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 더 기다려
모든 걸 계획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딘가에는 존재하겠지만, 적어도 저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연들도 결국은, 제 안에 오래 쌓여 있던 마음과 생각들이 이끌어온 방향일 것이란 믿음을 갖고 말이죠. 누구나 마음속에 아직 자라지 못한 작은 씨앗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있어서 그 씨앗은 '만들기'였습니다. 그런데 만들기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차마 못했습니다. 제 주변 어른들도, 친구들도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런 삶은 살아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늘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을 택하곤 했습니다. 그 방식도 꽤나 괜찮았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맛있는 걸 먹고, 좋은 곳에 다녀왔으니까요. 분명 소중한 삶이었지만 동시에 욕심이 커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론 왠지 부족한 것 같고, 뒤쳐진 것 같고, 더 빨리 달려야 할 것 같고, 다른 이들과 비교하게 되는 마음이 점점 부풀어갔습니다. 그렇게 내 안의 씨앗을 발아시킬 양분은 메말라가고,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를 좇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더군요.
제대로 가꾸어주지 못해 시들어버린 마음에, 문득문득 죄책감과 아쉬움이 일렁이는 순간이 차곡차곡 겹쳐지다가 딱 한 번,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만드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걸어온 커리어와 경험을 모두 뒤로하고, 다시 제로부터 시작하는 게 참 오랜만입니다. 아니 사실은 처음입니다. 그래서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어린아이처럼 세상이 모두 탐구할 대상으로 보입니다. 그 발견과 기쁨, 그리고 좌절이 재료가 되어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쓸 용기도 얻었습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만드는 삶을 궁금해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죠. 왜냐하면 저는 그런 게 무척이나 궁금했던 사람이었거든요. 완성된 작품의 탄생 이면에는 어떤 과정과 생생한 순간들이 있었을까 하는 그런 호기심 말입니다. 그래서 조형과 물성에 대한 탐구의 일부를 이곳에 나누어 보고자합니다. 어떤 재료는 너그럽고, 어떤 재료는 까다롭습니다.
나아가야 할 앞길이 구만리인 데다가, 아직 배우고 있는 단계라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정말 많습니다. 요즘에는 옻칠을 적용해보고 있는데, 이 옻칠이라는 게 참 묘합니다. 옻은 정말이지 '기다림의 대명사'입니다. 사전에 기다림의 동음이의어에 옻을 넣어도 될 것 같습니다.
옻은 천연재료로 이름 그대로 옻나무에서 직접 채취합니다. 6월부터 10월 사이 더운 여름철에 옻나무 줄기에 일정한 간격으로 상처를 냅니다. 그리고 그 상처에서 천천히 흘러나오는 수액을 수작업으로 긁어모읍니다. 한 나무에서 얻을 수 있는 옻은 하루에 10~20g 남짓입니다. 그리고 수액은 공기와 만나면 바로 산화되기 때문에, 채취한 즉시 옻을 걸러 불순물을 제거하는 정제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칠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복잡하면서도 정성스러운 과정입니다.
보통의 물감이나 페인트는 '마른다'는 표현을 쓰는데요, 옻은 특이하게도 공기 중의 수분을 흡수해서 굳습니다. 건조한 환경에서는 마르지 않고 촉촉하고 따뜻한 조건에서만 마르고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어딘지 생소하고 아이러니한데, 묘하게 매력적입니다.
또한 옻칠은 표면을 덮는 것이 아니라 스며드는 느낌이라, 모든 걸 덮어버리는 페인트와는 결이 다릅니다. 두껍게 바르면 쩍 갈라지고, 서두르면 얼룩이 생깁니다. 그러니 수십 번의 얇고 투명한 층을 반복해서 올려야 겉은 매끈하고, 속은 밀도 높은 표면이 만들어집니다.
다음 옻칠 작업을 하기 위해선 최소 하루, 더 제대로 경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어떤 옻칠 작업은 길면 일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하나의 작품을 위해 사계절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기술이 아니라 수양하는 태도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이런 옻칠의 특성을 알면, 선뜻 칠하기가 망설여집니다. 그래서 옻칠이라는 장르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수십 년간 묵묵히 옻칠을 해온 무형문화재 명인분들이 계십니다. 명인의 옻칠 작업 영상으로 보면 대게 웃옷을 벗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끈끈하고 먼지가 너무도 잘 붙는 옻의 성질 때문에 옷에서 날리는 먼지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맨 살에 옻이 닿아 옻독이 오르면 어쩌지 생각했지만, 옻을 오래 다루면 면역이 생긴다고 합니다. 고통을 반복해서 견디다 보면 몸이 받아들이는 재료, 그게 옻인 듯합니다.
저는 굳이 분류하자면 조급한 타입인 것 같습니다. 눈에 바로 보이는 결과를 원하고, 오래 기다리는 걸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그런데 옻 앞에서는 급히 무엇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기법을 배우고, 금속과 조형을 다루고, 마감 기법을 고민하면서 늘어가는 건 인내뿐인 것 같습니다. 작업의 속도도, 방향도, 결과도 작업자가 아닌 재료가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깨달아가는 요즘입니다.
재료마다 물성이 다르고, 물성마다 자꾸만 제게 질문을 던져줍니다. 왜 안되지? 스케치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난관에 봉착할 때면 너무도 답답해서 가슴을 퍽퍽 치기도 했습니다. 금속이든 옻이든, 무엇을 만들기 위한 단순한 재료가 아닌, 어떤 태도로 만들어야 하는 지를 가르쳐주는 스승처럼 느껴집니다. 동시에 연애초기에 도통 나와는 다른 상대를 대하는 것과도 참 닮아있네요. 점점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길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