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나지~기온~니시키 시장
료안지를 다 보고 시간이 좀 남아 료안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닌나지(仁和寺)를 볼 수 있으면 보고자 했으나 폐장 시간이 가까워 보지는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목표한 것을 다 보았으니 조금 아쉬운 정도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다이토쿠지말고 정원이 훨씬 화려한 닌나지를 봤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4년이나 지나간 일을 가지고 후회할 필요는 없으니 닌나지는 나중에 교토에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닌나지 앞에서 입장을 하지 못하고 버스 정류장에 섰을 때가 되어서는 서쪽으로 해가 조금씩 넘어가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습니다. 킨카쿠지에서 료안지, 료안지에서 킨카쿠지까지 걷느라 지친 저와 친구들의 배는 이미 꼬르륵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이 날의 저녁은 교토에서 먹는 마지막 저녁이었기에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습니다. 어제 먹지 못한 이즈주의 고등어 초밥을 먹자는 데는 다 동의했습니다만, 그 이후에 먹을 것에 대해서 의견이 크게 갈렸습니다. 저와 친구 B는 라멘을 먹자고 했고, 친구 A는 비싸지만 야키니꾸(焼肉)를 꼭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의견 차이는 닌나지에서 버스를 타고 기온에 도착할 때까지 좁혀지지 않아 결국 고등어초밥을 먹고, 라멘을 먹은 후 야키니꾸를 먹기로 했습니다.
기온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니 이미 교토에는 저녁을 넘어 밤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즈주를 갔는데 오늘도 재료가 소진되어 있더군요. 저야 초밥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 큰 상관이 없었지만, 친구들의 표정은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마음을 다 잡고 골목 안의 라멘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떤 라멘을 먹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저의 20여 년 인생동안 가장 맛있는 라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고기와 달걀부터 시작해서 고명이 그렇게 많이 쌓여 있는 라멘이라니. 육수도 무척 맛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일본에 와서 고작 라멘으로 저녁을 때운다는 친구 A도 맛을 보고서는 무척 괜찮았다고 평을 내렸습니다.
라멘 한 그릇씩을 배불리 먹었으니 셋 다 전부 배가 빵빵해졌습니다. 그래서 야키니꾸를 먹을 배를 비우기 위해 야키니꾸집까지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가는 길에 스타벅스를 보았는데 다다미가 깔린 좌석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문화를 저런 식으로 잘 융합시키는 일본이 무척 신기하면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온돌도 저렇게 융합시킬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야키니꾸집까지 걸어가는 길은 좀 멀었습니다. 스타벅스를 지나 가모강(鴨川)을 따라 걸어 올라간 후 강 반대편으로 건너가야 했습니다. 가모강에는 가로등이 하나도 없어 강변에 위치한 건물들의 불빛에 의지하여 걸어야 했습니다. 건물에서 나온 불빛이 강물에 반사되어 보이면 무척 운치 있을 것 같지만, 빛 자체가 무척 적어 운치는 없고 무서움만 더해졌습니다. 혼자 다니면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오싹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여행의 흥겨움과 더불어 그 오싹함을 떨쳐내려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걸었는데 이게 앞의 사람들에게 들렸는지 저희를 힐끗 보고는 도망가더군요. 부끄럽고 죄송했습니다. 밤의 가모강을 자주 다니는 현지인들은 자주 느껴지는 침묵보다 소음이 더 어색했겠죠. 아마 저희를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어둠만이 가득한 가모강을 지나 불빛 가득한 교토 시내로 들어와 야키니꾸집을 찾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이 가득하더군요. 30분 이상씩 줄을 서야 했습니다. 두 번이나 허탕을 치고, 헤매고 헤맨 후에야 야키니꾸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야키니꾸를 먹자고 강력히 주장했던 친구 A는 저희에게 미안함을 표시했지만, 이 여행을 이끌어온 친구 A의 노고를 생각하면 그 정도의 고생이야 새발의 피였죠.
길고 긴 시간을 헤매다 야키니꾸집에 들어갔으니 라멘은 이미 위장에서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배도 고픈데 화로에 올려놓고 먹는 소고기를 누가 싫어할까요? 가격은 꽤 비쌌지만, 양껏 먹었습니다. 소의 여러 부위를 맛보았는데 그날 가장 맛있었던 부위는 소의 혀, 우설(牛舌)이었습니다. 입 안에서 살살 녹더군요. 세상에 그런 고기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비싼 것은 비싼 값을 한다면서 맥주와 함께 맛나게 먹고 나오니 8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또 배불리 먹은 김에 그곳에서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하고 이리저리 걷는데 시장이 나왔습니다. 교토에서 가장 유명한 시장 중 하나인 니시키 시장(錦市場)이었죠. 밤이 되어 많은 곳들이 문을 닫았지만, 붕어빵 비슷한 것을 파는 곳이 있어 사 먹어 보았습니다. 저는 배가 불러 먹지 않아 맛은 모르지만, 친구들은 맛있다고 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우연하게 유홍준 교수가 자주 간다는 서점 중 하나인 헤이안도(平安堂) 서점을 발견하고 신기해하기도 했습니다.
시장을 빠져 나와 대로를 걷는데 대형 서점 하나가 있어 들어가 보았습니다. 신촌에 있는 홍익문고 크기의 그 서점에서 일본의 이런저런 책들을 구경했지만, 일본어를 잘 모르니 살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9시가 폐점 시간이라는 방송이 계속해서 나와 부리나케 빠져나오니 대로인데도 거리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참 밤에 놀기 좋은 나라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대로를 따라 숙소로 오는 길에는 고층건물이 많았습니다. 사적지와 문화재들을 찾아다니며 높이 낮은 건물들만 보아왔던 저에게는 오히려 이런 고층건물들이 무척 생경했습니다. 이날은 보름인데다 하늘도 맑아 달이 무척 밝은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고층건물의 화려한 빛까지도 이겨낸 강한 빛은 고층건물 사이사이에서 우리를 향해 오라 손짓하는 듯했습니다. 그 빛을 따라 걸으니 어느새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月ぞしるべこなたへ入らせ旅の宿
달이 안내자
이쪽으로 오시오
여행자 쉴 곳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달빛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숙소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편의점에서 사온 호로요이(ほろよい)였습니다. 도수는 낮아 저와 친구들을 많이 취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복숭아, 멜론, 콜라, 포도 등 다양한 맛으로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몸과 마음 모두 피곤했지만, 술로 즐거워진 입은 쉬지 않고 이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듯 말을 내뱉었습니다. 교토에서 맞는 마지막 밤은 달빛과 술 속에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들을 가득 채우며 깊어져만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