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화 Sep 24. 2024

사장에서 백수가 되기까지 한나절이면 되더라

망하기 전 전조증상, 사무실 축소이전

더 이상 회사를 유지하는 건 무의미했다. 우리는 코로나기간 동안 월세를 30%나 올려달라는 악덕 건물주 때문에 사무실을 이전해야 했다. 법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인상폭이었지만 건물주랑 싸우려니 그것도 피곤한 일이었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이전보다 훨씬 작은 평수의 사무실을 계약하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들어왔던 사무실 이전이라 함은, 장사가 잘돼서 더 넓은 곳으로 이전하는 확장 이전이 대부분이었건만, 더 좁은 곳으로 축소 이전을 하게 되는 첫 번째 주인공이 내가 될 줄이야.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기조차 부끄러웠다. 차라리 시원하게 망했으면 그냥 다 접고 셔터 내렸을 텐데 말이다. 이 모든 게, 앞에서 말한 흥하지도 망하지도 않는 우리 회사의 롤러코스터 같은 아이덴티티 때문이겠지. 아직 안 망했으니 별 수 있나? 결국 나는 건물주 욕을 하며 주섬주섬 또 짐을 싸고 앉았다.      


근데 문제가 생겼다. 새로 구한 사무실까지의 거리가 몹시 애매했다. 대략 버스로 두 코스 정도의 거리인데 그 정도 거리에 용달차를 부르자니 돈이 아까웠다. 확장 이전이었어 봐. 사람 불러서 고급지게 포장이사했겠지. 그러나 현실은 구질구질함 그 자체. "축소 이전 하는 판에 이사하는데 돈을 쓸 수는 없지." 결국 큰 가구들은 다 처분하고 나머지 짐들은 좁아터진 내 경차로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며 실어 날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경차 무시하면 안 된다. 생각보다 짐이 많이 실리더라. 이렇게 많이 들어간다고? 아무튼 놀랐다.     

 

롤러코스터의 최후

비록 더 좁아지긴 했지만, 이사를 하고 나니 뭔가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오히려 전망과 채광은 이전 사무실보다 더 좋아졌다. 전에 비해 부쩍 좋아진 채광에 나는 창가에 작은 화분 하나를 두고 키우며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했다. 햇볕이 잘 드니 기분 탓인지 몰라도 뭔가 기운이 좋았다. 잘 될 것 같은 기운.

그렇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상품을 기획하고 만들며 희망을 가졌었다.

 

하지만 나의 새로운 마음과 기대를 저버리고 바닥을 향해 떨어지던 롤러코스터는 더 이상 올라오질 못했다.

2년 후, 월세 인상을 앞둔 나는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6년 동안 어중간하게 둥둥 떠다니던 나는 비로소 완전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잘 가, 나의 롤러코스터야. 그동안 너로 인해 울고 웃고 즐거웠어.


미련 없는 이별

마지막 출근 날,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아쉬운데 아쉽지 않았다. 6년간 해왔던 일을 막상 놓으려니 그게 아쉬웠고, 6년 동안 할 만큼 했다 생각하니 미련이 없어 아쉽지 않았다.     

주말 동안 큰 짐을 집으로 다 옮기고 화요일에 출근해 마지막으로 남은 소지품들과 창가 옆에서 키우던 작은 화분 하나를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레옹의 마틸다처럼 폼나게 들고 나오고 싶었는데 현실은 구깃구깃한 검은 비닐봉지였다. 그렇게 나는 6년 만에 다시 백수가 되었고 사장에서 백수가 되기까지 한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사실 회사를 접기로 마음먹고 나서도 크게 실감이 나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짐을 챙겨 나올 때도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출근할 것만 같았고 늘 가던 거래처에서 원단을 고르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백수 1일 차. 나는 이전 날과 다름없이 출근을 한다며 집을 나왔다. 집에는 내가 망했다는 사실을 차마 말할 수 없어, 그냥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갔다 올게요."

그렇게 회사 가는 척 집을 나선 나는 곧바로 터미널로 가 고속버스를 탔다. 목적지는 서울.                    


이전 01화 마침내, 6년간 운영하던 회사가 망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