이 아빠가 이 날씨에 거기까지 어떻게 간다고 난리야? 재현이 아빠 다치면 엄마가 책임질 거야? 내가 진짜 엄마 때문에 미치겠어. 지난번에 가스레인지 고장 났을 때도 서비스 부르고 나서 엄마가 나한테 몇 번 전화했는지 알아? 그게 불효녀랑 무슨 상관이야? 다른 부모들은 이 날씨에 자식들이 온다고 해도 오지 말라 그래. 사고 날까 봐 걱정돼서! 생각을 좀 해 봐. 내가 진짜 엄마 때문에 재현이 아빠 보기 창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창피하다고! 그냥 기다려. 눈 그쳐야 냉장고 사러 갈 테니, 암말 말고 기다려. 전화도 하지 마!”


    장모님을 포함해 일곱 식구가 한 번씩만 아파도 일곱 번이었다. 무슨 일이 한 번씩만 생겨도 일곱 번이었다. 그런데 여섯 식구가 아픈 것과 여섯 식구에게 생기는 문제를 다 합쳐도 장모님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참아야지 참아야지 하면서도 가끔은 아내에게 장모님을 힐난하는 넋두리를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장모님이 문제라는 건 아내도 모르지 않았다. 아니,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장모님 곁을 떠나 시어머니를 모시는 게 아무리 시집살이라도 더 낫다는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아내는 의무로 규정된 때를 제외하면 가급적 친정에 가지 않으려 했다. 갔다 오면 며칠씩 속을 끙끙 앓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딸이 제 엄마를 원망하는 것과 사위가 장모님을 원망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것을 몰랐다. 아내가 어쩌다 제 얼굴에 침 뱉는 걸 무릅쓰고 장모님에 대한 푸념을 하면 맞장구를 치거나 외동딸보다 외동사위의 고충이 더 크다고 기회를 틈타 잽싸게 하소연했다. 흠잡을 데 없는 어머니를 가진 나는 제 부모에 대해 싫은 소리를 듣는 심정을 몰랐다.

   아내와 나의 서열이 역전된 후 제일 많이 들은 소리가 ‘당신이 옛날에 우리 엄마 욕할 때....’였다. 그때서야 장모님 문제로 아내가 오랫동안 섭섭해했다는 것을 알았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억울함이 더 컸다. 그게 욕이었다면 당신이 나보다 장모님 욕을 훨씬 더 많이 했다고 항변했더니 ‘내가 우리 엄마 욕하는 거랑 당신이 우리 엄마 욕하는 게 어떻게 똑같냐’고 했다.

   만약 내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고부 갈등이 생기면 내가 중재를 해야 하듯이 장모님과 나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아내가 해결을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장모님으로 인한 고충을 아내에게 하소연하지, 그럼 누구에게 하소연하나. 물론 내 어머니는 아내와 고부 갈등을 일으킨 적 없이 돌아가셔서 나는 아내와 같은 처지에 놓여 본 적이 없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아내가 내 어머니 흉을 보았다면 나도 싫을 것 같긴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장모님과 관련하여 마지막에 내게 감형의 기회가 있었다. 당시에는 힘들다고만 생각했던 그 일이 무기징역형을 받은 나를 가석방시켜 줄 찬스였을 줄이야. 그 일이란 장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칠 년을 요양원에 모셔 두고 월급날이면 과일이며 빵을 들고 꼬박꼬박 장모님을 찾아뵌 것이다. 술독과 다름없었던 장모님은 몸보다 정신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대관령 밑 산골 마을에서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들도 그냥 놓아두는 일이 흔했다. 누구나 그런 상태로 좀 오락가락하다가 평생 살던 방에서 가족에 둘러싸여 임종을 맞았고 병풍 뒤 관속에 누워 살았을 때는 좀처럼 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반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저승길을 떠났다.

   장모님에 대해 내가 보기에도 좀 무심하고 냉정했던 아내는 장모님이 치매 증상을 보이자 돌변했다. 갑자기 심청이는 명함도 못 내밀만큼 효녀가 되었다. 장모님의 치매를 고쳐 주겠다는 뱃사람들의 제안이 있다면 공양미 삼백 석이 아니라 삼십 석에도 동해바다에 뛰어들 것 같았다. 장모님은 당신이 필요할 때나 득달같이 전화를 걸었지 아내가 전화를 걸면 좀처럼 받지 않는 것은 아프지 않을 때도 흔하던 일이었다. 주로 술에 취했거나 취하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장모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온 동네 이웃에게 전화를 돌렸다. 우리 엄마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우리 엄마 좀 찾아봐 달라고.

   “재현 엄마, 자꾸 그러면 남들이 싫어해.”

   “그럼 어떻게 해요? 엄마가 어디 물에라도 빠졌으면 어떡해요. 거기가 온통 냇가고 둑 천지잖아요.”

   “장모님이 그 정도는 아니지. 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아직은 오 분, 십 분 깜빡깜빡하는 정도라고.”

   “그래도 그러다가 갑자기 훅 나빠진다고 했잖아요. 그 훅이 언젤지 어떻게 아냐고요.”

   매일매일 그런 대화가 이어지자 장모님 동네 사람들보다 내가 먼저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았다. 콩나물 무침은 맹탕이고 미역국은 소금국이었고 젓가락은 짝짝으로 놓였다. 커피를 타고나서 가스 불을 안 껐고 까칠한 얼굴에 로션도 바르지 않았고, 심지어 재현이 생일을 잊어버렸다.  

   “재현 엄마, 우리 장모님 집으로 모실까?”

   “무슨 소리예요, 절대 안 돼요.”

   “그럼 어떻게 하냐고? 장모님보다 당신이 먼저 죽을 것 같은데. 당신 얼굴 좀 보라고. 길어야 몇 년일 텐데 그냥 집으로 모셔.”

   “그건 안 돼요. 절대로.”

   “그럼 어쩌자고?”

   뜸을 한참 들이던 아내가 요양원 이야기를 꺼냈다. 장모님은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살림에 몇 년이 될지 모르는 돈을 매달 지출하는 게 걱정이라고 했다.


   내가 그리 다정한 남편이나 사위는 아니었지만 아내가 내 어머니에게 얼마나 고맙게 했는지 잊을 만큼 나쁜 놈은 아니었다. 내 어머니는 경우에 어긋나는 적 없고 부지런하고 악착같고 생활력이 강한 만큼 뭐든지 당신 뜻대로 하고 싶어 했고 누구도 게으른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주일이면 온 가족을 끌고 반드시 교회에 가야 했다. 우리가 이만큼 사는 건 다 하느님 덕분이므로 칼같이 십일조도 해야 했다. 가끔은 아들인 나조차도 그런 어머니가 숨 막혔다. 이 집 저 집 일 하면서 돈 벌 생각 마시고 십일조나 그만두시라고 말했다가 곡기를 끊고 드러누우시는 바람에 결국 내가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앞으로 그런 지옥 갈 말은 절대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고서야 수저를 드셨다. 애 셋 키우는 것을 도와주시고 밭일을 못하는 아내를 대신해 텃밭 농사를 도맡아 하시고 마른풀을 썩둑썩뚝 썰어 소를 키우시고 가까운 식당들에서 음식 찌꺼기를 모아 개를 키우시고 수요일과 일요일마다 부지런히 교회에 다니는 어머니 앞에서 아내는 입도 벙긋 안 하는 세월을 살았다. 백수를 눈앞에 두고 어머니가 잠들 듯 돌아가셨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재현 엄마가 효부라서 시어머니가 편히 돌아가셨다는 말을 할 만큼 아내는 내 어머니를 잘 참았다.

   그래서 적금 붓는 액수를 좀 줄이더라도 장모님을 요양원에 모시는 것을 선뜻 찬성했는데  그것이 노후를 위해 내가 가장 잘한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나의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기억에도 없고 어머니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지 않으시더니 불과 일주일 후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죽는 일의 고달픔을 몰랐다. 장모님이 요양원에서 칠 년이나 계실 줄은 몰랐다. 물론 알았더라도 적금을 줄이는 걸 아까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매달 한 번씩 요양원을 방문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내와 내가 방문했을 때 장모님이 온전한 정신이면 술을 사 내라고 땡깡을 부리셨다.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집히는 대로 집어던지셨다. 우리가 쫓기듯 요양원을 나서야 잠잠해진다고 했다. 아내와 내가 방문했을 때 장모님이 온전한 정신이 아니면 누구냐고, 나 죽이러 왔냐고, 내 딸이나 불러오라고 땡깡을 부리셨다.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집히는 대로 집어던지셨다. 그 두 가지 경우 외는 없었다. 나는 앞의 경우가 더 힘들었다. 아내는 어느 경우가 더 힘들었을까.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일 년은 아내가 자주 울었다. 돌아가시고 처음 맞은 장모님 생신, 기일에는 밤새도록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나는 원래 말주변이 없었다. 다음 해에는 돌아가신 장모님 생일에 퇴근하면서 롤케이크를 하나 사 왔다. 주말이면 겨우 오징어 한 손 데쳐서 오이와 당근을 잔뜩 넣고 무치면 애들은 오징어를, 아내와 나는 오이와 당근만 먹던 시절은 벗어나 있었지만 생일도 아닌데 롤케이크를 먹지는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날 밤 아내는 깨지 않고 잤다. 시간이 흐른 덕인지 내가 사다 준 롤케이크 덕인지 모르겠지만 아내는 울지 않고 잤다.


   홀시어머니와 홀어머니를 떠나보내고 아내는 홀가분해진 것 같았다. 적금을 원위치하고도 여유가 좀 생겼는지 종종 소불고기를 해줬다. 아내는 부스러기 고기와 국물에 밥을 비벼 먹었지만 소고기가 상 위에 올랐다는 사실에 감개무량해했다. 이후로는 속도가 일정치는 않았고 가끔은 멈칫하기도 했지만 사는 형편은 나아지는 쪽으로 가속도가 붙었다. 재현이가 해양전문대를 나와 외항선을 타고 재영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자 나는 갑옷을 벗었다. 비로소 사지를 움직거릴 수 있었다. 터울이 크게 지는 재훈이의 대학이 남아있었지만 재훈이는 공부를 못해 집에서 대학을 다닐 터였다. 그 정도는 군대에서 취사병 하다가 제대하고 라면 하나 끓이는 격이었다.

    아내가 적금을 타서 차를 사줬다. 자주색 세피아. 그랜저는 아니었으나 프라이드는 면했다. 공부를 지지리도 못해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던 재훈이는 자가용을 타고 학교에 다녔다. 재훈이는 가끔 메이커 옷도 입었고 새 자전거도 탔다. 공부도 안 하면서 학원을 다녔다. 재현이와 재영이가 맘에 걸렸지만 먼저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평생 자동차는 세피아가 처음이자 끝이었다. 아내는 요새 사람들이 개를 씻기고 입히고 끌어안고 다닌다고 욕하지만 나는 이해한다. 나 역시 새벽마다 세피아를 얼마나 쓸고 닦았는지 모른다. 할 수만 있다면 개처럼 안고 다녔을 것이다.

   지금 나의 세피아는 엄청나게 큰 테레비다. 새벽마다 쓸고 닦고 온종일 쳐다본다. 공부 빼곤 다 잘하는 재훈이가 사줬다. 아내와 연애할 때 이후로 극장이라고는 못 가봤는데 지금은 매일매일 극장이다. 뉴스도 보고 스포츠도 보고 드라마도 본다.

   아내는 노래 교실에 가지 않는 날이면 얼마 전까지 재훈이 방이었던 옆방에서 얼마 전까지 재훈이 것이었던 컴퓨터로 유튜브를 한다. 백종원 요리도 배우고 임영웅 노래도 듣는다. 그리고 때가 되면 밥을 차려 주고 때가 되면 막걸리와 주전부리 안주를 내어 준다. 겨울에 방만 좀 따뜻하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그건 어떻게 해도 안 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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