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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Oct 16. 2024

남편

   보일러가 돌아간 지 십 분도 되지 않아 득달같이 달려온 아내가 설정 온도를 확 낮춰 버렸다. 빨갛게 들어왔던 영롱한 보일러 불빛도 서럽게 자취를 감췄다. 보일러를 몰래 틀 때면 테레비 소리를 낮추고 아내의 발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는데도 술에 취하듯 온기에 취해 감각이 둔해지는지 호랑이 낌새를 놓칠 때가 있다.

   오래된 집이라 방방마다 보일러를 켜고 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닥의 보일러 열선들은 다 같이 웅웅 거리며 떠들다가 다 같이 조용히 입을 다문다. 개별 행동은 못 한다. 집 안에 비로소 온기가 돌기 시작하면 온몸이 센서인 아내가 곧장 알아차리고 어디선가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오는 마징가제트처럼 등장한다. 그리하여 아내는 보일러를 켠 악당으로부터 소중한 가스를 지켜낸다. 아내가 노래 교실에 간 날은 비교적 마음 편히 보일러를 켰다 끄지만 가스 요금 고지서를 들이대는 추궁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것도 시간을 잘 재어야 한다.  

   나는 춥다. 추워도 너무 춥다. 뼛속 마디마디 원한처럼 박힌 냉기는 한여름이 아닌 이상 언제나 꿈틀대다가 겨울이면 뼈 밖으로 뛰쳐나온다. 오토바이를 타던 삼십 년 동안 온몸으로 흡수했던 지독한 냉기가 겨울이면 차가운 조영제를 주입한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찌르르 흐른다. 한반도가 아니라 내 몸속에 한파주의보가 발령된 것 같다.


   다행히 막내 재훈이가 공부를 못해 공고에 입학할 것이 확실해지자 비로소 자가용을 살 수 있었지만 정년퇴직을 고작 4년 앞둔 때였다. 그때까지 오토바이가 내 발이었다. 나만 빼고 세월이 좋아졌는지 어느 순간 사무실 동료들은 죄다 자가용을 몰았지만 재영이가 서울로 대학을 갈 거란 전망이 내 오토바이의 수명을 서울까지의 거리만큼 연장시켰다.

   한겨울이면 눈만 겨우 내놓고 온몸을 몇 겹으로 에워싼 채 오토바이를 탔다. 나보다 더 마른 남자를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한겨울 추위를 견디는 게 정말 고역이었다. 그러나 혼자 벌어 아이 셋을 키우고 홀어머니와 장모님까지 책임져야 하는 남자의 사전에는 춥다, 힘들다는 말 따위는 실려 있지 않았다. 교차로에서 파란 불을 기다리며 오토바이에 앉아 찬바람을 맞을 때면 눈앞을 가득 메운 자가용 안의 남자들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 남자들의 출근길이 우울했다면 오토바이를 탄 나를 쳐다보며 따뜻한 온기가 나오는 자가용에 앉아 있는 자신의 처지에 잠깐이라도 안도했을까. 교차로의 내 오토바이는 모두가 앉아 있는 강당 속에서 혼자 우뚝 서 있는 학생처럼 눈에 띄었다. 작년 겨울 재영이가 백화점에서 사 왔다는 내복은 퐁신퐁신한 게 얼마나 따뜻했나. 비싼 메이커 샀다고 아내가 불같이 타박한 잠바는 북극 탐험대를 덮친 한파도 막아낼 듯한 기세였다. 오토바이를 탈 때는 그런 내복도, 잠바도 없었다.


   삼복더위에 선풍기도 없이 견디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추위는 정말 여자들의 시댁 식구들처럼 지긋지긋하다. 그래도 영하 5도 아래로 기온이 내려가지 않으면 보일러를 켜지 않는다는 아내의 철칙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속수무책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아내는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콘크리트에게 사기당한 사람처럼 울분을 터뜨리지만, 작년 겨울에 얼마나 보일러를 안 돌렸는지 파이프가 얼어 터졌다. 열흘을 물도 못 틀고 터진 곳을 찾느라 바닥을 죄다 깨부쉈다. 그 사이에도 집 곳곳에서 물은 계속 배어 나왔다. 콘크리트 바닥이 물을 흡수했다가 쏟아내는 스펀지가 된 것 같았다.

   단돈 백 원에도 벌벌 떠는 아내가 이백만 원을 콘크리트에 쓰고는 화병이 났다. 가스비 좀 아끼려다가 괜히 큰돈 쓰고 고생만 했다는 타박을 내가 했다가는 콘크리트처럼 깨졌을 텐데 다행히 재현이가 해 줬다. 그래서 올겨울에는 보일러는 켜는 커트라인이 많이 올라 영하 5도가 되었다. 하지만 아침에 삼십 분, 자기 전에 삼십 분 딱 냉기만 가실 정도로만 튼다. 사람을 위해 트는 게 아니라 콘크리트를 위해 튼다. 보일러 스위치에 손을 댈 수 있는 건 아내뿐이다. 겨울에는 내 용돈을 줄이더라도 보일러를 좀 더 틀자고 해도 아내는 막무가내다. 따뜻하게 지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고 했다. 아파트 사는 사람들처럼 반팔 입고 지내겠다는 것도 아니고 낮에 삼십 분만 더 보일러를 돌리자는 게 한도 끝도 없는 일인가.

   보험도 하나 못 들어 놨는데 한 푼이라도 아낄 생각을 해야 한단다. 빨리 죽으면 괜찮지만 몇 년씩 요양원에 있거나 큰 병에라도 걸리면 죽을 때까지 돈이 얼마나 들지 알 수가 없단다. 자식들한테 손 벌리지 않으려면 아낄 수 있을 때 더 아껴서 돈을 모아야 한단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 큰 자식들이 손 벌릴 때마다 거절 못하고 퍼주다가 빈털터리가 된 친구들이 늙고 병들어서 입 싹 닦은 자식들에게 구박뎅이가 되는 걸 많이 봤다. 젊어서건 늙어서건 돈은 있는 게 낫지 없는 게 나을 리는 없다. 하지만 요양병원에 가거나 큰 병에 걸려야만 아내의 주머니 속 돈을 쓸 권리가 생긴다는 건 아무래도 억울하다. 애들도 그랬다. 어릴 때 아파야만 엄마가 맛있는 걸 사줬는데 그때는 아파서 먹을 수가 없었다고. 안 아플 때 맛있는 걸 좀 사줬더라면 참 좋았을 거라고.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술 한 병, 담배 한 갑 사는 것까지 아내의 눈치를 볼 때면 정년퇴직 후 전적으로 통장 관리를 아내에게 넘긴 게 후회된다. 하지만 그때 통장을 넘기지 않겠다고 버텼다면 결국 통장도 뺏기고 덤으로 무슨 봉변을 당했을지 모른다. 큰돈 가진 남편은 늙어서도 아내에게 큰소리칠 수 있지만 나 같은 남편은 어림도 없다는 걸 먼저 집돌이가 된  친구들을 보고 배워 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아내는 꼬박꼬박 삼시 세끼를 차려 준다. 한 번에 좀 많이 먹으면 얼마나 편하겠냐고 종종 타박을 하고 메뉴 선정 기준에서 내 순위를 강등시켰지만 식사 루틴만큼은 돈을 벌 때처럼 존중해 주니 고마운 일이다. 출근하던 시절에 나는 다음 날 눈이 올 거란 일기예보가 없는 한 새벽 여섯 시에 일어났었는데 출근할 데가 없는 지금도 똑같다. 언제부턴가 아내도 새벽잠이 없어져 일찍 눈을 뜨는 바람에 내가 편해졌다. 그전에는 아내를 깨울까 봐 살그머니 이불을 들추고 더 살그머니 일어나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를 피웠다.

   일곱 시면 출근 준비를 마친 재현이와 셋이 아침을 먹는다. 유독 아침밥 차리는 걸 힘들어하면서도 빵이 밥보다 돈이 더 든다며 아내는 꾸역꾸역 아침밥을 차렸었다. 어느 날 식빵에 잼을 한번 발라 줬는데 다음 날 재현이가 식빵을 굽는 기계를 아예 사 왔다. 찌개와 국만 먹던 재현이가 빵에 눈을 뜨게 된 것이 나에게도 아주 좋았다. 아침마다 빵과 우유가 식탁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가 아침으로 빵을 먹는다는 것을 재영이와 재훈이가 알게 된 후로는 비싼 빵이 등장했다. 빵이 부드러워지고 다양해졌다. 재현이가 좋아하는 입에서 살살 녹는 카스텔라나 아내가 좋아하는 단팥빵, 내가 좋아하는 소보루빵이 메이커로 바뀌었다. 재훈이가 사다 주거나 재영이가 택배로 보내 준다고 했다. 둘은 아내의 전화기로 쿠폰인가 상품권인가도 보내는데 전화기를 빵집에 보여 주면 빵을 준다고 했다.

   전화기로 처음에 오기 시작한 빵은 재영이의 롤케이크였다. 아침이면 재현이와 나만 한 덩이씩 잘라 줬는데 빵이 부드럽고 콕콕 박힌 건포도와 둘둘 발린 딸기잼이 참으로 맛났다. 아내가 시장에서 잔뜩 사와 얼렸다가 쪄주는 찐빵에 질렸을 때라 그런지 입에서 살살 녹았다. 아내는 우리에게 롤케이크를 잘라 주는 날에도 자기는 찐빵을 먹었다. 몇 번 재현이가 좋은 말로 그러지 말라고, 재영이가 엄마 아빠 먹으라고 사 준 건데 그냥 먹으라고 해도 말을 안 들었다. 어느 날 재현이가 그럼 자기도 찐빵만 먹겠다고 선언하고 나서야 아내도 롤케이크를 먹었다.   

   롤케이크 가격만큼 다른 빵을 살 수 있다는 걸 아내가 몰랐을 때는 롤케이크를 자주 먹었다. 안 보이는 데서 100g당 가격을 다 계산해 봤는지 롤케이크는 너무 비싸고 이틀 먹으면 끝이라고 투덜대면서도 전화기로 롤케이크 사진이 왔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전화기로 롤케이크가 와도 아내는 다른 빵들을 사 왔다. 롤케이크 사진이 그 금액만큼 다른 빵으로 체인지가 된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고 손해 본 사람처럼 안타까워했다. 가끔은 롤케이크가 먹고 싶었지만 나는 롤케이크 사진을 받을 수 있는 전화기도 없으니 아내가 주는 대로 먹었다.

   재영이에게 요새는 니 엄마가 롤케이크 대신 다른 빵들로 찾아다 먹는다고 말했다가 아내에게 혼이 났다. 전화기 사진이 아닌 실물 롤케이크가 배달로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혼난 걸 보면 배달로 온 롤케이크까지 빵집에 가져가서 체인지할 수는 없나 보다. 서울 사는 재영이가 휴대폰으로 주문을 하고 계산을 하면 우리 집 근처의 빵집이 우리 집에 빵을 배달해 준단다. 참 신기한 세상이다. 가끔은 서울, 부산, 대구의 유명한 빵집 빵도 택배로 온다. 제 엄마가 싼 빵만 찾아다 먹는 것을 나 때문에 알게 된 재영이가 이제는 직접 빵을 골라 다이렉트로 보내는 것이다. 먹을 때마다 아내에게 한소리를 듣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


   얼마 전 아파트를 사서 독립한 재훈이는 같이 살 때 온갖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다. 집밥만 줄창 먹는 제 형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는데 짜장면만 배달이 되는 줄 알았던 나는 퍽 놀랐다. 사무실이라면 회식도 배달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치킨이며 족발은 물론이고 회나 초밥처럼 귀한 음식도 집에 앉아서 맛볼 수 있었다. 설령 아내가 외식을 시켜준다고 해도 다리가 불편해서 밖에 나가는 게 힘든 나로서는 아주 호강이었다. 심지어 동해막국수까지 줄을 서지 않고 배달시켜 먹을 수 있었는데 면이 약간 붇긴 했지만 가게에 가서 먹는 것과 똑같이 맛있었고 육수를 넉넉하게 보내 줘 오히려 배달이 낫다며 아내가 처음으로 배달 음식을 칭찬하기도 했다.

   재훈이가 아파트를 사서 나갈 때 말도 못 하게 섭섭했던 것이 고작 배달 음식을 얻어먹는 재미 때문은 아니었다. 마흔이 넘어 낳은 늦둥이를 대학까지 공부 못 시킬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던가. 고시에 붙은 젊은 애들이 나는 정년퇴직 때까지 일해도 못 갈 높은 자리에 앉아 저 나이에 왜 저러고 사냐는 눈빛과 말투로 지적질을 할 때면 때려치우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재영이가 내 발목을 놓아준 후에는 재훈이가 내 발목을 잡아 주어서 멀쩡한 퇴직금을 챙기고 이 건물이나마 살 수 있었으니 재훈이가 효자다. 역시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한 법이다.

   나는 재훈이가 대출까지 받아 아파트를 사는 것에 반대했다. 아내도, 재현이도 모두 반대했다. 집에 에어컨까지 달린 멀쩡한 자기 방이 있고 같이 살면 생활비도 절약되고 혼자 살면 청소며 빨래며 제 할 일만 늘 텐데 굳이 대출 이자까지 물면서 아파트를 사야 하느냔 말이다. 하지만 재훈이는 단호했다. 대출도 삼 년 안에 다 갚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돈을 대주지도 않는 부모의 걱정은 쓸데없는 간섭이라며 말리는 대열에서 아내가 가장 먼저 이탈했다. 대장의 이탈로 대열은 바로 해산되었다.

   내가 재훈이의 독립을 반대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집에 아이들이 있으면 아내가 내게 훨씬 친절하고 부드러워지는 것, 그것이 내게는 아주 중요하다. 아이들이 없을 때 반찬이 급격히 부실해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돈을 벌어 올 때도 애들이 말했었다. 아빠가 회식하는 날에는 엄마가 반찬을 안 한다고. 부엌일에서 정년퇴직을 못하는 아내에게 늘 미안하기 때문에 반찬 투정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주면 주는 대로 먹는다. 큰 통으로 끓인 소고기 뭇국을 일주일 동안 먹어도 좋다. 반찬에서 머리카락이 발견되는 횟수가 늘어도 정말 아무 불만이 없다.

   그런데 집에 아이들이 없으면 집안 공기가 드세지는 건 힘들다. 아내의 발소리가 짜증을 내는 것 같고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소리도 성질을 내는 것 같다. 자격지심일 뿐이라고, 정말 그렇다면 아내가 삼시 세 끼뿐 아니라 새참까지 챙겨 주겠냐고, 반박의 증거가 분명한데도 그런 생각이 든다. 재현이는 옥탑방에서 살지만 재훈이는 우리 바로 옆 방에서 지냈다. 주한 미군처럼 든든한 재훈이었는데 철수해 버린다니 내가 얼마나 불안했겠나. 한반도에 그러하듯 내게 상존하는 위협은 누가 막아 주나.

   재훈이 아파트는 걸어서 오 분 거리라 주말이면 집에 와서 밥을 먹었으면 좋겠지만 아내는 애가 먼저 오기 전에는 절대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엄중한 경고를 내게 했다. 아내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자식에게 절대 부담 주지 말라는 것이다. 혼자 살면서 맨날 배달 음식만 먹을 게 뻔한 재훈이에게 밥 먹으러 오라고 하는 게 어째서 부담을 주는 일일까. 재훈이는 싫으면 싫다고 할 아이지 싫은데 올 아이도 아니다.

   재훈이가 독립한 후 재훈이가 주는 생활비는 이제 정말 안 받을 거라고 아내가 선언했다.  재영이에게도 그런 선언을 했었다. 이유는 항상 같다. 부담스럽다는 것. 그러니 나도 용돈을 더 아껴 써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늙은 남편은 아내 말에서 행간의 의미를 잘 읽어야 한다. 아내의 생활비 수령 거부와 주말의 식사 초대 실종이 원인과 결과 관계라고 재훈이가 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아니었다. 까마귀 새끼가 자라서 부모에게 벌레를 잡아다 주듯 재훈이가 여전히 빵이며 영양제며 과일을 열심히 사다 주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아내는 모르지만 아내의 용돈 수령 거부 선언 이후 재영이는 내게 용돈을 보내고 있다. 재훈이를 통해 전달해 주는 건 아내가 내 통장도 관리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 돈을 내가 청소하는 안방에 딸린 작은 화장실 안에 감춰 둔다. 명절이며 생일이며 어버이날에 애들이 보내는 돈도 아내가 공평하게 딱 반은 나눠 준다. 어차피 쓸 일도 없는 돈이지만  아내가 돈을 열심히 모으는 기분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내에게 천만 원을 주었을 때 다행히 아내는 돈이 어디서 났냐고 추궁하지 않고 기쁘게 받았다. 비자금의 출처를 캐려고 아내가 스위스에 있다는 은행들까지 추적에 나설까 봐 엄청 걱정하며 돈을 내밀었는데 다행히 아니었다. 태풍이 장마 전선을 밀어내듯 천만 원이라는 공돈이 주는 기쁨이 의심을 밀어낸 것일까. 그것보다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삼층 방에서 하루 종일 테레비만 보는 내게 돈이 생길 구멍은 뻔하지 않은가.

   용돈 모자란다고 하더니 무슨 돈을 모았냐고 아내는 웃었다. 용돈 모으려 애쓰지 말고 그냥 쓰라는 친절한 말도 덧붙여 주었다. 아내 생일에 케이크나 하나 사 주고 천 원 마트에서 치약, 화장지 나부랭이만 사다 주다가 천만 원을 떡하니 건네줄 때, 오토바이를 타며 맞았던 냉기와 나이 어린 상사에게서 맞았던 굴욕이 한 달에 한 번씩 치유되었던 월급날 기분이 떠올랐다. 많은 식구에 비해 턱없이 적은 월급이었는데도 아내가 고생했다는 말을 항상 해 주는 게 참 고마웠었다. 이제는 죽을 때까지 고생했다는 말을 아내에게 들을 일이 없겠지. 그것이 슬프고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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