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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만 이천 분사의 본사, 후시미이나리타이샤伏見稲荷大社

기요미즈고조역~후시미이나리역

by baekja

산넨자카를 내려와 기요미즈고조(清水五条)역으로 향했습니다. 기요미즈데라에서 기요미즈고조역까지는 1.4km정도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기요미즈데라에서 기요미즈고조역까지는 큰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인도 옆의 넓은 차도를 지나가는 무수히 많은 자동차들을 보며 문득 역사 도시라고만 생각했던 교토에서도 평범한 일상이 계속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기요미즈데라에서 눈을 보며 감탄하고 있는 동안 출근하는 이들은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지고 출근이 오래 걸리는 것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교토의 역사에는 조금 가까워졌을지 몰라도 교토의 일상과는 여전히 거리를 두고 있다는 서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20여분 정도 걸어 기요미즈고조역에 도착해 게이한혼선을 타고 내린 곳은 후시미이나리역이었습니다. 역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기요미즈데라 다음의 여행지는 빨간색의 도리이가 물결처럼 이어져 길을 이루는 센본도리이(千本鳥居)가 유명한 후시미이나리타이샤였습니다. 역 근처에는 아직 꽤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기요미즈데라에서 끝없이 쏟아지던 눈은 어느새 그쳐있었습니다. 다만, 하늘은 여전히 흐렸습니다.


다른 문화재나 유적지들이 철도역에서 꽤 떨어져 있던데 비해 후시미이나리타이샤는 후시미이나리역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사실 후시미이나리타이샤의 인상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한국인이 신사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무척 힘드니까요. 그저 신사의 아침 행사를 지켜보고 동전함에 동전을 넣고 줄을 흔드는 등의 단순한 참배만 했습니다. 후시미이나리타이샤가 다른 신사와 무엇이 다른지 확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아, 한 가지는 확실했습니다. 사람이 많다는 것. 후시미이나리타이샤는 여태껏 본 어느 신사보다 넓었음에도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꽤 이른 아침인 것도 생각해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신사에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에 와서 찾아보니 후시미이나리타이샤는 일본 전국에 있는 약 32,000분사의 본사이자 연마다 1천만 명 이상이 찾는 일본에서 가장 큰 신사 중 하나라고 합니다. 후시미이나리타이샤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신사 중 하나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후시미이나리타이샤를 세운 것도 아라시야마에서 활동을 많이 했던 신라계 도래인 하타씨였습니다. 이미 6세기부터 후카쿠사(深草, 후시미와 그 주변 지역)에서 뛰어난 영농기술로 부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지역을 계속 발전시키던 중 711년 하타노 이로구(秦伊呂具)가 이나리산의 세 봉우리에 신사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면서 창건한 것이라 합니다. ≪야마시로국풍토기(山城國風土記)≫에는 하타씨의 먼 조상이 부유하여 떡을 화살 과녁으로 삼자 떡이 백조로 변하여 이나리산 봉우리로 날아가서 앉은 곳에 벼가 생겨나서(伊穪奈利生) 그곳에 신사를 지어 이나리사(伊奈利社)로 칭했다는 창건설화가 남아 있습니다. 한자가 눈에 익으신 분이라면 눈치 채셨겠지만, 창건 당시의 이나리사의 한자표기와 지금의 이나리사의 한자표기가 다릅니다. 지금의 이나리(稲荷)라는 표기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루이쥬코쿠시(類聚国史, 유취국사)≫ 827년 5월조에서라고 합니다.


역사가 오래되고 교토를 부흥시킨 하타씨가 만들었다고 해서 신사가 이렇게 번창했다고 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합니다. 이나리사를 이렇게까지 부흥시킨 것은 그 신앙입니다. 창건설화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전국 이나리사와 이나리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오곡풍양의 식물신이자 농업을 담당하는 신입니다. 이름은 우카노미타마(宇迦之御魂神)입니다. 이 우카노미타마는 통상적으로 ‘이나리신’ 혹은 ‘오이나리상’이라고 불리고 있죠. 이 이나리신은 앞에서 말했듯이 원래 농업신이었으나 양잠과 기직을 통해 부를 축적한 하타씨의 영향을 받아 상공업신의 성격이 부가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에도 시대에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이나리신은 상공업의 수호신으로 전국 각지에 퍼졌습니다. 후시미이나리타이샤로부터 이나리신의 권청이 유행하면서 당시 에도에서 가장 흔한 것으로 “화재, 싸움질, 이세야(伊勢屋)라는 가게, 개똥, 그리고 이나리사”가 꼽힐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상공업의 수호신으로 널리 전국에 널리 퍼지다보니 몇몇 집에서는 가옥신으로 이나리신으로 모시고 회사와 공장 혹은 빌딩 옥상에 이나리신을 모시는 경우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대중적인 신사 신앙인 것이죠.


이렇게 대중적이고 흔한 신사이지만, 이나리신사에는 가장 큰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대부분의 여우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붉은 도리이와 함께 있는 여우상은 이나리신사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후시미이나리타이샤에도 많은 수의 여우상이 있지만, 당시의 저와 친구들은 ‘여우상이 있구나.’라고만 생각하고 넘어갔었습니다. 여우는 이나리신의 사자로 간주됩니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 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여우가 도작을 수호하는 밭의 신으로 여겨졌다는 설, 벼이삭과 여우 꼬리가 비슷하다는 설, 우키노미타마의 별명인 ‘미케쓰’를 ‘미케쓰(三狐)’에 빗대어 여우를 이나리신의 사자로 여기게 되었다는 설 등 무척 다양합니다. 이나리신앙이 헤이안시대에 밀교 신격인 ‘타지니천(吒枳尼天)’과 습합한 결과 여우와 타지니천이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여우가 이나리신의 사자가 되었다는 신불습합(神佛習合)에 연관지어 해석하는 설도 있습니다.


몇몇 일본인들은 후시미이나리타이샤 본전의 주변에서 참배를 하고 돌아가지만, 많은 이들은 계단을 타고 올라 산을 따라 붉은 물결이 계속 이어지는 센본도리이를 보러 후시미이나리타이샤의 뒤쪽으로 향합니다. 센본도리이를 향한 행렬을 따라 저와 친구들도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을 맞으며 계단을 한 발짝씩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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