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목적지는 사이호지였습니다. 아라시야마 근처에 있는 사이호지까지 가는 길은 꽤 멀었습니다. 교토의 남쪽에서 서쪽으로 다시 가는 것은 썩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후시미이나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어딘가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야 했습니다. 새벽부터 이곳저곳 힘차게 돌아다닌 저와 친구들은 피로에 지쳐 대중교통에서 별 말 없이 창가를 내다보거나 쪽잠을 잤습니다. 버스가 아라시야마를 지날 때는 어찌나 반갑던지. 한참을 창밖을 내다보며 3일전 교토에 도착했을 때의 순간들을 하나씩 떠올렸습니다. 그렇게 깊은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버스가 사이호지에 도착했습니다.
사이호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하루에 관광할 수 있는 횟수와 인원수가 정해져 있는 절입니다. 전에 말했던 가쓰라리큐와 슈가쿠인리큐보다 하루에 관광할 수 있는 인원수가 더 적습니다. 거기에 예약도 가쓰라리큐와 슈가쿠인리큐보다 어렵습니다. 이제는 세 달 전에 예약하기는 하지만, 인터넷으로 예약 가능한 가쓰라리큐와 슈가쿠인리큐와는 달리 사이호지는 두 달 전에 편지를 보내 예약해야 합니다. 외국인들은 정말 예약하기 힘든 방식이지만, 친구 A가 열심히 편지를 보내 준 덕분에 사이호지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사이호지는 무척 조용합니다. 다른 절들과 달리 예약한 소수의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고, 주차장과 절과의 거리도 조금 떨어져 있어 교토에서 본 모든 문화재 중 소음과는 가장 거리가 먼 절이었습니다. 조용한 분위기를 느끼며, 겨울임에도 녹음이 우거진 좁은 포장된 길을 따라 꺾어 들어가면 사이호지의 입구가 나타납니다. 사이호지의 본격적인 감상 전에 사이호지에서는 본당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염불을 들으며 반야심경을 붓으로 베껴 쓰게 합니다. 그것을 다 베껴 쓰는 사람은 거의 없고, 염불 소리를 들으며 절의 분위기를 한껏 느끼다 5분 쯤 지나면 한 두 사람씩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때 같이 나와 사이호지가 자랑하는 치센카이유식 이끼 정원을 감상하면 됩니다.
고케데라(苔寺, 이끼절)라는 별명이 말하는 것처럼 사이호지의 정원은 온통 이끼로 가득합니다. 이끼는 오랜 시간에 걸쳐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절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끼를 심은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처음에는 이끼가 없었습니다. 또한, 치센카이유식과 카레산스이식으로 대표되는 선종 정원으로 선정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이호지연기(西芳寺緣起)≫와 ≪무소코쿠시연보(夢窓國師年譜)≫의 기록에 따르면 원래 쇼토쿠 태자의 별서로 지어졌던 건물을 교기(行基) 스님이 덴표 연간(729~749)에 쇼무(聖武) 천황의 칙명에 의해 재건하여 사구원(四九院)을 만들었는데 이 중 하나인 사이호지(西方寺)가 현재 사이호지(西芳寺)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사세가 강하였으나 이후 점차 쇠퇴하던 것을 겐큐(建久) 연간(1190~1199) 연간에 나카하라 모로카즈(中原師員)가 정토종 사찰로 재건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 절이 본격적인 주목을 다시 받게 된 것은 무로마치 막부 때입니다. 막부의 중신이었던 셋쓰 치카히데(攝津親秀)가 랴쿠오(曆応) 2년(1339)에 무소 소세키를 초청하고 이름을 사이호지(西芳寺)로 개명하고 종파를 선종의 일파인 임제종(臨濟宗)으로 바꿉니다. 무소 소세키는 이 사이호지 정원을 치센카이유식, 카레산스이식 등의 선종 정원 양식으로 조영하고, 텐류지까지 선종 정원 양식으로 조영하여 지금 우리가 아는 일본 선종 정원의 기틀을 잡았습니다.
사이호지는 조선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가키쓰(嘉吉) 3년(1443) 일본통신사로 방문했던 신숙주가 사이호지를 보고 쓴 기록인 ≪일본서방사우진기(日本栖芳寺遇眞記)≫를 살펴보면 한국에는 없는 정원 방식을 보고 무척 신기하게 여긴 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에는 예전 사이호지의 모습이 무척 잘 묘사되어 있는데 이끼가 덮인 지금의 모습과는 무척 다른 느낌입니다. “가운데 섬에는 하얀 모래가 덮여 있고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섬까지 전부 이끼로 덮인 지금 사이호지 정원의 모습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입니다.
사이호지가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은 오닌의 난 덕분(?)입니다. 사이호지 또한, 다른 교토의 사찰들처럼 오닌의 난으로 인해 불타버리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습기 가득하고 햇빛 잘 들지 않는 사이호지의 지형은 이끼가 자라기 쉬운 환경이었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100여 년 동안 사이호지 정원 주변을 이끼가 전부 덮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폐허를 복원한 이가 바로 센노 리큐(일본 다도 정립한 이, 다이토쿠지 편 참고)의 아들 센쇼안(千少庵)입니다. 게이초(慶長) 연간(1596~1615) 일입니다. 이때부터 사세를 조금씩 회복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제 사이호지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정원을 감상할 차례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산자수명한 아라시야마였고, 가장 기억에 남는 풍경이 후시미이나리타이샤의 센본토리이였다면, 가장 좋았다는 느낌이 드는 풍경이 바로 사이호지의 이끼 정원이었습니다. 처음 들어가자마자 온통 이끼로 덮인 흙과 돌, 그 위를 전부 메우는 빼곡히 자란 나무들, 그것들에 둘러싸인 연못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사이를 걸어갈 수 있도록 만든 잘 포장된 돌길은 태고의 원시림과 같은 그 풍경을 차분히 그리고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연못을 돌아가게 설계된 그 길을 걸으면서 ‘이것이 치센카이유식이구나!’라는 느낌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이호지의 정원 또한, 고요한 분위기가 가득했지만, 여태껏 보아왔던 정원과는 다른 분위기의 고요함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자연에서 느껴지는 그런 고요함이 느껴졌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강제로 키워내기 무척 힘든 이끼들의 연두빛에서 느껴지는 영험한 생명력이 이곳이 생명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연못 가운데 섬에서 생명을 만들어낸 신이 있다면 다시 솟아날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무소 소세키가 추구한 선의 고요함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겠지만, 폐허로 있었던 백년이 넘는 시간동안 자연이 인간의 정원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면서 그런 느낌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받아보는 느낌을 간직하려 연못을 계속 돌면서 문득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시시가미(사슴신)가 사는 숲이었습니다.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가 사는 숲답게 태고의 원시림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영험함과 신비함이 가득한 느낌을 주는 숲이었는데 사이호지의 정원이 딱 그와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물론 사이호지의 정원이 시각, 후각, 청각, 촉각을 전부 만족하게 하는 현실의 것이니 훨씬 실감났지만, 느낌 자체는 꽤 비슷했습니다. 다만, 사이호지의 정원은 선을 담아낸 일본 불교의 정원이라는 느낌도 주기에 시시가미의 숲으로만 그 이미지를 표현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듯합니다. 그 부족함은 다음의 하이쿠와 당시 찍은 사진들이 메워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古池や蛙飛こむ水の音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치센카이유식 정원 말고도 센쇼안이 만들었다는 초암 다실이나 무소 소세키가 만들어낸 초창기의 카레산스이식 정원이 유명하지만, 당시 저의 시선은 거기에까지는 머물지 못했습니다. 사이호지의 정원에서 받은 신비로운 느낌을 가득 간직한 채 절을 나오는데 오랜 시간 정원을 감상한 저를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절을 빠져 나가고 저와 친구들이 마지막으로 절을 나왔습니다. 절에서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은 무척 조용하여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만 들려왔습니다. 불현듯 사이호지가 교토에서의 마지막 일정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소리가 무척 쓸쓸하게 다가왔습니다.
雲はれて後もしぐるる柴の戶や山かぜ払ふ松のした露
구름 걷히고 난 후에도 비 오는 사립문가는
산바람이 뿌리는 솔잎 맺힌 이슬인가
-후지와라노 다카노부 조신(藤原隆信朝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