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의 연극

가면이 너무 오래 얼굴이 되었을 때

by 풍운아의 되새김질

세상 모든 사람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동시에 지니고 살아간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다만 그 비중과 깊이는 제각각이다. 나는 스스로를 돌아볼 때, 그 양쪽의 대비가 비교적 분명한 편이라고 느껴왔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그 뒤에 숨겨둔 생각 사이의 간격이 꽤 컸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예전의 나는 사람들 앞에서 유난히 밝은 모습을 유지하려 애썼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농담을 던졌고, 굳이 웃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도 웃었다. 친절은 습관처럼 앞섰고, 분위기를 맞추는 일에 늘 먼저 나섰다. 누군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나는 스스로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그 모습이 나라고 믿었던 시기도 있었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밝다고 말했고, 편한 사람이라고 했고, 어디에 두어도 무난하다고 평가했다. 그 말들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전부는 아니었다. 그 밝음은 자연스러운 성격이라기보다는, 선택에 가까웠다.

혼자가 되었을 때 나는 갑자기 다른 감정을 마주하곤 했다. 그것은 외로움과는 조금 달랐다. 쓸쓸함이나 고독 같은 단어로는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오히려 질문에 가까웠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굳이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밝게 보여야만 할까.’
‘이게 정말 나의 모습일까.’

그 질문은 소란스럽지 않았다.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마치 연극이 끝난 뒤 무대 뒤편에서 홀로 남은 광대처럼, 나는 분장실에 앉아 스스로를 바라보았다. 관객이 있을 때는 필요했던 표정과 몸짓이, 혼자가 되자 갑자기 낯설어졌다. 웃고 있던 얼굴이 아니라, 웃고 있어야 했던 얼굴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인식했다.

그 순간 찾아오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납득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역할에 충실해졌을까. 왜 사람들 앞에서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나 사이에 이렇게 분명한 경계가 생겼을까. 그 경계는 언제부터 자연스러워졌고, 언제부터 당연해졌을까.

광대는 웃음을 만들어내는 존재다. 관객이 원하면 웃고, 분위기가 필요하면 과장된 몸짓을 더한다. 그 웃음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대 위에서 역할을 해내는 일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 역할을 너무 잘 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잘 해낸다는 사실이, 과연 좋은 일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밝은 모습은 관계를 부드럽게 만든다. 갈등을 줄이고, 분위기를 매끄럽게 이어준다. 그러나 그 편리함 뒤에는 늘 질문이 남는다. 이 모습이 진짜 나인가, 아니면 내가 선택한 연출인가. 그 질문을 외면한 채로 계속 웃고 있으면, 언젠가는 스스로에게 설명이 필요해진다.

지금의 나는 예전처럼 과하게 밝지 않다. 여전히 웃고, 여전히 친절하지만, 그것이 자동 반응은 아니다. 웃고 싶은 순간에 웃고, 굳이 연출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는 가만히 있는 연습을 하고 있다.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 즉각적으로 역할을 꺼내 들지 않으려 애쓴다.

이 변화는 드라마틱하지 않다. 다만 조금 더 솔직해졌을 뿐이다. 무대 위의 나와 무대 아래의 나를 완전히 분리하지 않으려는 시도다. 광대의 연극을 완전히 그만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언제 막을 내릴지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졌다.

나는 더 이상 항상 밝아야 할 이유를 찾지 않는다. 밝음은 미덕일 수 있지만, 의무는 아니다. 웃지 않는 순간이 있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실망을 안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침묵 속에서야 비로소 나라는 사람의 윤곽이 드러난다고 믿게 되었다.

광대는 무대 위에서 역할을 다하고 내려온다.
그리고 장막 뒤에서는 분장을 지운 얼굴로 숨을 고른다.


밝음과 어둠이 모두 거짓이 아닐 때,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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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