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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 염불 소리, 기요미즈데라(淸水寺)

by baekja

다음날 일어난 것은 새벽의 이른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굳이 새벽의 절은 한 번 쯤 봐야 한다면서 기요미즈데라 가는 시간을 새벽 6시로 잡아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까지 강하게 주장한 이유는 고등학교 졸업 여행을 친구들과 갔던 불국사 여행에서 새벽의 불국사를 보고 무척 감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불교의 조용하고 명상적인 이미지와 무척 잘 어울리는 새벽의 불국사 모습을 보고 친구들과 감탄을 금치 못했던 것은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제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숙소를 나오면서 아침에 교토에 눈이 올 것이라는 일기 예보를 보고 한껏 기대감이 부풀은 채로 기요미즈데라로 향했습니다. 이미 조금 눈이 왔었는지 젖은 땅을 밟으며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고 기요미즈데라로 향했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고 기요미즈데라로 가는 길인 기요미즈자카(淸水坂)를 찾아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의 여명과 흐린 하늘이 섞여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날씨와 마찬가지로 상점 가득한 거리도 아직 문을 열지 않아 무척 조용했습니다. 4년 전 찾아왔던 수학여행 때 보았던 낮의 기요미즈자카는 다수의 관광객과 문을 연 점포들이 뒤섞여 무척 번잡했지만, 거리에는 저와 친구들밖에 없고, 점포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어 기온 바로 옆의 유명한 절이 아닌 조용한 산사로 이끄는 듯한 기분마저 주었습니다.


기요미즈자카의 끝에 다다랐을 무렵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내리는 눈은 교토의설경을 보여줄 것이란 생각에 저를 무척 설레게 했습니다. 언덕을 얼마간 오르자 돌계단이 나타났고 그 위로 주칠이 된 커다란 인왕문이 보였습니다. 그 오른쪽으로는 서문과 삼중탑이 보였습니다. 기요미즈데라로 들어가는 문인 보통 절처럼 남문이 아니라 서문인 이유는 히가시야마 그러니까 동쪽의 산을 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과 탑의 지붕에는 얇은 종이가 얹어진 느낌을 줄 정도로 눈이 살포시 쌓여 있어 무척 색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1518270349741.jpg 인왕문, 서문, 삼중탑


눈을 맞으며 서문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매표소가 나왔습니다. 불빛조차 비추지 않는 새벽의 사찰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건물이었습니다. 눈 내리는 어느 날 기차조차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외딴 곳의 자그마한 기차역에서 나오는 불빛 같은 어딘지 모를 쓸쓸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불빛을 따라 매표소의 창문을 두드리니 이 눈 오는 날 새벽에 사람이 올 줄은 몰랐다는 표정을 살짝 지은 매표소 안의 할아버지가 자세를 고쳐 잡고 표를 내주었습니다. 표를 받고 청수사의 본당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사뿐사뿐 내리던 눈이 맹렬하게 지상을 집어삼킬 듯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도 무척 어두운 분위기의 본당 내부는 새벽의 어스름함과 한껏 흐려진 하늘에 때문에 매우 깜깜해져서 본당에 모셔진 28부 중상은 볼 수 없었습니다. 불상은 보이지 않더라도 본당 내부를 은은히 비추는 등불은 이곳에서 불교의 진리가 계속된다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은은한 진리의 빛을 받으며 본당의 무대로 나아서는 순간 모든 풍경을 뒤덮는 압도적인 눈의 움직임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선의 눈이 흩날리는 눈꽃송이로 변하자 그제야 무대 앞에서 기요미즈데라의 전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당시에는 무대가 복원 공사 중이라 청수의 무대가 자랑하는 호쾌한 풍경은 감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복원 가림막으로 둘러싸인 상태로 본 풍경은 무척이나 아늑해서 몇 시간을 보고 있어도 행복할 것만 같았습니다.


KakaoTalk_20220319_133013147_01.jpg 복원 중인 무대 옆에서 본 기요미즈데라의 전경


冬ながら 空より花の 散りくるは 雪のあなたは 春にやあるらん


겨울이지만 하늘에서 꽃송이 흩날리는 건

구름의 저편에는 봄이 와 있는 걸까


눈이 내린 것을 노래함-기요하라노 후카야부(淸原深養父)


KakaoTalk_20220319_133013147_02.jpg 복원중인 청수의 무대


앞에서도 말했지만, 원래 청수의 무대가 자랑하는 것은 교토의 시내까지 펼쳐지는 호쾌하고 장대한 풍경입니다. 특히 서향의 절이다 보니 석양이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의 ≪귀향(歸鄕)≫이나 가와바타 야스나라의 ≪고도≫에서도 모두 기요미즈데라의 석양이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안타깝게도 저는 기요미즈데라의 석양을 맛보지는 못했으나 복원공사를 시작하기 전인 2013년, 청수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멋진 교토 시내의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초가을, 아직 짙은 녹음이 가득한 기요미즈데라의 전경 너머로 드넓게 펼쳐지는 교토 분지의 모습은 제 마음을 뻥 뚫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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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초가을, 청수의 무대와 무대 위에서 본 교토의 전경


이렇듯 아름다운 무대의 풍광으로 교토 여행, 답사 중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된 기요미즈데라는 780년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 田村麻呂)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기요미즈데라의 창건 설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카노우에 집안은 백제계 도래인 집안으로 군사를 담당했으며 기요미즈데라 아랫마을에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가업을 이어받아 군에 복무하던 그는 임신한 아내를 위해 사슴 한 마리를 사냥하여 돌아가던 중 산중에서 들리는 아름다운 물소리에 끌려 물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아가보았습니다. 그곳에는 폭포가 있었고 그 폭포 앞에서 염불을 외우는 엔친(延鎭) 스님이 있었습니다. 엔친은 어떤 장로가 자기에게 십일면천수관음상을 깎아 봉안하라고 신령스러운 나무를 주고 갔는데 그 사람이 관음의 화신인 것 같아 이곳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사카노우에가 아내에게 들려주자 아내는 살생의 죄를 범한 것을 뉘우치기 위해 그곳에 절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하여 엔친 스님과 힘을 합쳐 절을 세웠는데 그 절이 기요미즈데라였습니다.


사카노우에 가문의 작은 우지데라(氏寺)에 불과했던 기요미즈데라는 사카노우에의 에조족(蝦夷族, 아이누족) 정벌 이후에 유명해졌습니다. 당시 일본의 천황은 헤이안 시대를 연 간무(桓武) 천황이었는데 간무 천황은 왕권강화를 위해 수도를 헤이안으로 옮기고 동북쪽에서 중앙 정권에 저항하는 토착 주민인 에조족을 정벌하였습니다. 이 에조족 정벌을 위해 파견된 직책인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 이후 쇼군의 명칭은 이 말을 줄인 것에서 따옴.)’으로 임명된 사카노우에는 전쟁의 승리를 바라며 798년 십일면관음보살상을 조성해 봉안하고 ‘淸水寺(청수사, 기요미즈데라)’라는 현판을 내걸었습니다. 801년 에조족 정벌을 위해 출병한 사카노우에는 이듬해 별 힘들이지 않고 에조족의 지도자들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개선하였습니다.


개선장군이 된 사카노우에는 805년 개선하고 돌아와 조정에 청을 올렸습니다. 청을 받아들인 조정은 기요미즈데라에 넓은 사찰 부지를 하사하고 왕실의 원당(願堂) 사찰로 삼았습니다. 사카노우에의 대단한 인기와 더불어 사카노우에의 전승은 기요미즈데라의 십일면관음보살상의 영험함 덕분이었다고 소문이 퍼지면서 기요미즈데라를 방문하는 참배객은 무수히 많았다고 합니다.


찾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던 기요미즈데라는 이후 나라의 고후쿠지(興福寺)의 말사로 들어갔습니다. 사세가 막강한 고후쿠지 아래의 말사라는 위치는 당시에는 안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엔랴쿠지(延曆寺)의 사세가 커지면서 고후쿠지와 대립을 하면서 기요미즈데라는 1113년 엔랴쿠지의 승병들에게 한 번 불에 타게 됩니다. 그리고 1467년 교토를 전부 불태운 ‘오닌의 난’에 의해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오닌의 난으로 소실된 기요미즈데라를 다시 일으킨 것은 간아미(願阿彌) 스님으로 권진(勸進, 기부를 권하는 것)을 통해 기요미즈데라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1629년 화재로 다시 전부 불타버렸고, 이에 에도 막부의 3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복원을 명했습니다. 이때의 모습을 쭉 이어오던 기요미즈데라는 1868년 폐불훼석에 피해를 입어 90%의 부지를 빼앗기고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무대를 감상하고 절의 부지를 돌아보기 위해 본당의 지붕을 벗어나는데 다시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머리 위에 하얗게 눈을 쌓아가며 절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아미타당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하늘이 무너질 듯 끝도 없이 쏟아지는 눈의 침묵 사이로 들려오는 염불 소리와 함께 열을 맞추어 지나가는 스님들의 행렬이 제 모든 감각을 그곳으로 집중하게 만들었습니다. 절대적인 평온함과 고요함이 그 공간에만 내려온 듯 했습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을 멈추고 고고하게 자신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있었던 그 장면은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 우주의 본질과 법칙의 초월적인 느낌을 세속의 저에게도 맛보게 해주었습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멈춤의 감각은 강렬한 눈의 움직임과 함께 사라지고 저는 다시 시간의 흐름 안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雪降れり時間の束の降るごとく


눈이 내리네

시간의 다발이

내리듯이


-이시다 하쿄(石田 波郷)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한 후 계단을 내려와 오토와(音羽) 폭포로 향했습니다. 창건 설화에 나오는 폭포가 바로 이 폭포죠. 사실 관광객들에게는 오토와 폭포에 얽힌 창건 설화보다 세 물줄기가 상징하는 것이 더 유명합니다. 세 물줄기는 각각 장수, 학업, 사랑을 상징하며 골라서 마시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2013년 수학여행으로 방문했을 때는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이 물을 마셨었는데 그 날 자그마한 폭포에는 저와 친구들만 있었습니다. 제가 어떤 물줄기를 선택해서 마셨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지만, 친구 B가 모든 것을 이루겠다며 세 가지 물줄기를 다 마셨던 것은 기억에 남습니다. 4년이 지난 지금 그 친구에게 다시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효과가 잘 들었다고 할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고 할지 그 친구의 반응이 참 궁금합니다.


1518270350111.jpg 오토와 폭포


눈도 내리고 뒤의 일정도 있어서 오토와 폭포의 물을 마신 것을 끝으로 기요미즈데라를 나왔습니다. 기요미즈자카를 올라올 때는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고 있었지만, 내려올 때는 몇몇 상점이 문을 열고 있어서 친구들과 모찌를 사서 나누어 먹었습니다. 모찌를 먹은 후에는 산넨자카(三年坂)로 빠져 나왔습니다. 넘어지면 3년 안에 죽는다는 무서운 전설을 가지고 있는 이 언덕 골목은 기요미즈자카와는 달리 어떤 상점도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젖은 돌계단을 오르내리며 한국의 골목과는 다른 일본의 골목의 분위기를 만끽하며 기요미즈데라의 강렬한 여운을 다 떨쳐내고서야 저와 친구들은 다음 목적지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Inked1518270350642_LI.jpg 산넨자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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