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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고요함, 붉은색, 센본도리이(天本鳥居)

후시미이나리타이샤

by baekja

정보가 범람하는 요즘은 많은 여행지들에 대한 사진과 정보가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보를 통해 사전조사를 하는 많은 여행객들은 여행지에 대한 기대감을 키웁니다. 꽤 많은 경우 여행지가 그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몇몇 여행지는 그 기대감을 충족시키다 못해 평생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기기도 합니다. 후시미이나리타이샤의 센본도리이가 제게는 그랬습니다.


산길을 따라 1만 여개의 도리이가 늘어서있다는 후시미이나리타이샤의 센본도리이 초입은 좋은 의미로 예상한 그대로의 광경을 보여줍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선 주칠이 된 도리이들은 개별적인 모습들을 잠시 지우고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거대한 터널을 만들어냅니다. 틈새로 들어오는 자연의 빛과 모습은 어둡기만 한 우리가 흔히 만나는 어두운 터널과는 달리 마음에 편안함을 가져다줍니다. 속세와 신역인 신사의 경계를 나누던 붉은 문들의 이어짐은 속세도 신역도 아닌 경계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듯한 묘하면서도 초월적인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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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길고 긴 터널을 따라 산길을 오르다보면 끝이 없이 이어지던 도리이의 행렬이 끊어지고, 길을 따라 듬성듬성 도리이가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산을 따라 오르는 붉은색의 물결에 온통 마음이 뺏겨있던 여행객들은 그 즈음 주변을 둘러보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센본도리이의 붉은색 물결을 감상하러 온 여행객들에게 선택을 요구하는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서있는 그림으로 된 표지판을 보니 하나의 길은 이나리 산의 정상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의 길은 다른 길로 돌아서 후시미이나리타이샤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친구들과 저는 눈 내리는 풍경을 얼마나 더 볼 수 있겠냐며 별 고민 없이 산의 정상으로 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다만, 왕복으로 2시간 되는 산길을 걸을 것이란 생각은 못한 채로요.


이나리산을 오르면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수히 많은 도리이들과 산 곳곳에 있는 섭사와 말사입니다. 섭사와 말사에는 꼭 촛불을 사서 불을 붙이고 꽂을 수 있는 곳들이 있었습니다. 눈이 점차 거세지는 데도 꺼지지 않고 어두운 함 안에서 불빛을 은은하게 내는 촛불들은 거센 세상의 풍파에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을 상징하는 듯했습니다. 도리이들과 이나리산 곳곳에 자리한 작은 신사들을 보며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오르던 중 숨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과 마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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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연못과 그 연못가에 아늑하게 자리한 자그마한 신사. 수면 위로 나풀나풀 내려앉는 눈송이들. 그 눈송이들과 함께 나려온 바람이 일으키는 조용한 파문. 고요함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다 못해 고요함이 오감 전체를 지배하는 그 광경은 이 한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 교토를 방문했다 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의 강렬한 느낌을 제게 주었습니다. 평온함과 고요함이 그토록 강렬하고 명확한 풍경으로 다가온 것을 저는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느낀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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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水に降る水の中から降る


물에 내리는 눈

물속으로부터

내리네


-오기와라 세이센스이(荻原井泉水)



降るをさへわするる雪のしずかさよ


내리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의

눈의 고요함


-후지모리 소바쿠(藤森素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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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연못과 작은 신사의 모습을 눈과 마음에 양껏 담은 후에 다시 이나리산의 정상을 향했습니다. 산길을 오르는 중간에 신사의 여러 참배용 물품을 파는 상점에 들어가 구경하고, 섭사 주변에 잔뜩 있는 비석과 그 비석에 놓인 작은 도리이들을 보며 신기해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이나리산에서 다양한 신들의 비석을 모시는 것을 오즈카(お塚)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오즈카신앙은 메이지 정부의 신불분리령 이래 후시미이나리타이샤의 신호(神號)가 통일되고 다른 신명을 사용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이나리산에 비석을 세워 여러 민간신앙의 신을 모시게 된 것이 시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비석의 수가 계속 늘어남에 따라 이를 신사 측에서 규제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비석 대신 산길을 따라 도리이를 봉납하는 관습이 생기면서 센본도리이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도리이를 살펴보면 봉납한 사람과 봉납한 날짜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계획을 세워서 센본도리이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소망이 하나씩 모여서 센본도리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Inked1518270343786_LI.jpg 저와 친구들 뒤로 보이는 것이 비석과 작은 도리이입니다


사람들의 소망을 담은 문을 하나씩 지나고 계단을 천천히 오르다보니 어느새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정상에 도착하니 눈이 더욱 세차게 내려 맑은 날 이나리산 정상에서 보인다는 교토 시내의 풍광은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하얀 장막이 정상 주변을 둘러싸 무척 신비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가만히 서서 그 장막을 하염없이 바라보니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오직 제 자신이 딛고 서있는 땅과 느끼는 감각만이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只居れば居るとて雪の降りにけり


다만 있으면

이대로 있을 뿐

눈은 내리고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그렇게 온통 눈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제 존재를 감각하고 있는 동안 친구 B는 초를 하나 사왔습니다. 그리고 바람과 눈이 가득한 정상에서 어떻게 불을 잘 붙여서 함에 꽂았습니다. 친구가 빌었던 소원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모두 진심으로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만은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내려오는 길은 눈이 녹아 미끄러웠지만, 올라올 때만큼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정상을 향해 급하게 올라오던 때와는 달리 내려갈 때는 조금 여유를 두고 사람이 없는 정상에서 도리이에 기대 사진도 몇 장 찍으면서 즐겁게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면서 친구들은 이렇게 높은 줄 알았으면 웬만하면 안 왔다는 말과 더불어 눈이라는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요소가 아니었다면 정상 근처까지 왔어도 중간에 돌아갔을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내려오니 금방 후시미이나리타이샤 본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낮이 되어 사람들은 더욱 늘어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대중적인 신앙의 본사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Inked1518270344114_LI.jpg 내려오는 길에 찍은 사진


지금 다시 생각해보아도 이나리산을 따라 걸으며 센본도리이를 보았던 그 순간은 마치 꿈과도 같습니다. 보는 모든 이의 시선을 빼앗는 붉은색 문들의 행렬, 산 중턱의 작은 연못 위로 떨어지던 작은 눈꽃송이, 정상 위에서 나를 휘감았던 눈의 장막까지. 이번 생에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모를 풍경들을 제가 담아갈 수 있었던 것은 행운 그 자체였다고 생각합니다. 제 기억에 고요함 그 자체로 남아버린 그 풍경들을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제가 느꼈던 겨울 후시미의 정취를 담은 와카(和歌)로 후시미이나리타이샤 회상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夢かよふみちさへたえめ吳竹のふしみの里の雪の下おれ


꿈이 오가는 길마저 끊어졌네

후시미 마을 (오죽)가지 눈에 꺾이는 소리


-아리이에 조신(有家朝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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