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까지 알아야 되니?
우리나라 최고 대학인 한국대 의대 1학년인 그는 영재학교 출신이다. 전국의 중학교 중 등록금이 가장 비싼 국제중학교 출신이다. 그 국제중보다 등록금이 더 비싼 사립초등학교 출신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전국에서 가장 비싼 산후조리원 출신이지만 그건 뭐 굳이 자랑할 게 못 된다. 더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조상 중 영의정쯤은 수두룩하고 더더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성씨 시조는 알에서 태어난 영웅이지만 그딴 것을 자랑하면 웃음거리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캠퍼스에는 뭔가 우쭐함에 겨운 신입생들이 넘쳐 났다. 초봄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커 속에는 반팔이나 얇은 긴팔을 입더라도 겉에는 꽤 두툼한 점퍼를 입는 것이 좋은, 바야흐로 과잠의 때였다. 과잠이란 '학과 잠바'의 줄임말로 외고를 나온 친구들의 경우 고등학교 때도 입학 기수를 새긴 영어과 잠바, 프랑스어과 잠바, 일본어과 잠바 등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재학 중인 대학의 잠바는 그의 바람과 달리 의예과, 경영학과, 정치외교학과, 국문과 등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 그냥 등짝 위쪽으로 아주 크게 대학 이름이 영문으로 쓰여 있고 그 아래 조그맣게 과 이름이 역시 영문으로 쓰여 있다. 그 아래 평야처럼 넓게 펼쳐진 등짝 가운데는 학교를 상징하는 마크가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으며 앞쪽 오른쪽 가슴에는 심장 위치에 심장 크기만 한 학교 이름의 첫 글자가 영문으로 빡 박혀 있다.
아무리 영어에 익숙하지 않다 하더라도 지적 능력이 웬만하기만 하면 그가 입은 과잠을 보고 그가 다니는 대학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만이다. 앞쪽에서 보면 H라는 한 글자만 보이기 때문에 H로 시작하는 수많은 다른 대학들과의 차별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만으로 한국대생임을 표현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리다. 더 큰 불만은 뒤쪽의 학교 이름과 학교 마크는 큼직하지만 밑에 의예과를 적어 둔 영어 스펠링은 쓱 스쳐 지나가면서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작고 꽤 어렵다는 것이다. '아,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한국대에 다니는구나' 정도만 알아차릴 수 있지 '아니,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한국대 중에서도 의대에 다니는구나'까지 알아차리긴 힘들다.
그는 의대와 다른 과들의 급이 같을 수 없는데도 일반인들이 과를 구별하기 힘든,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의대를 구별하기 힘든 과잠을 한국대생 전체가 입는다는 것이 억울하다. 성적으로 보면 한국대 의대와 한국대 다른 과들을 하나로 묶기보다는 전국의 의대끼리를 하나로 묶는 것이 훨씬 동질적이다. 그래서 그는 누구나 의대생임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과 이름만큼은 한글로 박든지 아니면 전국의 의대 연합 과잠을 만들든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들이나 변호사들은 배지를 달던데 의대 배지를 다는 방법도 괜찮겠다. 참, 의대 연합 과잠을 만들면 그때는 한국대가 강조되도록 대학 이름을 한글로 박아야 하겠다. 한국대 의대보다 두, 세 단계 아래인 유명 사립대 의대생이 다음 해 수능 만점자가 되어 결국 한국대 의대에 들어온 것만 봐도 한국대 의대는 또 급이 다르니까.
영재고 출신으로서의 억울함도 있다. 선배들 말에 의하면 영재고가 과학고보다 분명히 한 레벨 위인데도 사회에 나가면 역사가 짧고 쪽수가 너무 적다 보니 존재감에서 밀린다고 했다. 한국대만 해도 합격 비율로 따지면 영재고가 압도적으로 높은데도 합격생 수로 따지면 과학고에 압도적으로 밀린다. 게다가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는 미스 춘향은 알아도 미스 유니버스는 모르듯 과학고라고 하면 좋은 학교라고 바로 알아차리지만 영재고라고 하면 그건 무슨 학교지 하는 반응까지 보여 영재들의 야마를 돌게 한다.
어쨌든 그는 출신 성분에서만큼은 대한민국 최고라고 자부한다. 그렇지만 짐짓 겸손한 척하는 것을 절대 잊지 않는다. 아무리 마스크를 써도 감염병의 확산을 막지 못하듯 스스로 떠벌리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사람의 출신은 알려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전국노래자랑 최우수상자가 지상파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자 앞에서 주름잡는 것 같은 어이없는 일이 목격되고 있다.
어느 학교 과잠이건 몸통 부분은 짙은 색이 많이 쓰이고 넣어야 할 글자나 마크가 많지만 팔 부분은 대부분 흰색, 아이보리색 같은 미색이고 여백이 많은 편이다. 그 대머리 아저씨의 벗어진 이마처럼 환한 공간에 고등학생들이 교복을 스키니나 미니스커트로 수선하듯 개인적으로 또 다른 학교 이니셜을 새기는 대학생들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출신 고등학교 이니셜! 게다가 한글로 새겼다! 나중에 알게 된 바, 이 유치한 행동을 시작한 것은 소위 유서 깊은 지방 명문고 출신들인 것 같았다. 날 좀 알아봐 달라고 외치는 듯한 돋을새김. 지방 일반고에서 전교 1, 2등을 해서 지역균형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의 열등감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 학생들의 수능 성적 합격 기준은 고작 3합 7이니까 사실 수능 성적만으로 따지면 중경외시 라인 정도 될까? 또 구한말 조선의 왕족처럼 유서 깊은 명문고라고 해봤자 이제는 완전히 한물가서 전교 1등이라고 해봤자 별볼 일 없음을 본인들이 가장 잘 아니까.
대한민국 최고의 영재학교 출신인 그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지만 유치원생들의 재롱잔치를 보듯 귀엽다는 느낌도 들었다. 한동안 과잠 팔뚝에 쓰인 듣도 보도 못한 고등학교를 검색해 보는 취미까지 생겼다. 아니, 전교에서 딱 한 명 한국대에 합격했다고? 그럼 아까 본 그놈이 바로 그놈이겠구나. 아, **고등학교의 **이 충청남도에 있는 사과가 유명한 도시 이름이었구나. 엇, 우리 집 근처에 이런 고등학교가 있었나? 지나다니면서 한 번도 못 봤는데...... 시간이 흐르자 각종 특수학교 출신들도 질세라 팔뚝에 출신학교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과학고, 외국어고, 국제고, 자사고, 자공고, 자율고, 우리나라에는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고등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먹이사슬의 정점에는 당연히 영재고가 있기 때문에 점고하는 그는 항상 여유만만했다.
그런데 출신 성분만큼은 최고라고 자부하던 그로서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최강의 적을 만나고야 말았다. 한 학생 과잠의 등짝에 한국대 의예과, 팔뚝에는 아아, 아무리 한국영재학교 출신이라도 수시 합격생인 그로서는 넘을 수 없는 벽, 진정한 성골의 증표가 황금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한국영재학교, 정시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