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토쿠지를 보고 나와 버스를 타고 킨카쿠지로 향했습니다. 교토에 하루만 있을 수 있다면 누구나 망설이지 않고 환상의 금각을 가진 킨카쿠지와 교토의 시내가 멋지게 펼쳐지는 ‘청수의 무대(淸水の舞台, 기요미즈노부타이)’를 가진 기요미즈데라부터 가라고 모두 추천할 겁니다. 교토의 무수히 많은 사찰들 중에서도 교토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사찰이 바로 킨카쿠지입니다.
킨카쿠지의 명성을 널리 퍼뜨린 금각을 보기 이전에 밥부터 먹기로 했습니다. 다이토쿠지까지 보고 나왔을 때가 이미 2시 경이었으니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죠. ‘금각도 식후경’이니 금각사 앞의 식당에 무엇이 있나 두리번거리며 찾는데 우동집이 눈에 띄었습니다. 들어가서 우동을 먹는데 한국에서 먹는 우동이랑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좀 더 맛있는 정도의 차이일까요? 다만, 메뉴가 무척 다양했습니다. 저는 안전하게 야채튀김이 얹어진 우동을 골랐는데 친구는 거침없이 생선구이가 올라간 우동을 골랐습니다. 저는 비린내가 날 것 같아 입도 대기 싫었는데 친구는 맛있다며 잘만 먹더군요. 신기했습니다.
배를 채우고 났으니 이제 금각을 보러 갈 차례입니다. 저와 친구 A는 금각을 보는 것이 두 번째였고 친구 B는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2013년 초가을에 금각을 보고 2018년 초의 겨울에 금각을 다시 보는 것이었으니 4년만이었죠. 무척 화려하다는 것과 금각의 모습은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지만, 다시 한 번 볼 때 어떤 감동을 줄지 무척 설렜습니다. 처음 보는 친구의 반응도 무척 기대가 되었습니다.
금각의 이름만 들어도 기대가 되는 킨카쿠지의 본래 이름은 로쿠온지(鹿苑寺)로 쇼코쿠지(相國寺)의 말사(末寺)입니다. 정확히는 산외탑두(山外塔頭)지요. 쇼코쿠지와 로쿠온지는 모두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 기타야마(北山)문화를 대표하는 절들입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길었던 남북조 시대를 끝내고, 정치적 안정기를 가져왔으며, 명과의 무역으로 경제를 부흥시켜 문화의 융성을 이끌어낸 쇼군입니다. 이 당시 기타야마 문화의 특징으로는 공가(公家)와 무가(武家), 선종 불교의 융합입니다. 그래서 금각의 1층인 홋스이인(法水院)은 공가의 신텐즈쿠리(寢殿造) 양식이고, 2층인 쵸온도(潮音洞)은 무가의 쇼인즈쿠리(書院造) 양식이며, 3층인 굿쿄쵸(究竟頂)는 선종 불전 양식입니다.
기타야마 문화 위에서 만들어진 킨카쿠지를 만든 것은 당연히 아시카가 요시미쓰였습니다. 요시미쓰는 쇼코쿠지를 만들고 난 뒤 쇼군 자리를 아들인 요시모치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후 출가를 하여 승려가 되었으나 여전히 다이조다이진(太政大臣, 조선시대로 치면 영의정)의 자리는 내주지 않고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원래 쓰던 처소는 아들에게 내어주고, 자신이 지낼 처소를 짓기 위해 지금의 킨카쿠지 땅을 매입했습니다. 원래는 가마쿠라 시대 다이조다이진까지 지냈던 사이온지 가문이 대대로 ‘기타야마데이(北山第)’라는 별장을 짓고 이 땅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요시미쓰가 1397년 사이온지 긴츠네(西園寺公經)로부터 사들여 별저를 짓고 ‘기타야마도노(北山殿)’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이 기타야마도노는 극락정토를 이 세상에 표현했다고 할 정도로 화려했습니다. 겉면을 모두 금칠한 금각말고도 몇 채의 건물이 더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와 웅장함이 잘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건물들을 짓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요시미쓰는 기타야마도노를 짓기 위해 명나라와 무역을 합니다. 이것이 ‘감합무역’이라고 합니다. 감합은 사신의 내왕에 사용되던 확인 표찰로 이 표찰을 가진 선박만 무역을 할 수 있는 제도가 감합무역입니다. 감합무역을 하면서 명은 일본에 두 가지를 요구했는데 하나는 왜구를 진정시켜달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명의 조공·책봉체제에 들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시미쓰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요시미쓰가 ‘일본국왕(日本國王)’이라는 책봉문을 명나라로부터 받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조공·책봉 관계가 맺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요시미쓰는 일본에는 없는 일본국왕이라는 칭호를 명나라로부터 받으면서 자신은 명나라의 신하인척 하되 가장 높은 천황은 책봉도 받지 않고 자신보다 높으므로 그 지위가 격하되지 않게 한 것입니다. 요시미쓰의 영리한 면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요시미쓰도 세월은 이기지 못해 1408년 51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이후 기타야마도노는 그의 아내가 살았으나 10년 뒤 그녀마저 죽자 그의 아들인 4대 쇼군이 1420년 요시미쓰 사망 후 유언에 따라 무소 소세키(텐류지의 정원을 조영한 승려)를 권청 개산으로 하여 로쿠온지라는 절로 변모시켰습니다. 로쿠온(鹿苑)은 승려였던 요시미쓰의 법호(法號)입니다. 이때 금각은 사리를 모시는 사리전으로 바뀌었습니다.
별장에서 절이 된 로쿠온지의 내력까지 알아보았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금각을 감상할 차례입니다. 정문인 총문(總門)을 지나 매표소로 가서 표를 끊으면 부적을 함께 줍니다. 집안의 안전을 기원하고 운이 트이고 복이 오도록 하는 부적입니다. 4년 전의 수학여행 때도 똑같은 걸 받았었기에 신기하면서도 그리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매표를 한 후 당문을 지나 정원길을 조금 걸으면 금각이 드라마틱하게 드러납니다.
‘거울 호수'라는 뜻을 가진 교코치(鏡湖池)의 수면에 비치는 금빛 누각의 형상을 시작으로 금칠이 되지 않은 기품 있는 1층과 금칠이 된 2, 3층까지 눈이 즐거워집니다. 화려하다, 아름답다, 멋있다와 같은 말이 다 어울리기는 하지만, 금각이 가진 미를 전부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금각의 기품 있는 화려함을 제대로 표현한 것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소 유홍준 교수가 말한 ‘시각적 관능미’라는 단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각적 관능미란 말만 들어서는 금각의 아름다움이 명확히 전달되기 쉽지 않으니 미사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에 나온 금각의 묘사 부분을 인용하여 금각의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금각은 뒤쪽으로부터 달빛을 받아 검고 복잡한 그림자를 겹겹이 드리운 채 조용했고, 굿쿄쵸의 화두창 틀만이 달의 매끄러운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구경정에는 벽이 없었기에 그곳에는 희미한 달빛이 살고 있는 듯했다.
(…)
금각은 점차 깊숙이, 견고하게, 실재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그 기둥 하나하나, 화두창, 지붕 꼭대기의 봉황 등이 손으로 만질 듯이 선명히 눈앞에 떠올랐다. 섬세한 세부와 복잡한 전모는 서로 어우러져, 음악의 한 소절을 떠올리면 그 전체가 흘러나오듯이 어느 한 부분을 집어내도 금각의 전모가 울려 퍼졌다.”
금각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까지 표현한 이 ≪금각사≫라는 소설은 1950년 한 정신분열증 승려의 방화로 금각이 타버린 사건을 각색하여 쓴 것입니다. 현 금각은 1955년 복원한 금각의 금칠이 떨어지자 1987년 다시 금칠을 한 것입니다. 메이지 시대 대대적인 수리를 한 도면이 있어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복원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복원된 금각은 다시 교토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미사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는 무척 유명합니다. 킨카쿠지를 떠올릴 때 빼놓을 수 없는 소설이죠. 제가 금각을 마주했던 2번 모두 소설 ≪금각사≫를 모른 채로 그저 금각의 아름다움만을 즐겼었습니다. 하지만, 소설 ≪금각사≫를 알게 되고 나서는 킨카쿠지를 떠올리면 씁쓸함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금각사≫의 작가 미사마 유키오 때문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을 받았고, 이후에는 노벨 문학상 후보에도 오른 작가이지만, 그의 최후는 잘못된 사상에 빠진 한 미친 인간으로만 보입니다. 평화 헌법의 폐기와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주장하며 자위대에서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의 이야기는 우리나라가 직접 당했고, 여전히 종종 볼 수 있는 일본 극우주의의 밑바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극우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금각 앞에서 이제는 일본 극우주의를 떠올릴 수밖에 없으니 씁쓸함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킨카쿠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금각이기는 하지만, 금각을 본다고 킨카쿠지를 다 둘러본 것은 아닙니다. 교쿄지를 한 바퀴 돌고 정원을 둘러본 뒤 셋카테이(夕佳亭)라는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소담한 다실까지 봐야 킨카쿠지 여행이 마무리됩니다. 저녁에 셋카테이에 앉아 노을 지는 금각을 바라보는 것이 무척 아름답다고 하나 볼 수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그 환상적인 광경을 상상해보고 조용히 빠져나오면 이제야 킨카쿠지를 다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토의 상징과도 같은 킨카쿠지의 금각은 여전히 제 맘속에 환상의 아름다움을 가진 건물로 남아 있습니다. 미사마 유키오라는 인물 때문에 씁쓸함이 조금 묻어있지만, 그 씁쓸함을 뒤덮고도 남는 기타야마 문화의 향취가 짙게 나는 금각은 여전히 교토에서 꼭 봐야하는 건물입니다. 당시 문화의 선구자였던 공가와 권력의 중심이었던 무가, 중국의 선진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여 토착화시키는데 앞장섰던 선종 불교가 뒤섞인 일본만의 미가 금빛의 화려함에 기품을 더하여 우아함과 장엄함으로 불순한 사상을 전부 덮어버리고 보는 이를 황홀경으로 데려다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