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만 둘인 것이 퍽 다행이라고 그녀는 자주 생각해 왔다. 딸 하나면 금메달이고 그다음은 기억이 안 나다가 마지막에 아들 둘이면 목매달이라는 우스갯소리들을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역시 아들이 낫다. 왜냐고? 제사상 운운할 정도로 꼰대 아니고 효도 운운할 정도로 세상 물정 모르지 않다. 그녀의 남편을 보아도 장가간 아들은 처갓집 사람이다. 그런데 왜냐고? 가장 큰 이유는, 덜 불안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들과 딸의 차이가 아니라 엄마들의 성격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유구한 엄마들 모임의 역사에서 보고 들은 근거에 의하면 확실히 딸 가진 엄마들이 걱정이 더 많았다. 좀 무서운 세상인가 말이다. 특히 성적으로 보면. '성적'말고, '성'적.
두 아들이 모두 대학생이 되고 나서 그녀의 이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지고 있다. 뉴스를 보라. 헤어지자는 여자 친구를 때리고 심지어 죽여 버리는 사건이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지 않는가. 예전에 어떤 시사 프로그램에서 전문가라는 양반이 그랬다. 보도되는 범죄는 보도되지 않는 범죄의 십 분의 일도 안 된다, 같은 부류의 범죄 중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것만 보도된다..... 이기적일지언정 사고를 당하는 것보다는 사고를 치는 것이 낫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대학생 딸을 가진 부모라면 그런 극단적인 불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소소한 불안은 넘쳐날 것 같다. 아들만 있는 엄마가 어떻게 아냐고? 아들의 여자친구를 보면서 안다.
큰아들은 대학생이 되자마자 연애를 시작했고 벌써 이 년이 다 되어 간다. 카투사니 뭐니 군 문제를 해결하려고 온갖 궁리를 오래 한 것도 다 여자친구 때문이다. 결국 복무 기간이 길어도 휴가가 많은 공군에 지원해 보기로 한 것도 다 그래서다. 지금은 좀 안정적이지만 초반에는 여러 번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 그중 하나만 소개하자면 산부인과 영수증 발견 사건이다.
큰아들 방의 휴지통을 비우다가 영수증이 똘똘 말린 뭉치를 발견했다. 큰아들은 여자친구가 생기고 얼마 안 돼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아무리 남녀평등이라지만 그래도 돈은 남자가 더 써야 한다, 가오가 있지, 라며 용돈을 올려 줬지만 아무래도 부족했겠지. 남녀평등하게 여자친구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는 이야길 듣고 그녀는 왠지 아들의 여자 친구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너그러운 그녀지만 큰아들의 삥 뜯는 횟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수증 뭉치를 보는 순간 열이 솟았다. 이만큼 돈을 쓰고 다니느라 바쁘구먼. 도대체 어디다 돈을 이렇게 쓰는 건가 한번 보기나 하자. 아, 판도라의 상자인 것도 모르고 그녀는 그만 꼬깃꼬깃한 영수증 뭉치를 열고 말았다.
뭔 놈의 사진을 이렇게 찍어 대나, 밥은 왜 이렇게 비싼 걸 먹고 다니나, 디저트까지 꼭꼭 챙겨 드시네, 개봉한 영화는 죄다 보고 다니는구만...... 열은 서서히 내리고 어릴 적 큰아들 일기장을 훔쳐볼 때처럼 킥킥 재미가 났다. 끝까지 열을 끌어올리다 반드시 폭발을 유도하는 남편의 카드명세서와는 사뭇 달랐다. 그런데, 헉! 순간 숨이 멎었다. 산부인과 영수증!
세상이 세상인만큼 벌써 여자친구와 다 해봤을 거라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산부인과라니.... 아들을 붙잡고 어떤 말을 해야 하나, 나물 다듬는 것은 질색인 그녀지만 하루 종일 할 말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릴 적 반장 선거에 나가느라 연설문을 쓸 때보다 백 배는 더 고민했다. 드디어,
"아들, 엄마가 보려고 해서 본 게 아니라 어쩌고저쩌고...."
"응, 엄마, 그거 사후피임약 처방받은 거야. 여자친구가 위험할 것 같다고 해서 같이 병원에 가서 약 받았는데."
다시 한번 그녀는 헉! 숨이 멎었다. 아들의 표정이 너무도 태평했기 때문이다. 감기에 걸려서 혹은 배가 아파서 병원에 다녀왔다는 식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말투! 쿨한 엄마인 척, 왠지 모르지만 요즘은 쿨하지 않은 엄마는 아주 별로기 때문에, 거친 숨결과 달아오르는 낯빛을 애써 누르며 영수증 금액을 보니 5만 원이 좀 안 되는 금액이 찍혀 있었다. 아, 그녀가 생각했던 수술은 아니었으므로 순간 안심이 되었다.
다음 날 그녀는 인터넷으로 '사후피임약'을 검색해 보았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했다. 아들의 여자친구 엄마는 이런 상황을 알까. 문제가 생기면, 이를 테면 수술대에 오르는 것 같은, 남자 쪽에서 돈이야 당연히 내주겠지만, 아니, 설마 그런 수술비도 남녀평등인가, 어쨌든 몸 상하는 건 여자 쪽 아닌가. 임신시킬까 봐 걱정하는 것과 임신할까 봐 걱정하는 건 차이가 큰 것 같은데.
형과 연년생인 둘째 아들도 얼마 전 강스파이크를 날렸다.
"엄마, 나 다음 달에 일본 여행 가려고."
"학기 중에?”
“방학 때는 비행기값이 너무 비싸서. 월요일 하루만 수업 빼고 3박 4일로 가려고. 하루 빠진다고 학점에 문제없으니 걱정 마시고. 그런데 여행비 좀 도와줘. 모아둔 돈으로 모자랄 것 같아서."
"그래... 그래도 굳이 수업까지 빠지고 가나. 좀 비싸도 방학 때 가지.... 누구랑 가는데?"
마지막에 누구랑 가냐고 물은 건 별생각 없이 던진 그냥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여자 친구."
헉! 스펙터클한 내용과 대조를 이루는, 어디서 보았던 저 태연한 표정과 말투!
"여자 친구? 여자 친구랑 여행 가서 자고 온다고? 세 밤이나? 아니, 그 집 부모님은 허락하셨어?"
"여자 친구랑 여행 가는 게 어때서? 다른 애들도 다 다녀. 그리고 여자 친구 부모님 문제는 여자 친구가 해결할 문제지. 뭐, 안 된다고 하시면 여자 친구가 선택할 일이지. 안 가든지, 아니면 친구들하고 간다고 거짓말하고 가든지,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지."
대학교 1학년 짜리 아들이 여자 친구와 3박 4일로 해외여행을 갈 테니 돈을 보태라고 당당히 이야기하다니! 다행히 큰아들 사태를 통해 면역력을 좀 키운 터라 막혔던 숨은 금세 트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 날 내내 다시 마음이 불편했다. 신혼여행도 아니고 여자 친구랑 해외여행을 그렇게 오래가다니, 보나 마나 갔다 오면 인터넷에 올리고 할 텐데 그럼 여자 친구와 여행 다녀온 걸 모두가 알아도 된다는 말인가? 다른 애들 얘기를 하는 걸 보니 이미 서로들 비밀도 아닌가 보네.
이번에도 그녀는 자신보다 여자 친구네 부모 쪽이 더 걱정되었다. 아유, 역시 딸보다는 아들이 낫다.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