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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Oct 17. 2024

아내의 시어머니

    어릴 적 엄마에게서는 자주 냄새가 났다. 달콤하거나 시큼하거나 맛있거나 톡 쏘는 냄새. 친구들은 아빠에게서 그런 냄새가 난다고 했다. 아빠가 냄새를 풍기며 집에 들어온 날이면 사탕이나 과자, 하드를 얻어먹을 수 있어 좋기도 하지만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아빠와 싸우기 때문에 싫기도 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냄새가 그냥 좋았다. 냄새가 날 때면 엄마의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냄새가 유독 짙을 때 엄마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거나 볼에 뽀뽀를 했다. 다정했다.

   “미옥이 뭐 먹고 싶어? 엄마가 다 사 줄게. 이것 봐, 엄마 돈 많이 벌었어.”

   “미옥이는 엄마가 있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엄마가 다 해 줄게.”

   냄새가 옅어지기 시작하면 엄마의 즐거움도 같이 옅어졌다. 그리고 엄마는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슬퍼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서방 없다고 무시당하는 내 팔자야. 미옥아, 니가 언제 크냐. 니가 언제 커서 엄마를 먹여 살리냐.”

   “너만 아니면 내가 이러고 살지도 않는다. 너 키우다 내 좋은 시절 다 간다.”

   그러다가 가끔 냄새가 싹 사라질 때면 엄마는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밥을 한 솥 가득 짓고 국을 한 솥 가득 끓였다. 다시 엄마가 냄새를 풍기는 동안 먹을 밥과 국이었다. 갓 지은 고슬고슬한 밥 냄새는 장맛비가 남긴 꿉꿉하고 축축한 공기를 바짝 말려 주는 쨍한 햇빛 같았다. 빨랫줄이 휘어지도록 가득 널린 젖은 옷가지들도 바람에 간질여 비누 냄새를 배배 꼬았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냄새들로 집안이 가득 찼다. 엄마가 아무 냄새를 풍기지 않을 때 엄마 냄새를 대신하는, 가끔만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하지만 좋은 냄새는 너무 빨리 사라졌다.     


   상견례 날 엄마는 길고 허여 멀갰는데 시어머니는 땅딸하고 까무잡잡했다. 엄마는 꽃이 그려진 블라우스에 까만 주름치마를 입고 굽이 뾰족한 구두를 신었는데 시어머니는 옥색 한복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코를 오뚝 치켜 세운 납작한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엄마는 살색 두피를 다 덮지도 못할 만큼 숱이 적은 짧은 커트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고 한 숟갈의 설탕으로 부채만 한 솜사탕을 만들듯 한껏 뽕을 넣어 부풀렸는데 시어머니는 머리를 풀어야만 눈꼬리가 제자리를 찾을 것처럼 긴 은색 머리카락을 팽팽하게 당겨 똘똘 만 후 비녀를 꽂고 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싶은 것이 다정한 엄마아빠가 있는 친구 집처럼 신기했다. 어릴 적 별명이 똑순이였을 사람의 예로 시어머니보다 적당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혼자 나를 만날 때와 달리 남편은 가산점을 얻은 양 느긋하고 여유가 있었다. 나는 이런 엄마의 아들이야, 하는 표정이었다.

   엄마는 수다스러웠고 시어머니는 말이 적었다. 시어머니도 자신처럼 젊을 적 남편과 사별한 홀몸이라는 사실이 남편 있는 여자 앞에서는 기가 죽던 엄마를 신나게 만들었다. 순경 사위가 마침 아버지가 없어서 양쪽이 동등한 조건인 게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남편 없는 서러움과 홀로 자식을 키우는 고달픔 모두를 교류하기에 이보다 좋은 상대는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시어머니는 엄마 쪽으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줄곧 나만 바라봤다. 돋보기에 모아진 햇빛에 종이가 타듯 시어머니가 쏘아내는 시선에 온몸이 타들어 가는데 엄마의 잉여 수다는 서라운드로 쩡쩡 울리며 부채질을 했다. 공정하게 화투패를 한 장씩 돌리듯 시어머니와 남편, 나에게 대답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질문을 지치지도 않고 돌렸다.        

   처음으로 남편이 부러웠다. 연애를 하면서 남편이 부러웠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내 친구들은 내가 아깝다고 했고 남편 친구들은 남편을 도둑놈이라고 했다. 나는 남편보다 많이 어렸고 키는 남편보다 조금 작았다. 남편은 내가 결혼을 거절할까 봐 걱정했지만 나는 남편이 프러포즈를 안 할까 봐 걱정하지 않았다. 저런 엄마는 술 냄새를 풍길 일은 없겠구나, 저런 엄마는 아빠가 남긴 재산을 탕진하진 않겠구나, 저런 엄마는 사범대학에 가는 대신 빨리 돈 벌어서 엄마를 먹여 살리라고 재촉하진 않겠구나, 저런 엄마는 일주일 치 밥과 국을 한꺼번에 짓고 끓이진 않겠구나.     

   

   시어머니는 오래된 집 주변의 땅을 한 조각도 놀리지 않았다. 고추며 파, 호박, 감자, 콩, 고구마, 옥수수를 때맞춰 심었다. 물을 주고 잡초를 솎아 주고 대를 묶어 주며 우리 손주들 먹을 거 많이 열리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 거름도 직접 져다 날랐고 거름이 묻은 옷은 직접 싹싹 비누칠을 해서 오래오래 헹궜다. 봄이면 깨끗한 천을 깔고 하얀 쌀가루로 범벅한 쑥을 쪄 쑥버무리를 만들었고 여름이면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열린 앵두나 마당 귀퉁이 넝쿨 속에 숨은 못난이 참외를 땄다. 가을에 감이 열리기 시작하면 마당의 개 줄을 길게 늘여서 개가 밥값을 하게 했다. 땡감이 열리면 절반 정도를 따서 단물을 들였고 나머지는 말랑하게 익을 때까지 두었다가 마루 위에 걸어 반시를 만들었다. 마당에 무를 파묻었다가 긴긴 겨울밤 돌돌 깎아 먹었다. 일 년에 한 번 고추장, 된장, 간장을 담그고 아득한 높이로 쌓인 배추로 김장을 했다. 쌀값 외에 부식값은 거의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고 손주들이 먹을 간식도 밭에서 캐고 땄다. 수확이 끝난 남의 밭들을 돌며 시래기를 주워 와 담벼락에 널었고 일 년 내내 싫증 내지 않고 된장찌개만 끓였다. 시어머니는 겨울만 아니면 밭에 떨어진 공처럼 늘 몸을 둥글게 말고 밭에 앉아 있었다. 점심 때면 집에 들어와 물에 말아 훌훌 밥을 뜨고 막걸리에 설탕을 넣어 새끼손가락으로 휘휘 저은 뒤 달게 마시곤 이내 또 밭으로 향했다.     

   피부가 하얀 엄마 밑에서 자란 나는 어릴 적 소꿉장난 이후로는 흙을 만져 본 일이 없었다. 호박이며 고추, 콩이 올망졸망 열리고 아기들처럼 쑥쑥 자라는 것이 신기했다. 시장에서 돈 주고 사던 것들을 작은 씨앗들을 뿌려 직접 만들어내는 시어머니가 당신이 믿는 창조주 같아 보였다. 시어머니 혼자 밭일을 하게 두는 것은 며느리의 본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의무감과 별개로 나도 생명체를 틔우고 키워 가족들에게 먹여 보고 싶었다. 그러나 밭일은 소꿉놀이의 어른 버전이 아니었다. 아직 새 신부 티를 벗지 못했을 때 호기롭게 밭일에 덤볐다가 나는 며칠을 앓았다. 먹고살기 빠듯한 집 며느리가 주제를 모르고 흙멀미를 했다. 며칠을 계속 토하다가 나중에는 똥물까지 게워냈다. 남편은 약을 사다 주며 어머니가 하면 될 일인데 뭐 하러 밭에 따라갔냐고 타박을 했다. 시어머니는 마누라 걱정만 하는 아들을 한번 힐끔 쳐다봤지만 당신이 말리지 않은 게 잘못이라고 아들에게 미안해했다. 아무리 시어머니가 말려도 그 후로 몇 번 더 쪼그리고 앉아 호미를 들어 봤지만 역시 웩웩 구역질이 났다. 이기적이고 편리한 체질이었다.  

   “됐다. 너는 나오지 말아라. 코딱지 만한 밭에서 캐 봐야 얼마나 캔다고.”

   빈말이라도 같이 가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일요일에 캐세요. 애 아빠 있을 때. 혼자서는 힘드세요.”

   “아범도 일요일에는 쉬어야지. 힘들면 쉬었다 내일 캐면 되지. 신경 쓰지 마라.”

   젖은 수건을 머리에 얹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시어머니가 집을 나서고 제사 때 쓸 그릇을 닦으려고 찬장을 여는데 큰 소리가 들렸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쌍심지를 켜고 덤비는 겨? 아니, 며느리는 뒀다 어디 쓰려고 시어머니 혼자 밭에 가냐고 말한 게 뭐가 잘못이야?”

   “그래, 너는 며느리 부려 먹어서 좋으냐? 내가 내 며느리 밭일 안 시킨다는데 니가 뭔데 참견이야?”

   “며느리를 부려 먹어? 누가 그래? 내가 며느리 부려먹는다고? 그럼 새파란 며느리 두고 다 늙은 시에미가 밭에 나가야 하나?”

   “새파란 며느리가 하든, 다 늙은 시에미가 하든 늬 집 일은 니가 알아서 하고 남의 집 일에 이렇다 저렇다 입방아 찧지 말라고!”

   다 늙은 시어머니가 혼자 밭일을 하다니 요즘 며느리들은 팔자가 좋다고 동네 끝집 할머니가 시어머니를 편든답시고 한 마디 했다가 시어머니가 얼마나 대차게 쿠사리를 줬는지 싸움이 난 거였다.  

   “어디 남의 며느리 흉을 봐, 흉을. 원 같지 않아서. 며느리 구박한다고 남들이 지 욕하는 건 모르고.”

   형제자매 없이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랐지만 나는 애들로 북적이는 집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무한 결핍과 경쟁에 노출돼 있었다. 뭐 하나라도 더 먼저 더 빨리 더 많이 집어 먹기 위해 날마다 올림픽 경기를 치르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 지갑 속 돈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내 것이었다. 서두를 일도, 빼앗길 일도 없었다. 야곰야곰 재산을 탕진해 가는 중에도 엄마는 나에게 쓰는 돈은 아끼지 않았다. 원하는 만큼 맛있는 것, 예쁜 옷, 부러지지 않은 크레파스를 가질 수 있었다.

   친구들이 유일하게 부러웠던 때는 싸움이 났을 때였다. 방금 전까지 친구의 입에서 온갖 험담으로 까이던 언니 오빠가 동생 편을 들기 위해 달려왔다. 사실 그 언니 오빠야말로 가장 악독한 핍박자였는데도 제 동생이 남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는 구원자 노릇을 제대로들 했다. 내게는 핍박자가 없는 대신 구원자도 없었다. 엄마 역시 내가 엄마의 구원자면 구원자였지 엄마가 나의 구원자 노릇을 해 주지는 못했고 설령 언니 오빠 대신 엄마가 구원자로 나섰더라도 그것은 왠지 불공정하고 창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뜻밖에도 시어머니가 내 구원자 노릇을 자처했을 때, 나는 좀 감동했던 것 같다. 진심으로 결혼하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내가 불리할 때 나타나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었다. 시어머니는 엄마다웠다. 내가 가져 보지 못한 엄마였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시어머니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의지했다. 시어머니에게 절대 가치인 가족조차도 시어머니 마음속에서 예수님과 일 등 자리를 두고 다투거나 일 등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다. 교회와 관련된 모든 것은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집안의 신성하고도 오래된 전통이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믿는 신이 없다는 것을 반은 안타까워했고 전도가 쉬운 조건이라는 점에서 반은 다행스러워했다. 나는 성경이나 목사님 말씀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좋은 말이겠거니 생각했다. 동네 사람들이 해가 되는 말을 듣기 위해 일요일마다 모일 리는 없었다. 좋은 말이 아니라면 목사님께서 그토록 확신에 찬 우렁찬 음성으로 신도들에게 호통칠 리가 없었고 매번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몇 명씩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믿음이 부족한 탓에 헌금을 낼 때마다 저 돈이면, 하는 예수님이 노하실 생각을 잠깐씩 했다.

   일요일 새벽마다 교회에 가는 일은 며느리가 되어서 하게 된 일 중에 가장 힘들고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축에 속했다. 아침잠, 바로 아침잠 때문이었다. 나는 밤늦게까지 깨어 있는 것은 힘들지 않았으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매일매일 해도 똑같이 힘들었다. 명절이면 전을 부치고 송편을 빚는 일도 밤에 하고 싶었지만 당연히 그럴 순 없었다. 만약 교회에 일요일 오후나 아무 날 오후에 가야 했다면 일주일에 하루가 아니라 이틀, 사흘을 가도 괜찮았을 것이다.      

   

   남편이 도저히 출퇴근할 수 없는 거리로 발령이 났다. 큰애 재현이가 갓 돌을 넘겼을 때였다. 남편만 보낼 것이냐 나와 재현이까지 따라갈 것이냐가 문제였다. 남편만 보내면 관사의 방 한 칸으로 몸만 들어가면 되었지만 나와 재현이까지 같이 가려면 방을 얻어야 했다. 아직 신혼이었던 탓에 고민이 길어졌다.    재현이를 가져 입덧이 심했을 때 눈만 뜨면 복숭아가 먹고 싶었다. 우리 집 마당에는 철지난 못난이 참외만 몇 있었지만 여름이었고 복숭아는 흔했다. 커다랗고 물렁물렁한 황도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껍질을 죽죽 벗긴 후 우적 깨물면 달콤한 복숭아 물이 턱으로 줄줄 흘러 옷을 적시는 상상이 떠나지 않았다. 임신을 하면 아기와 함께 식탐도 생기는구나 싶었다. 복숭아만 먹으면 입덧이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과일을 돈 주고 사 먹는 것은 아무리 오 대 독자의 후예를 임신한 며느리라도 주저되는 일이었다. 결국 재현이는 과일이라고는 마당 귀퉁이에서 딴 못생긴 참외만 맛보고 태어났다.

   평생 복숭아를 먹을 때마다 그때를 떠올리곤 하지만 그 시절 복숭아를 못 먹어 슬펐던 것은 아니었다. 통장 페이지가 넘어가며 다달이 커지는 숫자를 쳐다보는 게 그렇게 재밌었다. 우리 통장은 입금만 할 줄 알지 출금은 할 줄 모르는 일방통행 통장이었다.

   “에미야, 애비 혼자 가면 일 년 후에 바로 돌아올 수 있다는데 너하고 재현이는 그냥 여기 있으면 어떻겠냐? 괜히 몇 년씩 객지로 돌게 되면 어쩌냐.”

   “어머니, 재현이랑 이 사람도 같이 갈게요. 어머니한테는 죄송한데 일 년 있다가 더 길어질 것 같으면 그때 재현이랑 재현이 엄마는 돌아오더라도 일단 같이 갈게요.”

   시어머니를 혼자 남겨 두고 모아 둔 돈을 출금해야 하는 선택이었다. 전날 밤 남편이 물었다.

   “관사 신청하려면 내일에는 해야 돼. 당신은 재현이랑 여기 있는 게 낫지 않겠어? 어머니 혼자 두는 것도 그렇고 당신 혼자 객지에서 재현이 키우면서 살림하는 거 너무 힘들 것 같은데. 남의 집에 방 하나 얻어 사는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눈치 볼 일도 되게 많더라고. 내가 주말마다 올게.”

    재현이는 나보다 시어머니 손길에 더 자주 방긋방긋했다. 하얀 기저귀를 방망이로 두드려 빨고 너는 일도 시어머니가 다 해 주었다. 내가 하는 육아라고는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가는 것 정도지 목욕조차도 시어머니와 함께 하거나 시어머니 혼자 했다. 살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시어머니는 살림의 주도권을 쥐고 있길 원했고 나도 넘겨받길 원하지 않았다. 이것 하라면 하고 저것 하라면 하는 게 편했다. 책임질 일이 없었다.

   “주말마다 어떻게 와요? 지금도 툭하면 출동인데. 그리고 재현이가 이제 막 사람 알아보는데 아빠 얼굴도 못 보고.... 전세방 얻으면 그 돈은 나중에 돌려받잖아요? 이자가 아깝긴 하지만 나는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정 남으라면 남겠지만.....”

   사실 재현이 핑계를 댔지만 다른 이유들이 있었다. 교회에 다닌 지 이 년 정도가 지났지만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일은 제법 손에 붙어 시키는 건 다 할 수 있게 된 살림에 비하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아무리 좋은 말도 자꾸 들으면 싫다는데 이 년 넘게 매주 목사님 말씀을 듣다 보니 초창기에 조금 있던 감흥마저 없어졌다. 에피소드만 조금씩 바뀔 뿐 다 똑같은 내용인데 부자연스럽게 고양된 목소리로 아멘을 외치는 사람들이 조금 무서워졌다. 반대로 주일 점심 식사 준비를 거드는 것처럼 해야 하는 역할은 늘어서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야금야금 길어졌다. 재현이는 언제든지 시어머니가 돌봐줄 뿐 아니라 며느리의 교회 활동도 적극 밀어주니 나야말로 교회에 봉사하기 딱 좋은 젊은 새댁이었다.

   그런 건 다 괜찮은 척할 수 있었다. 하라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도 활동만은 아니었다. 인근 동네를 가가호호 방문하여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술 취한 엄마처럼 조금도 익숙해질 기미가 없었다. 문을 두드리고 ‘하느’까지만 꺼내도 가라는 말은 물론이고 꺼지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재수가 없다고 쫓아내는 여자도 있었고 집으로 들어오라고 잡아끄는 남자도 있었다. 쫓겨나도 무서웠고 들어오라면 더 무서웠다. 무엇보다 내가 믿지 않는데 내 전도에 넘어올 사람이 생길 리 없었다.

   “신도님은 믿음이 부족한가. 어째 한 명도 주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할까. 재현이를 권사님께 맡기지 말고 업고 나가 봐요. 그럼 좀 다르지 않을까. 애 업고 있으면 문전박대는 안 당할 걸. 아니면 누구를 좀 붙여 줄까. 어떻게 하는지 보고 뭐가 잘못됐는지 알려줘야겠네.”

   몇 달째 전도 활동의 성과가 전무해도 시어머니가 워낙 열과 성을 다하는 덕에 살짝 긁히는 정도의 타박상으로 넘어가곤 했었는데 이제는 정말 예수님이 곤장을 치려고 했다. 재현이를 업고 열혈 신도의 감독 아래 이 집 저 집을 도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시어머니에게 교회를 그만 다니겠다고 말해 볼까. 애초에 시어머니는 나와 남편에게 교회에 가자고 강권한 적은 없다. 밥 먹을래, 똥 눌래 묻지 않듯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갈래, 말래 물을 필요가 없었다. 다행히 남편은 교회에서 늘 졸았다. 삼십 년 가까이 주님을 섬기고도 믿음의 크기는 나와 비슷했다. 전도 활동에서 놓여난다면 객지에서 고생 좀 하는 것 정도야 감지덕지다 싶었다.       

    드디어 우리 통장은 출금이란 것을 해 봤다. 적금을 깨면 주인집과 독립된 독채를 얻을 수 있었겠지만 가족이 큰 병에 걸리지 않은 이상 그럴 수는 없었다. 이사를 하고 첫 일요일 아침은 짐 정리가 덜 돼 어수선한 방일망정 저절로 눈이 떠질 때까지 자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재현이가 깨면 남편이 돌보고 나는 더 잔다는 야심 찬 계획이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희망과 기대였는지 아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빠 손과 좁은 방이 낯선 재현이는 자주 큰 소리로 울었고 아침잠은커녕 방문 밖에서 들리는 집주인의 한소리에 모욕감인지 수치심인지 부끄러움인지, 혹은 그 모든 것이 섞인 것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놓여야 했다.

   “이래서 갓난애 있는 집에는 내가 방을 안 주는데, 순경이라고 해서 줬더만.......”

   재현이는 평일이면 공부하는 주인집 아이들을 방해하고 일요일이면 주인집 식구들의 늦잠을 깨우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갔다. 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은 경찰 남편을 기다리며 하루 종일 재현이와 씨름을 하다 보면 시어머니와 마당이 있는 넓은 집으로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예수님이 진짜 벌을 내린 것 같았다. 어떤 날은 우는 재현이 입에 손수건을 물렸고 울다 지친 재현이가 잠들자 내가 울었다.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나는 시어머니 집으로 먼저 돌아왔고 남편은 다행히 일 년만 채우고 돌아왔다. 일 년 치 은행 이자를 날리고 개고생만 했지만 배운 바가 컸다. 부처님을 믿는 사람도 교회에 오도록 전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도 활동 따위, 이제는 무섭지 않았다. 그 후 거진 십 년을 나는 예수님의 진실한 종으로 살았지만 마음속 믿음의 크기는 아무리 모아도 자꾸 빠져나가 좀처럼 늘지 않는 저금처럼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불행 중 다행인지 남편이 교회라면 치를 떨게 되는 사건이 터졌다.

   “재현 엄마, 우리 적금 만기 돼 가지 않나?”

   “만기 아직 좀 남았는데, 왜요?”

   “저기....... 재현이 고모가 돈이 급하대.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고.”

   서울로 시집간 재현이 막내 고모 이야기였다. 남편의 여동생은 누나들과 아주 달랐다. 안 좋은 쪽으로 달랐다. 남편은 여동생이 서울 물을 먹더니 바람이 들어서 그렇다고 했다. 고모부는 아예 서울 사람이라 평생 서울 물을 먹어선지 좀 많이 이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집간 시누이를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가끔 쓸모도 없는 조잡한 서울 물건들을 갖고 친정에 와서 온갖 생색과 서울 사람 티를 내고 제 남편의 사업이 얼마나 잘 되는지 대한민국 돈은 죄다 버는 것처럼 자랑질하다가 김치며 고추장이며 감자 한 알까지 싸가는 게 꼴불견이긴 했지만 일 년에 한두 번인데 별꼴 다 구경하는구나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돈 문제라면 달랐다. 완전히 달랐다. 복숭아 꿈을 꾸면서도 하나 안 사 먹고 모은 돈이었다.

   시어머니는 막내 시누이를 유독 예뻐했다. 이유는 딱 하나였다. 열심히 예수님을 섬기다 열심히 예수님을 섬기는 남편을 만나 줄곧 함께 열심히 예수님을 섬기는 것. 예수님이 맺어 준 인연이라며 부부가 쌍으로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모습을 흐뭇해했다. 남편은 반대로 시누이 부부를 아주 못마땅해했다. 쥐뿔도 없는 것들이 일은 안 하고 밤낮 교회에서 노닥노닥하며 돈 아낄 줄도 모른다고 어쩌다 집에 오면 싫은 기색을 감추지 않아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어머니, 저는 이 사람한테 미안해서라도 돈 못 보냅니다. 그리고 걔들 하는 꼴 좀 보세요. 없는 살림에 돈 벌 생각은 않고 맨날 예수님 타령이나 하고 바람은 잔뜩 들어서 남 보기 그럴싸한 일만 하려 하잖아요. 쥐뿔도 없는 것들이 잘난 척할 때부터 이 꼴 날 줄 알았어요,”

   처음으로 남편이 시어머니 앞에서 교회를 비난했다. 나중에 돌이켜 봤을 때는 나에게 할 만큼 했다는 명분을 쌓기 위한 제스처가 아니었나 의심이 들곤 했다. 딱 한 번 큰소리 내고 돈을 내어주었으니까. 시어머니 역시 기죽지 않고 돈을 받아냈다.

   “예수님 타령이라니? 정성으로 예수님 섬기는 걸 왜 그렇게 말하는 거냐? 그럼 너는 이 에미가 교회 다니는 것도 못마땅하냐? 우리가 누구 덕에 이만큼 먹고사는데 그런 소릴 해? 너 내가 수도 없이 말했지? 너 다섯 살 땐가 지붕에서 떨어져서 병원에서도 다 죽을 거라고 했었어. 그때 내가 사흘 밤낮을 울면서 기도했다. 너만 살려 주시면 내 평생을 드리겠다고. 내 기도로 예수님이 너 살려 준 거야. 애비도 없는 네가 여적 무탈하게 살아온 게 다 누구 덕인지나 아냐? 물에 빠진 놈 건져 놓으니 뭐 어쩐다더니 은혜를 모르고.... 그리고 어쩌겠냐,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는데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겠냐. 돈은 이번 딱 한 번이다. 딱 한 번만. 걔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다시는 이런 말 안 한다. 이자도 꼬박꼬박 줄 거고 원금도 금방 갚을 게다. 에미야, 너무 걱정 말아라.”

    결국 적금을 해지했고 내 손으로 한 번 만져보지도 못하고 돈은 시누이에게로 보내졌다. 오십 년 전 팔백만 원은 지금 돈으로 얼마일까?

    시누이에게 돈을 보내고 시어머니에 대한 내 존경심은 상당히 훼손되었다. 돈이 아까운 이유도 있었으나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시어머니를 휘감고 있던 아우라가 말끔히 사라졌다. 차라리 떼여도 어쩔 수 없다, 가족이니 그냥 한 번 도와줄 수도 있지 않냐고 했으면 돈은 잃었을망정 시어머니에 대한 내 신망은 유지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시누이가 이자는 물론 원금도 꼬박꼬박 갚을 거라는 시어머니의 주장은 마당에서 보이는 동해바다가 갈라지고 우리 집 수도꼭지에서 포도주가 콸콸 흐를 거라고 믿는 것임을 당신만 몰랐다.

    나는 결국 며느리였다. ‘딸처럼’이라는 말은 이미 딸은 아니라는 뜻이다, 딸만 못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너무 늦게 알았다. 동네 사람이 나를 흉보면 내 편을 들어주지만 당신의 딸과 나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면 이유 불문 무조건 당신 딸 편을 드는 시어머니는 더 이상 지혜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았다.   

   시누이가 첫 이자를 보내기로 한 날을 전화 한 통 없이 넘기자 남편이 저녁 밥상을 앞에 두고 교회를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다. 화를 내지도 않고 언성을 높이지도 않은 채, 남편의 목소리는 한겨울 후드득 떨어진 빗방울이 뒷목을 타고 허리께까지 흘러내리는 것처럼 차갑고 오싹했다. 워낙 말이 없고 무표정한 남편이긴 했지만 처음 보는 모습이었고 그 모습의 원인이 시누이이길 망정이지 나라면 참 끔찍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끝내 수저를 들지 않았다. 먼저 수저를 들었던 시어머니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일주일에 한 번 식탁에 오르는 오징어무침,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인 야채들 속에 꽁꽁 파묻힌 오징어 때문에 우리 가족이 아니라면 야채 무침으로 볼 오징어무침을 눈앞에 두고 남편의 눈은 화로 가득 차 있었다.   

   며칠 뒤 시누이는 고속버스로 뭔가를 보내겠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전화가 온 날부터 다음 날 저녁까지 아들의 퇴근을 기다리면서 득의양양했다.

   “거 봐라, 그냥 이자 떼먹을 애는 아니라 했지 않냐. 예수님 앞에서 거짓말할 리 없다니까 니들은 믿지를 않고.”

   남편은 출근하면서 혹시나 하는 기대조차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래, 설마 첫 이자부터 모른 척하겠어? 자기 오빠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아냐고 나한테 몇 번이나 말한 게 누군데. 돈 잘 번다고 자랑질했던 게 낯부끄러워서라도 입 딱 씻지는 못하겠지. 뭘 보냈을까. 다음부터는 뭐 보내지 말고 꼭 돈으로 이자를 쳐 줬으면 좋겠는데.

  남편은 빈손으로 퇴근했다. 아무것도 손에 든 것이 없었다. 애타게 남편과 눈을 맞추려고 이리저리 시선을 보냈지만 남편의 눈길에 각도를 맞출 수 없었다. 남편은 역시 입 대신 눈으로 채근하는 시어머니만 잠깐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밥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필이면 그날에는 이웃들로부터 흔하게 얻어먹던 생선 한 토막도 없었다. 변함없이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감자볶음, 김치, 연탄불에 갓 구운 김이 있었다. 바삭바삭한 김을 빼면 남편이 점심에 먹었을 도시락과 다른 게 없는 상차림이었다. 남편은 한시라도 빨리 체면을 회복하고픈 시어머니의 채근을 막돼먹은 자식처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밥만 먹었다. 내가 설거지를 시작하자 시어머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싱크대 물을 틀어 놓은 채 방문 앞에서 귀를 기울였다.

   “그 미친 게 물을 보냈어요. 물을. 석유통으로 두 통을요.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미치려면 곱게 미치든가. 예수님 은혜 입은 물이라고 어디 외국에서 퍼 온 물이래요. 가져간 돈도 교회에 바쳤다는데요. 팔백만 원 바치고 물 몇 통 얻었대요. 두 연놈들이 제정신이 아니에요. 아무리 어머니라도 이제 제 앞에서 그것들 편들면 저 못 참아요. 재현이 엄마한테 뭐라 하실 거예요?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교회는 그렇게 끝났다. 일요일이면 어머니는 재현이와 재영이만 데리고 교회에 가셨다. 교회에 뭐라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에선 가정예배도 더 이상 없었다. 시누이는 팔백만 원을 바치고 외국물을 얻었고 나는 팔백만 원을 잃고 결혼한 지 십이 년 만에 일요일 아침잠을 얻었다.     

   

   시어머니는 한여름에 돌아가셨다. 평소와 같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깨어나지 못했다. 병원으로 옮겼고 일주일 만에 병원에서 나갔다. 아흔보다 백에 가까운 나이였기에 마지막 일주일 동안 방문한 손님들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성급하게 호상을 입에 올려도 아무도 아차 하지 않았다. 장마철이었지만 다행히 비가 갠 날 발인을 했다.

   마지막으로 뵌 시어머니는 잠깐 낮잠을 자는 듯 평화로웠고 감고 있어도 다부진 눈매는 그대로였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낮잠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던가. 늙으면 흔히 하는 게 잠투정이다. 젊어서는 시간이 없어서 못 잤는데 늙어서는 잠이 없어서 못 잔다. 그래선가 시어머니는 잠이 적었다.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시어머니는 깨어 있었다. 아침밥을 먹기 전부터 밭에 있었다. 밭일을 한탕하고 아침밥을 먹고 나면 방망이를 힘차게 두드려 빨래를 했다. 방망이로 두드릴 빨래가 없으면 빨랫줄이 높아 쉽지 않을 텐데도 이불을 널어 햇빛을 쪼였다. 해가 넘어가 까치발을 들고 이불을 걷을 때면 시어머니는 이 무거운 이불을 이 높은 데다가 어떻게 널었을까 궁금했다. 비가 와 밭에 나가지 못할 때는 없는 일을 만들어서라도 했다. 빼곡한 재영이 책장의 책들을 키순서대로 다시 꽂고 먼지를 말끔히 닦았고 아직 때 묻을 데가 남아 있는 아이들 운동화를 솔로 박박 문질러 빨았다. 냉장고의 반찬통을 모조리 꺼내 아까운 마음에 남겨 뒀지만 먹지 않을 것이 뻔한 것들을 비우고 투명한 냉장고 칸막이도 물청소를 했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 우리 애들 입성이 유독 깨끗하고 낡은 시골집과 오래된 살림살이들이 반질반질 윤이 났던 것은 전적으로 시어머니 덕분이었다. 감사할 일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 맘먹고 하는 큰일은 당연히 모조리 시어머니 일이었다. 엄청난 양의 재료를 사서 다듬고 씻고 재워서 김장김치나 각종 장들을 담그고 항아리를 땅에 파묻거나 장독대에 척척 들이는 것도 모두 시어머니 일이었다. 나는 주로 준비단계와 마무리 단계에서 잠깐 꾸는 꿈처럼 끼어 있는 짧은 시간 동안 거들뿐이었다.

   “내가 할 테니 너는 들어가 쉬어라.”

   말이 적었던 시어머니의 살아생전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소용없는 말이었다. 시어머니가 부스럭부스럭 일을 하는데 들어가 쉴 수 있는 며느리가 있을까. 요즘은 그러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고 하지만 내가 며느리이던 시절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밭일을 돕지 못하는 것만 해도 교실에서 누군가의 우윳값이 없어져 가방 검사를 앞둔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는데 심지어 집안일에서조차 그럴 수는 없었다.            

   “어머니도 좀 쉬세요.”

   시어머니 살아생전 내가 가장 많이 한, 소용없는 말인데 시어머니가 쉬어야 며느리도 쉬지요,라는 뜻이었다. 소꿉놀이하듯 내킬 때만 살림을 했던 엄마 밑에서 살림을 돕지 않고 자란 나는 시어머니의 살림 속도와 실력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시어머니는 그런 나를 탓하지 않고 차근차근 천천히 가르쳤다,

   “너네 집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다만 밥상을 차릴 때는......”

   “너네 집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다만 제사 음식을 할 때는.....”

   “너네 집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다만 빨래를 삶을 때는.....”

   “너네 집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다만 남은 음식들은.....”

   항상 종을 친 후에 밥을 주면 종소리만 들어도 개가 침을 줄줄 흘린다던가. 나도 그랬다. ‘너네 집에서는’ 이 두 마디는 일종의 시그널이었다. 내가 배울 것이 등장하는 타이밍이니 시어머니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신호였다. 배울 게 많다는 것은 내가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그런데 수치심과 억울함까지 같이 줄줄 흘렀다. ‘너네 집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다만’, 이 시그널의 앞부분만 삭제하거나 변경해 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옳은 소리를 듣고도 짜증을 내는 사춘기적 애들 같지 않았을 텐데.      

   엄마는 나에게 애비 없이 자랐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하고 행동을 삼가라고 가르쳤다. 쓸데없는 말이나 행동으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최고라고 했다. 내가 눈에 띄면 아빠가 없는 것도 눈에 띈다고 했다. 유일한 예외가 공부와 미모였다. 공부를 눈에 띄게 잘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라고 했다. 눈에 띄게 예쁜 것도 공부 못지않게 좋은 일이라고 했다. 공부를 잘해서 들어간 여고에서 큰 키 때문에 배구선수 제안을 받았을 때 엄마는 펄쩍 뛰었다. 운동선수들이라고 아빠가 없는 건 아닐 텐데도 그랬다. 엄마의 지침은 변덕과 응용이 심했지만 어쨌든 변하지 않는 기조는 공부와 미모 빼놓고는 튀지 말라, 주목받지 말라였다.

   남편도 나와 비슷한 가르침을 받고 자란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남편은 체격은 왜소했지만 신성일을 닮았단 말을 심심찮게 들을 만큼 미남자였다. 지방 명문고를 졸업했고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대학도 다녔다. 누나 둘, 여동생 하나 사이의 오대 독자였으니 그 떠받듦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오만하기 쉬운 조건을 두루 갖췄다. 그럼에도 남편은 새카만 머리카락 속에 어쩌다 생긴 흰 머리카락처럼 뽑혀 나갈 것이 두려워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다. 무시무시하게 과묵해서 술이 한 잔 들어가지 않으면 석유가 떨어진 난로처럼 조용했다.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신혼 초 전국경찰노래자랑이 있었다. 남편이 지역 대표로 뽑혔다고 했다. 노래라니, 말도 안 하는 사람이 노래라니, 그것도 무대에 서서 노래를 한다니, 서지도 못하는 아이가 뛴다는 말 같았다. 그런데 남편은 전국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무대에서 남진의 노래를 부르는 남편은 다른 사람이었다. 가볍고 잘 웃었다. 리드미컬했고 간드러지는 바이브레이션이 끝내줬다. 가족석에 앉아 노래하는 남편을 생전 처음 보는 사람 보듯 구경하며 저 모습과 평소 모습 중 무엇이 남편의 진짜 모습일까 궁금했다. 만약 노래하는 남편이 진짜라면 나는 지푸라기로 만든 가짜 옹고집과 사는 거였다. 도사님이 나타나 지팡이로 툭 두드리면 무겁고 과묵한 가짜 남편은 사라지고 가볍고 잘 웃는 남진 같은 남편이 남는 것일까 싶었다.     

   

   재현이와 재영이는 두 살 터울이지만 재영이와 재훈이는 무려 일곱 살 터울이 났다. 재훈이는 예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불발탄이었다. 그 불발탄을 쏘아 올린 것은 시어머니였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오대 독자인 아들을 키워선지 시어머니는 집안에 남자가 많아야 한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남편이 부인을 하나 더 맞이하지 않는 한 집안의 남자를 늘리는 방법은 내가 아들을 낳는 것뿐이었다. 재현이가 태어난 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맞먹을 만큼 시어머니에게 기쁜 일이었다. 재영이를 낳았을 때 아들 하나 딸 하나니 딱 좋다고 하면서도 시어머니는 판돈을 크게 건 도박꾼이 바라던 마지막 패를 얻지 못한 것처럼 스트레이트 아들이 아닌 것에 대한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재영이가 꽤 자랐을 때 아들을 하나 더 낳으라는 시어머니의 성화가 시작되었다. 마감 시간 임박에 조급해진 시어머니에게 두 번째 손자는 예수님의 부활과 맞먹는 기쁨일 터였다.

   “에미야, 내가 다 키워 줄게. 너는 낳기만 해라. 내가 오대 독자 네 남편 키우면서 평생 부러운 게 아들 여럿인 집이었다. 너도 나이 들면 내 마음 알게 된다. 아들이 둘인 거와 하나인 거는 천지차이다, 천지차이야.”

   고민을 좀 하긴 했었다. 시어머니가 아들 여럿인 집을 부러워한 때문은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시어머니에게 고분고분한 며느리라고 해도 시어머니를 위해 아들을 더 낳을 정도는 아니었다. 서른을 지난 나이가 당시에는 노산이기도 했고 아이를 더 낳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아닌지 판단이 안 된다는 소소한 이유 외에 결정적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만약 내가 아들을 더 낳지 않는다면 재현이는 육 대 독자가 되는 것이고 그럼 남편보다 더 귀한 존재로 더 큰 부담을 안고 살게 되는 걸까. 남동생이 생기면 재현이는 남편보다 가볍게 살 수 있을까. 혹시 막내 시누이처럼 보살펴야 하는 동생이 하나 늘어 두고두고 골치를 썩이게 되는 건 아닐까. 시소의 양 끝에 재현이와 재영이가 앉아 있었다. 당연히 재영이는 덜렁 들려 허공에 떠 있었다. 재현이가 적당히 힘과 무게를 조절하여 재영이를 올렸다 내렸다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시소가 쿵 하고 재영이의 엉덩이가 아프도록 바닥으로 떨어질 일은 없다. 반대편에 앉은 재현이의 제어는 자기처럼 묵직하고 안정적이고 믿음직스러웠다. 그런데 재영이 쪽에 한 명의 동생을 더 앉힌다면? 그래도 안정은 유지될까? 재현이가 시소의 상태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는 건 아닐까. 재영이도 시소가 불규칙적으로 흔들흔들해서 불안해지지 않을까? 아니면 시소 양쪽의 무게가 비슷해져 오히려 힘을 덜 들이고 재미나게 쿵덕쿵 시소를 탈 수 있게 될까?

   남편과 나는? 남편은 아들을 더 낳고 싶어 할까? 아들이 더 생긴다면 오대 독자의 최대 의무를 다해 좋을까, 먹여 살릴 입이 하나 더 늘어 부담스러울까. 나는 어떨까. 늦둥이가 생겨 좋을까, 졸업했다고 확신한 갓난애 육아를 몇 년 만에 기쁜 마음으로 다시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막내가 딸로 태어난다면? 존재 자체가 이미 ‘잉여’가 되어 버리는데 재현이만큼은 아니더라도 재영이만큼이라도 귀하게 여겨질 수 있을까? 설사 아들이라고 해도 대학에 입학할 때 남편은 이미 환갑일 텐데 공부를 끝까지 시킬 수 있을까?

   임신인지 아닌지 의심하면서 석 달을 보낸 것을 두고 시어머니는 나 역시 아이를 더 낳을 마음이 있었던 거라며 당신의 성화 때문에 아이를 가졌다는 부담을 덜려고 했다. 재현이가 아홉 살, 재영이가 일곱 살인 그때 남편은 형사 생활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볼 계획을 막 실천하려던 참이었다. 최악으로 생계가 불안하던 때였다. 병원에 가서 임신을 확인하면 그 자리에서 지울 것이 뻔했다. 커다란 박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영원히 쪼개지 않으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겠지만 영원히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금은보화가 나올까, 온갖 오물이 쏟아질까. 그런 고민 끝에 재훈이는 박을 깨고 나왔다. 박 속에 들었던 것은 확실히 금은보화였다.  

    애 셋을 낳고 키우는 내내 남편은 재투성이 신데렐라 같았다. 말없이 일하고 도시락을 먹고 오토바이를 타고 돈을 벌었다. 주는 대로 먹고 주는 대로 입었다. 회식이 아니면 늦지 않았고 모자랄 것이 분명한 용돈을 더 달라고 하지 않았다. 빼어난 노래 실력 덕분에 가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신데렐라로 변신해 초대 가수로 파티에 갔다가 자정이 되기 전 돌아오기도 했지만 바다가 지천인 곳에 살면서 남들이 다 가는 낚시 한 번 가지 않았다. 주말이면 잠을 자거나 프로야구를 보거나 오토바이 뒷자리에 한 명씩 애들을 태우고 바닷가 도로를 한 바퀴씩 돌았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좀 편해졌다. 시어머니가 도와주던 일까지 독박을 쓰게 된 건 맞지만 적당히 내버려 두기도 하고 미루기도 하고 바꾸기도 했다. 호박이나 고추, 깻잎은 여전히 밭에서 따 먹었지만 감자나 옥수수는 사 먹었다. 드라마를 볼 때 텔레비전 볼륨을 키웠고 텔레비전을 켜둔 채 잠들기도 했다. 친구들의 전화가 집으로 오기 시작했고 동창회에 참석하는 횟수도 점점 늘었다. 동태찌개를 끓일 때 꼬불꼬불한 내장은 빼고 토막 낸 몸통만 넣었고 김치볶음밥을 할 때 냄비 바닥이 타더라도 기름을 조금만 넣었다. 된장, 고추장은 세 번인가 더 담근 후부터 사서 먹었다. 김장도 절인 배추를 사서 삼십 포기만 했고 여름이면 러닝만 입고 밥을 했다. 믹스 커피를 타서 마신 후 천천히 설거지를 해도 괜찮았고 장독대 항아리 뚜껑을 잘 닫았는지 조바심 내지 않았다. 생활비 지출이 꽤 늘긴 했으나 그때는 결혼 생활 햇수만큼 여유가 생겼던 터라 별로 아쉽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남편도 좀 변했다. 멀리 사는 늙은 누나들에게 전화를 자주 했고 보고 싶어 했다. 바다가 보이는 집 때문인지 평소에 소원하던 친척, 지인들이 여름이면 불현듯 가까운 척했을 때 남편은 말은 안 했지만 집에서 누가 자고 가는 것을 많이 불편해했다. 나 역시 집수리를 하기 전에는 온수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화장실도 재래식인 낡은 집에 손님이 오는 것이 창피했지만 일 년에 한 번 온다는 것을 거절한 명분은 없었다. 그랬던 남편이 내 생각은 묻지도 않고 조카들에게 어머니 모시고 여름에 피서 오라고 봄부터 전화를 했다. 여전히 말수가 적었지만 뉴스를 보거나 야구를 볼 때 재현이나 재훈이가 함께 보면서 떠드는 것을 반기는 눈치였고 막걸리를 즐기던 사람이 가끔 맥주를 사 와서 내게도 한 잔씩 따라주었다. 남편이 변했다는 결정적 증거는 여동생을 대하는 태도였다. 막내 시누이는 시어머니 장례식에서도 염장을 질렀다.

   “언니, 의료원은 별론데 왜 의료원에다 모셨어요? 대학 병원에다 입원시켰으면 장례도 거기서 했을 거 아니에요. 여기는 대학 병원이 없나? 아이고, 우리 엄마 불쌍해라.”

   “아니, 여기는 음식이 아주 별로네. 손님들 보기 창피해서 어째. 언니, 이게 음식 다 나온 거예요? 장례식 비용 아낀 자식은 두고두고 후회한다던데.”

   보다 못한 늙은 언니들이 니가 제일 창피하다고 쥐어박고 나서야 막내 시누이는 입을 한 발 내미느라 입을 다물었다. 그랬던 막내 시누이마저 가끔 보고 싶은 눈치였다. 눈치만 한 트럭인 막내 시누이가 그 틈을 놓칠 리 없었다. 더위 속에서 시어머니 상을 치른 몇 달 후 겨울이 되자 언니 혼자 김장을 몇 포기나 했냐고 전화가 왔고 다음 해 여름에는 세 딸을 거느리고 피서를 와서 방 세 개 중 두 개를 차지하고 두 밤을 자고 갔다.   

   늘그막에 손님이 많아지는 것은 성가신 일이었다. 물리지 않더라도 밤새 앵앵거리는 모기 소리에 잠을 설치는 것처럼 화를 내기에는 소소하고 그냥 있기에는 짜증스러웠다. 정육점 친구의 말을 조금만 늦게 들었더라면 남편에게 화를 내고 말았을 것이다.

   “엄마 돌아가신 지 삼 년이 넘었는데도 엄마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 늙어서 그런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엄마가 있어서 덜 슬펐던 것 같아. 그런데 엄마까지 없다고 생각하니까  엄마한테 못되게 군 것만 자꾸 생각나고 막판에 서울 병원으로 모시지 않은 것도 두고두고 후회가 돼. 뭐든 서울 게 그렇게 좋다는데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갔으면 좀 더 사셨을까 싶어서. 이제 정말 의지할 데라고는 남편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엄마가 없으니까 명절에도 형제들끼리 잘 안 모이게 되더라고. 내 편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그래서 그런가 남편이랑 싸울 때면 갑자기 막 서러워지고 그래. 내 편 없다고 나를 만만하게 보나 싶고. 웃기지? 애들을 보면 이제 다 키웠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죽으면 쟤들도 이렇게 슬플까 싶어서 또 눈물이 나고..... 주책이지 뭐야. 니 남편은 좀 어떠냐? 니 시어머니도 젊어서부터 혼자 고생고생하며 니 남편 키웠잖아? 니 남편도 지금 마음이 마음이 아닐걸. 아들은 좀 다른가?”

   나도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당연히 슬펐다. 그런데 슬픔보다 연민이 더 컸다. 아빠가 남긴 재산을 술로 다 마셔 버렸다고 하지만 어쨌든 엄마도 젊어서부터 나를 혼자 키웠다. 희고 말랑한 엄마로서는 많이 힘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비로소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심장을 조이는 일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남편과 시어머니라는 이중의 울타리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일도 힘들었는데 하물며 홀몸으로 외동딸을 키우는 일은 산사태로 무너져 내린 흙더미 밑에 깔려 금방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벼랑 끝에 아이를 안고 서서 바람에 흔들리며 천 길 아래 소용돌이치는 물살을 바라보는 기분으로 매 순간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술을 그토록 마셨던 건지도. 내가 결혼한 후에는 요양원에 들어가실 때까지 대관령 산 밑에서 혼자 사셨다. 하나뿐인 딸이 당신에게 살갑지 않아 섭섭해하면서. 슬픔과 연민과 후회와 엄마 삶에 대한 애달픔이 수채 구멍을 시커멓게 막은 머리카락 뭉치처럼 엉켰다.

   그러나 정육점 친구처럼 의지할 데가 없어졌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오히려 나를 꽁꽁 묶었던 밧줄이 조금 느슨해진 것 같았다. 한 번 쉬던 숨을 두 번 쉴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내가 벗은 의무감 때문만은 아니고 엄마 역시 내가 어떻게 해 줘도 채워줄 수 없었던 외로움과 더 이상 싸울 일은 없겠구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육점 친구의 말을 듣고 남편이 갑자기 늙은 누나들을 보고 싶어 하고 두고두고 마누라에게 구박의 빌미가 된 여동생마저 용서하게 된 것이 의지할 데가 사라진 후유증인가 싶었다. 나의 엄마는 딸에게 의지하는 엄마였지만 시어머니라면 남편 말고도 열 명의 아들쯤은 거뜬히  의지하고도 남을 엄마였다. 까무잡잡하고 단단했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제 남편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오롯이 자신이 모두의 의지할 데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 모두에는 피붙이라면 예외가 없었던 것이고?


   엄마에게 의지한다는 것, 시어머니 같은 엄마가 있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그건 죽을 때까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시어머니 같은 엄마로 사는 느낌은 내가 아주 잘 안다. 내가 바로 그런 엄마이기 때문에. 나는 아이들에게 끝까지 시어머니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마지막 임무는 시어머니처럼 빨리, 자식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고 죽는 것이다. 그 마지막 임무를 제대로 해 내지 못하면 여태까지의 모든 노력은 싹 잊히고 말년에 자식 고생시킨 엄마로 기억될 것인데 그것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최선책은 빠르고 조용한 죽음이지만 그것은 나와 남편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이다. 차선책은 길고 힘든 죽음에 대비해 돈을 모으는 것인데 그것은 다행히도 나와 남편의 의지로 가능한 일이다. 발바닥에 온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남편이 또 보일러를 틀었다. 한겨울 오토바이도 탔으면서 집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게 뭐가 춥다고, 마지막 임무 수행에 남편이 어째서 동참하지 않는지 참으로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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