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가쿠인리큐를 보고 나와 향한 곳은 다이토쿠지였습니다. 다이토쿠지까지 가는 것도 버스를 이용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이토쿠지에 도착했습니다. 다이토쿠지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제 기억에 남은 다이토쿠지의 이미지가 무척 휑하다는 것입니다. 넓이도 무척 넓고 탑두 사원도 엄청 많았지만, 정작 다이토쿠지 방장(方丈) 정원을 포함한 본방(本坊)은 들어갈 수 있는 날이 1년에 하루뿐이며 그 많은 22곳의 탑두 사원과 2곳의 별원 중 들어갈 수 있는 곳은 4곳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계속 봐온 일본의 정원 중 가장 소규모이고, 그리 강렬한 느낌을 주는 곳도 없어서 친구들은 거의 사진을 찍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사진을 열심히 찍은 제 핸드폰은 고장이 나버려 남은 사진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다이토쿠지에 대한 설명과 묘사가 부실할 수 있으니 이해 부탁드립니다.
다이토쿠지에 도착해서 다이토쿠지의 경내로 들어가자 처음 든 생각은 ‘이곳이 절의 경내인가 공원인가?’였습니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넓은 경내에서 눈에 띄는 것은 잘 닦인 바닥과 나무들뿐이었습니다. 미리 생각한 다이토쿠지의 모습과는 달라서 무척 당황했습니다. 한겨울 저같은 답사객은 찾을지언정 여행객이 찾을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확 들었습니다. 역시나 3일 동안, 아라시야마, 텐류지, 가쓰라리큐, 뵤도인, 슈가쿠인리큐 등을 보며 기대치가 확 올라간 친구들의 반응은 ‘이곳이 유명한 절이 맞아?’였고, 제 마음은 조금 조급해졌습니다. 하지만, 휑하기는 했어도 탑두 사원들을 비롯한 건물들이 많아 빈 공간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탑두 사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즉, 내력만큼은 다른 절들 못지않다는 겁니다.
다이토쿠지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인 1315년 다이토 코쿠시(大燈國師)에 의해 작은 규모로 세워졌습니다. 이후 천황이 이곳을 기도처로 삼으면서 1326년 큰 법당을 짓고 정식으로 다이토쿠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남북조 시대를 만든 장본인인 고다이고 천황이 1334년 천황 친정 체제인 ‘겐무의 신정(健武の新政)’를 펴면서 교토 5산의 상위에 놓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2년 만에 신정이 와해되고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5산 10찰의 최하위에 두었고, 이에 다이토쿠지는 5산에서 이탈하여 수행에만 전념하였습니다.
명맥을 이어오던 다이토쿠지는 1467년 교토를 전부 불태운 오닌의 난에 의해 불탔지만, 잇큐 소쥰(一休宗純)이 분메이(文明) 5년(1473년) 천황의 명을 받아 부흥시켰습니다. 이후 무라타 주코(村田珠光)를 포함한 히가시야마(東山) 문화의 인사들이 잇큐 소쥰의 영향을 받으면서 다도와 깊은 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본 다도에 큰 획을 남긴 다케노 조오(武野紹鷗), 센노 리큐(千利休)와 고보리 엔슈(가쓰라리큐와 슈가쿠인리큐가 엔슈의 건축 양식에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했었습니다.)까지 이곳을 거쳐 가면서 이곳은 일본 다도를 설명할 때 뺴놓을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커진 직접적인 이유가 다도는 아닙니다. 이곳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장레식을 7일에 걸쳐 성대하게 치르면서 소우켄인(總見院)을 건립하고 많은 토지를 기부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모모야마 시대의 무장들은 다이토쿠지에 탑두 사원을 하나 갖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고, 상인들 또한 다이토쿠지에 탑두를 기진하여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폐불훼석을 겪고도 22곳의 탑두 사원과 2곳의 별원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와집이 잔뜩 있는 공원과 같은 다이토쿠지가 절임을 확실히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절의 정문인 삼문입니다. 삼문을 지나 본방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2층으로 된 삼문은 조용한 공원같은 곳에서 강렬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 삼문에는 일본 ‘와비사비’의 다도를 완성으로 이끌었다는 센노 리큐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센노 리큐는 무라타 주코로부터 시작된 와비사비의 정신을 일본의 미로 완전히 정착시킨 사람입니다. 무라타 주코는 차의 본성이란 냉랭함과 검박함이니 차를 마시는 다실 또한 검소해야 하며 차를 마시며 얻어야 하는 정서적·정신적 가치로 ‘냉(冷), 동(凍), 고(枯), 적(寂, 사비)’을 말하며 이를 ‘와비차’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현재 일본미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와비’와 ‘사비’는 원래 구분된 개념이었습니다. 와비는 세상에서 동떨어져 자연 속에서 홀로 지내는 참담함과 낙담하고 허탈한 마음 그리고 생기 없는 감정의 상태를 뜻했고 사비는 원래 ‘쌀쌀한’, ‘수척한’, 메마른 등을 뜻했습니다.
와비사비의 개념을 처음 제시한 무라타 주코의 뒤를 받은 것은 다케노 조오였습니다. 그는 무라타 주코가 구상한 다다미 4장 반의 검소한 다실의 실내 구조를 설계했습니다. 토벽, 생목, 대나무 격자판 등을 사용하여 자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며 검박한 느낌을 주는 다실이었습니다. 여기에 그때까지 선호하던 화려한 다완이 아닌 투박하고 질감이 잘 살아있는 다완을 최고의 다완으로 선정하면서 와비사비의 구체적인 미감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둘의 뒤를 이어 와비사비의 미를 완전히 정착시킨 것은 센노 리큐였습니다. 그는 다케노 조오의 제자로 공부할 때부터 와비사비를 완전히 체득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마당을 쓸고 다시 낙엽을 조금씩 뿌려 놓거나 아름답지만, 대칭이 완벽한 꽃병의 한쪽을 일부러 부러트려 사용하는 등 이미 어렸을 때부터 와비사비의 불완전함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미적 감각을 바탕으로 와비차의 형식과 내용을 모두 정립했습니다. 그는 차의 기본 정신을 화(和)·경(敬)·청(淸)·적(寂)으로 정의하였습니다. 화는 주인과 손님이 만나는 마음에 온화함이 있다는 것이고, 경은 서로를 대하는 마음에 공경이 있다는 뜻이며, 청은 차를 마시는 동안의 맑은 마음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적은 차를 마시고 얻는 고요하면서도 쓸쓸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내면화되어 와비차라는 한 삶의 방식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센노 리큐는 다도의 방식을 더욱 검소하게 바꾸어 4장 반의 다실을 2장, 3장으로 줄이고 도코노마에 올리는 장식도 최소화했습니다. 검소함을 극도로 추구하여 자연과 연결되도록 하고 화려함 속에 나타나는 미가 아닌 소박함 속에 숨겨진 완전한 정신의 미를 형식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이렇듯 와비사비를 정립하여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은 센노 리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회(茶會) 책임자인 다두(茶頭)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동하는 황금 다실을 만들어 사용할 정도로 화려한 것을 추구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검박한 것을 추구하는 센노 리큐는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주 다회에 참석하러 자주 지나다니는 다이토쿠지의 삼문에 센노 리큐의 초상조각을 기진했다는 이유로 죽고 맙니다. 초상조각의 발밑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계속 지나다니니 반역을 꾀했다는 것이 이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다만, 난젠지나 지온인의 삼문에도 그 삼문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의 초상조각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센노 리큐를 죽이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입니다.
센노 리큐의 비극이 있는 삼문을 보고, 본방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아쉬워하다 탑두 사원으로 향했습니다. 평상시에 볼 수 있는 탑두 사원은 22곳 중 4곳입니다. 탑두 사원마다 입장료를 따로 걷어 저와 친구들은 4곳 중 2곳만 가보았습니다. “여길 가보자!”하고 간 것은 아니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눈에 띄는 곳 2곳을 들어갔습니다. 한 곳은 료겐인(龍源院)이고 다른 곳은 다이센인(大仙院)이었습니다.
료겐인은 1502년 무로마치 막부 말기에 토케이 소보쿠(東渓宗牧)의해 세워진 절로 대부분의 일본 선종 정원이 그렇듯 마른 산수 정원인 가레산스이(枯山水)식 정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때 정식으로 가레산스이식 정원만 있는 절을 처음 만났는데 친구들이 무척 지루해하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정원은 그렇게 넓지는 않았지만, ‘가레산스이식 정원이 이런 것이다.’라는 느낌은 확실하게 주었습니다.
다이토쿠지 경내 가장 안쪽에 있는 다이센인(大仙院)은 1509년 코가쿠 소코(古岳宗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곳도 선(禪)적 느낌을 강하게 주는 가레산스이식 정원이 있습니다. 다만, 역시 돌과 자갈, 이끼와 나무로 이루어진 관조적이고 정적인 정원이라 친구들은 조금 답답해했습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는 “다른 마른 산수 정원과 달리 정원석의 배치가 힘차고 다이내믹하다. 마치 험준한 산세를 박진감 있게 그린 북종 산수화를 입체적으로 구현한 것 같다는 평을 받고 있다.”라고 쓰여 있지만, 미술에 문외한인 친구들은 물론이거니와 흥미와 관심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저도 그렇게 강렬한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잘 만들어지고 잘 가꾸어진 정원이라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그렇게 조금 김빠졌던 다이토쿠지 여행은 끝났습니다. 일본의 선종 정원을 좋아하신다면 각기 다른 4곳의 탑두 사원에서 작은 규모지만, 잘 경영하고 있는 다양한 정원들을 구경하며 언제든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명상적이고 관조적인 일본의 정원과 맞지 않는 분이라면 여행객에게는 추천하지 않는 절입니다. 물론, 다도의 중심이었다는 점이나 각기 다른 4개의 잘 꾸며진 탑두 사원 정원을 생각해보면 답사객에게는 필수적으로 가야하는 곳입니다. 친구들에게는 맞지 않았고, 저에게는 당황스러웠던 다이토쿠지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글을 쓰며 4년 전의 제가 놓치고 간 것이 너무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중에 교토에 가면 꼭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곳이 되었습니다. 다시 교토에 가게 된다면 혼자 차분히 다이토쿠지의 경내를 둘러보고 선종 정원의 참맛을 맛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