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그녀

by 김진필

"봤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그녀의 반응에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어깃장을 놓고 싶은 화가 일렁였다. 그는 압축팩에 넣은 이불처럼 이내 화를 납작하게 눌렀지만 그래도 완전히 곱게 넘어가 주고 싶지는 않았다.

"뭘?"

"못 봤어?"

"뭘 말이야?"

"남자가 일어서고 여자가 앉는 거 말이야."

당연히 봤다. 그에게도 눈에 띄는 장면이었다. 아주 보기 좋고 흐뭇하며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더불어 그는 그녀가 어떤 말을 할 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좀전까지 그와 그녀는 버스 안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버스 안은 제법 북적였다. 한 정류장에서 손님을 태우고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그와 그녀의 앞 좌석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 막 버스에 오른 여학생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여학생이 웃으며 사람들 속을 헤치고 남학생 앞에 다다르자 남학생은 냉큼 일어나 여학생을 앉히고 자기는 여학생 옆에 섰다. 그러자 자리에 앉은 여학생은 남학생을 올려다보며 웃었고 남학생은 여학생의 뺨을 가볍게 한 번 쓰다듬으며 더 밝게 웃었다. 거기까지 보고 다음 정류장에서 그와 그녀는 내렸다.


"아니, 왜 여자가 자리를 양보받는 거야?"

그녀에게는 그게 왜 이상할까.

"그럼, 여자친구는 서서 가고 남자친구가 앉아서 가?"

"당연하지. 여자가 무슨 노약자야? 왜 자리를 양보받아? 그 여자애, 당연하다는 듯이 냉큼 자리에 앉는데 완전 꼴불견이었어."

그는 급속도로 피곤해졌다. 또 시작이다. 또.

"양보받은 게 아니라, 그냥 남자친구가 양보한 거잖아. 여자친구 세워 놓고 혼자 앉아 가면 남자친구가 맘 편하겠어?"

"뭐? 그럼 너도 여태 마음이 불편했어?"


당연하지, 엄청 불편했다.

그녀와의 첫 데이트 날, 지하철 문이 열렸을 때 자리가 딱 하나 비어 있었다. 그는 빈자리 앞에 당연히 섰다. 그런데 옆에 선 그녀가 말했다.

"너가 앉아서 가."

"어? 아니야, 네가 앉아."

"난 괜찮아. 앉으라니까."

그는 깜짝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뭉클 감동했다. 여태까지 이랬던 여자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몇 번의 실랑이가 조용한 지하철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당황스러웠던 그는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는 그녀를 올려다 보고 그녀는 그를 내려다보며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데 흥미로워하는 주변의 시선이 문득문득 느껴졌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하던 찰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말씀하셨다.

"여자가 앉아서 가야지. 남자가 돼 갖구서 여자를 세워 두나!"

그날 데이트 비용도 당연히 반반 정확히 부담했다. 다들 그러니까 그도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 코스에서 할인행사 때문에 계산서에 18650원이 찍혔고 그가 카드를 긁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게 9330원을 이체했다. 9325원이어야 하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런 말을 하는 게 너무 쪼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같은 경우가 생기면 그도 5원 더 입금하리라 생각했다. 아, 그는 그런 다짐을 하는 자신이 진짜 쪼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아니야, 괜찮아. 우리 집에서 너네 집 되게 멀어. 여기서 그냥 헤어져."

"괜찮아. 데려다주면 좀 더 같이 있을 수 있잖아. 내가 좋아서 그래."

"그래? 그럼 내가 너 데려다줄게. 가자."

결국 그날 그녀가 그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돌아서서 가는 그녀의 흔연한 발걸음을 보며 그는 처음 지하철에서 느꼈던 감동은 온데간데없고 뭔가 불편함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음을 깨달았다. 그런 불편함은 그녀를 만나는 지난 일 년 내내 그를 괴롭혔다.

"그래, 여태까지 나 되게 불편했어."

"왜? 뭐가 불편했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거. 너 기억 안 나? 첫 데이트 날 지하철에서 나 야단맞은 거? 나는 엄청 창피했거든."

"그건 그 아저씨가 잘못한 거지. 그래서 내가 말해 줬잖아. 내가 서서 가겠다고 한 거라고."

"내 말은, 그런 일들이 피곤하고 불편하다고. 상식이란 게 있잖아. 그냥 상식대로 하면 안 돼?"

"상식? 뭐가 상식인데? 너 이제 보니 되게 이상하다. 나만 앉고 네가 서 있으면 나는 안 불편하겠어? 나도 불편하다고. 그리고 그렇게 불편하면 왜 말을 안 했어?"

"말했잖아. 너보고 앉으라고, 내가 데려다 주겠다고 만날 때마다 말했잖아. 그런데 항상 니가 싫다고 했잖아."

그는 그녀가 항상 5원을 더 내는 것도 불편했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는 똑 부러지게 말했다.

"앞으로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자리가 하나 있으면 둘 다 서서 가자. 그리고 헤어질 때는 니네 집과 우리 집 딱 중간에서 헤어지고. 됐지? 그럼 둘 다 안 불편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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