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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필 Oct 06. 2024

사랑의 비용

   윤리 시간에 배웠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감정을 배제하고 물질적 가치만 고려하며 개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합리적이며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칸트니 데카르트니 하는 분들은 곧장 무덤 속으로 귀가하셨지만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그녀의 머릿속에 남았다. 이기적인 것은 나쁜 거라고만 생각했던 그녀에게 합리적인 것이 이기적일 수 있다는 설명은 못 생겼던 고등학교 동창의 다 뜯어고친 예쁜 얼굴처럼 찜찜했다.      


   그녀는 그간 친구들의 연애를 숱하게 봐 왔다. 그녀가 지켜본 연애는 주인공들은 열연하지만 시청자들은 결말까지 이미 알고 있는, 주인공만 바뀌고 스토리는 똑같은 드라마 같았다. 유일하게 흥미로웠던 것은 사랑의 비용 정산 방법이었다.


   남녀가 데이트를 할 때 남자가 더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는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는 '휴대전화 없이 살았다, 현금만 쓰고 살았다, 강릉 가는 기차가 열 시간씩 걸렸다, 딸보다 아들이 귀했다, 고등학생일 때 교련 수업을 받았다'처럼 황당했다. 요즘은 너무도 당연해서 더치 페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할 만큼 자기가 먹은 것, 자기가 본 것은 자기가 낸다. 얼마나 합리적인가. 게다가 가난한 나라가 식민 지배에서 독립했듯 이제는 '합리적'이라는 단어도 찜찜했던 '이기적'이라는 단어로부터 독립했다. 그녀 세대는 합리적이지만 이기적이지 않은 비용 지불 방식에 익숙한 세대고 그것은 사랑의 비용을 지불할 때도 마찬가지다,라고 생각했었는데


   호모 이코노미쿠스들은 진화 중이었다. 대학생이 되어 알게 된 그녀의 친구 1은 데이트 카드를 만들었다. 매월 1일이면 남자친구와 합의하여 정한 금액을 각각 입금한다. 데이트를 할 때는 반드시 그 카드로 결제를 하며 만나서 이동을 할 때 드는 교통비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한다. 기념일 선물도 똑같은 금액의 것으로 두 개를 사서 데이트 카드로 결제한다. 그녀는 친구 1에게 물었다.

   "그럼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카페에서 차를 마실 때도 똑같은 가격의 것을 주문해?"

   "그런 것까지 약속하진 않았지만 대부분은 비슷한 가격대로 고르지. 한 사람이 먼저 메뉴를 정하면 다른 사람이 그 가격에 맞추는 게 암묵적 룰이야."   

    그녀는 친구 1의 연애를 지켜보며 '이기적'이 다시 '합리적'에 들러붙어 부활하는 듯한 찜찜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찜찜함을 배가시킨 것은 친구 2였다. 친구 2는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마다 한 사람이 비용을 모두 지불하고 집에 돌아가 2분의 1을 다른 사람이 송금해 주는 방식으로 사랑의 비용을 정산했다. 누가 지불하고 누가 송금하는가도 번갈아가면서 했다. 여기까지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 2가 남자친구에게 보낸 카톡을 보고는 다시 호모 이코노미쿠스 생각이 났다. 친구 2는 '84250원을 썼으니까 42125원 보내 줘'라는 카톡에 결제문자를 캡처해서 주르륵 곁들였다. 역시 합리적인 것이 이기적일 수도 있는 걸까. 수능 만점자들은 모두 교과서로 공부했다는데 역시 교과서는 틀리지 않는 걸까.

   "나 남자친구랑 헤어졌어."

   "어, 괜찮아?"

  “헤어질 때는 마음이 아팠는데 지금은 완전히 정 떨어져서 괜찮아. 마지막으로 만난 날 걔가 집에 가서 카톡을 보냈더라고. 스타벅스에서 12800원 썼으니까 6400원 보내라고. 와, 진짜 너무하지 않아? 나도 성질나서 결제내역 캡처해서 보내라고 했다니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카톡이 결제내역 캡처가 됐지 뭐야."


   드디어 그녀도 생애 첫 연애를 시작했다. 남자친구는 한 번의 연애 경험이 있는 같은 과 동갑내기였다. 첫 만남 때 카페, 식당, 카페를 거치며 세 번의 데이트 비용이 발생했는데 첫 번째는 그녀가, 두 번째는 남자친구가, 세 번째는 그녀가 지불했다. 그 이후로 만날 때도 비슷했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카페를 가는 것이 데이트의 정석처럼 굳어졌는데 항상 그녀가 두 번 지불했다. 극장에서는 영화값만 지불하는 것이 당연히 아니었다. 팝콘이나 나쵸, 핫도그, 그리고 음료 등의 비용까지 그녀가 지불했다. 금액으로만 따지면 밥값과 카페값까지 남자친구가 지불해야 균형이 맞지만 그녀와 남자친구는 지그재그 지불방식을 유지했다. 그 이유는


   요즘 대학생들의 한 달 평균 용돈은 7, 80만 원 정도고 좀 쓰는 학생들이나 연애를 하는 학생들은 100만 원을 넘기기 쉬운 편이데 남자친구는 용돈으로   50만 원을 받기 때문이다. 그녀와 남자친구가 다니는 대학은 명문대지만 1학년은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의 캠퍼스에서 강제기숙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주중 아르바이트는 불가능하다. 남자친구는 50만 원으로 금요일까지 하루 두 끼만 먹고 매주 서울 집으로 왕복하는 교통비를 내기에도 빠듯하다고 했다. 학식도 7천 원은 하니까 그럴 것이다.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겠으나 그러면 데이트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물론 주중에도 수업이 빨리 끝나는 날이면 데이트를 할 수 있었으나 남자친구의 수강 과목들은 운이 없게도 그녀에 비해 개인 과제는 물론 팀 과제도 굉장히 많았고 특히 팀 과제는 주말이면 많은 학생들이 기숙사를 빠져나가니 평일 저녁에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남자친구가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만날 시간이 없어지는 것보다는 그녀가 데이트 비용을 남자친구보다 두 배 이상 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다행히 그녀는 엄카를 갖고 다녔고 딱히 지출의 가이드라인이 없었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지독하게 궁핍한, 그래서 캠퍼스의 낭만은커녕 지독하게 불행한 대학 생활을 보냈던 터라 딸의 대학 생활은 낭만적이고 행복하길 바라는 열망을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열렬히 갖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가이드라인 없이 용돈을 주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고 그녀가 딱히 가이드라인을 정해야 할 만큼 흥청망청 돈을 쓴 적이 없다는 이유가 더 컸다. 날지 못하는 닭에게 날지 말라고 혼을 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녀로서는 첫 연애인만큼 주말은 물론 배달음식에 끼어 오는 서비스 같은 공휴일에도 늘 남자친구를 만났다. 여름방학에는 일주일에 다섯 번은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를 즐겼다. 여름방학 한 달이 지났을 때 그녀의 엄마가 말했다.

   "딸, 지난달에 200만 원 넘게 썼어. 좀 아껴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깜짝 놀랐다. 아카를 갖고 다니는 고등학교 동창 남학생이 방학을 하고 열흘 동안 100만 원에 육박하는 돈을 썼다가 카드를 회수당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 친구도 연애 신생아였고 자기가 그렇게나 돈을 많이 썼는지 몰랐다고 했다.

   "엄마,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네가 그렇게 쓰면 남자친구도 그 정도 쓴다는 얘길 텐데 걔는 괜찮대?"

   "엄마, 사실은 만나면 내가 돈을 더 내. 걔는 용돈을 50만 원 밖에 못 받아."

   "음...... 걔네 집이 좀 어려워? 아르바이트는 안 해?"

   "집이 어려운 것 같지는 않아. 걔도 강남에서 자사고 다녔고 누나도 그 학교 다녔대. 누나는 삼수까지 했고 집에서 한강이 보인다고 하면 잘 사는 거 아닌가? 그리고 걔 방학이라 지금은 아르바이트해. 그런데 한 달 일해야 월급을 받는대. 그때까지는 돈이 없을 걸."

   "글쎄, 남의 집 사정은 알 수 없는 거니까. 엄마는 네가 남자친구보다 돈을 더 쓰는 건 상관없는데 한 달에 200만 원 넘게 쓰는 건 너무한 것 같은데? 그리고 이 철딱서니 없는 딸아, 남자친구 사정만 생각하지 말고 엄마 사정도 좀 생각해야지."

   "그럼, 그럼. 그 정도나 쓴 줄 몰랐어. 미안해 엄마,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러나 한 달 넘게 더 이어지는 방학 동안 그녀의 씀씀이는 줄지 못했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여행까지 다녀왔으니 오히려 늘어도 한참 늘었다. 한 달이 더 지났을 때 그녀의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 문제로 그녀에게 화를 냈다.  

   "지금까지 공부만 했으니 좀 놀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좀 너무한 거 아냐? 엄마가 너도 아르바이트를 하라고 할까 고민도 해 봤어. 시간이 많으니까 계속 돈만 쓰잖아. 돈을 벌면 돈 버느라 쓸 시간도 줄겠지 싶어서. 그런데 너 학점이 4점은 넘어야 한다며? 또 학과 공부 외에 공부할 것도 많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며? 아르바이트하느라 학점도 못 받고 공부도 못했다가 나중에 너 하고 싶은 거 못하게 되면 어떡할래? 그러니까 지난 학기처럼 공부 열심히 해서 장학금 받고 엄마가 주는 용돈 쓰면서 공부하는 게 제일 좋은 거야. 네가 선만 넘지 않으면 엄마도 용돈 많이 쓴다고 뭐라 안 해. 그리고 엄마가 이 말은 망설였는데......"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 걱정을 하게 됐다. 그런데 그 걱정에 문득 불쾌한 의심까지 들러붙었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하는 건지, 그녀가 잘해 주니까 만나는 건지 모르겠다는 엄마의 마지막 말 때문일까? '나한테 너처럼 잘해 준 사람은 없었어'라는 남자친구의 말에 대한 해석이 알쏭달쏭해진 것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분명 앞으로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과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할 만큼 남자친구가 그녀를 소중히 여겨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녀는 남자친구에게 생일 선물을, 그것도 꽤 비싼 선물을 지나친 가격이라는 엄마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사 주었지만 남자친구는 그녀의 생일에 아무것도 선물하지 않았던 일도 치사하게스리 께름칙해졌다. 당시에는 남자친구가 선물 같은 것은 살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이 완전히 이해가 되어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아, 이렇게 옹졸한 인간이라니.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과자 부스러기로 스멀스멀 기어드는 개미 같은 지저분한 생각을 쫓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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