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진 설렘과 그럼에도 남는 것들

2026년 병오년 음력 1월 1일 설날을 맞으며

by 풍운의 되새김질

2026년 음력 1월 1일 설날이다. 달력의 숫자는 이미 여러 번 바뀌었지만, 설날은 여전히 시간을 다시 묶어 세우는 의식과도 같은 날이다. 양력의 새해가 계산된 시간의 출발이라면, 설날은 체감된 시간의 경계이다. 몸이 기억하는 리듬, 가족의 호흡, 반복되어 온 풍경이 겹쳐지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처음’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이제 설렘은 예전 같지 않다. 어린 시절의 설날은 기다림 자체가 축제였다. 새 옷의 감촉, 세배돈의 무게, 북적이는 거실의 온기가 세계의 중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수십 번의 설을 통과하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시간은 감흥을 닳게 한다는 점이다. 반복은 설렘을 마모시키고, 기대는 경험 앞에서 점점 현실의 언어로 번역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날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뎌진 감각 속에서 더 선명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살아냈다’는 감각이다. 2025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떠올려 보면, 눈부신 사건보다 평범한 날들이 먼저 떠오른다. 특별하지 않았던 하루들이 모여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었다. 출근과 퇴근, 사람들과의 마찰, 사소한 오해와 화해, 작게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섰던 순간들이 층층이 쌓여 하나의 연도를 형성하였다.

우리는 흔히 성취를 연말의 기준으로 삼는다. 무엇을 얻었는가, 어디까지 도달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삶의 본질은 도달이 아니라 지속에 있다. 넘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넘어지고도 다시 일어났다는 사실이 더 본질적이다. 2025년을 통과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증거이다. 그것은 거창한 성공보다 묵직한 생존의 기록이다.

설날이면 덕담이 오간다. 건강과 행복,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는 말들이 반복된다. 때로는 그 말들이 형식처럼 느껴진다. 진심이 빠진 언어는 공기 중에 흩어지는 메아리처럼 공허하다. 우리는 정말 서로의 안녕을 바라는가, 아니면 관습을 수행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러나 그 질문을 조금 더 깊이 파고들면 다른 층위가 드러난다. 인간은 의례를 통해 시간을 견디는 존재이다. 형식은 공허해 보이지만, 그 형식이야말로 공동체를 묶는 장치이다. 설날 인사는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신호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 속에는 “올해도 무사히 살아 있으라”는 기도가 숨어 있다. 그것은 영혼 없는 반복이 아니라, 불안한 세계 속에서 서로를 붙드는 최소한의 언어이다.

2025년을 떠받친 것은 거대한 성취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장면들이었다. 유난히 추운 날 손에 쥔 따뜻한 컵의 온기, 무심한 듯 건네진 한마디 위로, 말없이 곁에 있어 준 사람의 존재가 시간을 지탱하였다. 우리는 거대한 사건을 기억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사소한 온기에 의해 유지된다. 삶은 대서사가 아니라 미세한 감각의 축적이다.

무뎌진 설렘은 상실이 아니라 변화이다. 쉽게 들뜨지 않는 대신 쉽게 무너지지 않는 상태이다. 젊은 날의 감정이 불꽃이었다면, 지금의 감정은 잔불이다. 불꽃은 화려하지만 짧고, 잔불은 조용하지만 오래 간다. 설날 아침의 고요함 속에서 나는 이 잔불의 의미를 생각한다. 요란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태도, 과도한 기대 대신 묵묵한 지속을 택하는 자세가 지금의 나를 지탱한다.

사람들은 늘 극적인 변화를 꿈꾼다. 새해가 되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존재는 그렇게 단번에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어제의 연장선 위에 선 오늘이다. 설날은 인생을 새로 쓰는 날이 아니라, 이미 써 내려온 문장을 다시 읽는 날이다. 그 문장에 쉼표를 찍고, 숨을 고르고, 다시 이어 쓰는 날이다.

2026년이라는 시간은 아직 비어 있다. 그 비어 있음이 두렵기도 하고 가능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다. 무너지지 않는 하루를 쌓는 일이다. 크게 도약하지 못해도 괜찮다. 다만 멈추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존재는 속도가 아니라 지속으로 증명된다.

설날 아침 떡국을 먹으며 나이를 한 살 더한다는 말을 떠올린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숫자가 늘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무뎌진 설렘은 세계에 대한 냉소가 아니라, 세계를 과장 없이 바라보는 시선이다. 기대를 줄인 자리에 평온이 자리한다.

나는 이 날을 요란하게 기념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래도 잘 버텼다.” 이 한 문장이 모든 덕담보다 진실하다.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스스로의 승인으로 한 해를 마무리한다는 점에서, 설날은 가장 개인적인 의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사를 건넨다. 형식 속에도 온기는 스며든다. 우리는 완전한 진심을 항상 표현할 수 없지만, 최소한의 소통을 통해 서로를 붙든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방식이다.

무뎌진 설렘 속에서도 남는 것이 있다. 그것은 끝까지 사라지지 않는 온기이다. 화려한 감정은 퇴색되지만, 오래 견딘 사람만이 아는 평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2026년 설날 새벽, 나는 그 평온을 붙들어본다.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것이다. 세계는 어제와 다르지 않겠지만,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많은 시간을 견딘 존재이다. 그 사실이 조용한 힘이 된다.

이 설날이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각자의 자리에서 또 한 번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무뎌진 설렘 대신 깊어진 사유로, 요란한 기대 대신 단단한 지속으로.

이 말은 의례이면서 동시에 존재를 향한 작은 축복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