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기행-일지암과 북미륵암
일지암으로 가는 산길은 포장되어 있었지만, 경사는 매우 급했습니다. 한여름이라 나무가 계속 우거져있어 그늘은 끝나지 않아서 해는 들지 않았으나 힘든 것은 매한가지였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치며 한 15분쯤 오르막만 가다 보니 일지암으로 꺾는 갈림길이 나오더군요. 이미 허벅지와 종아리가 터질 것 같았던 저는 기쁜 마음으로 갈림길로 꺾었습니다. 급한 경사 그대로 5분을 더 가자 일지암의 대웅전이 보였습니다. 나무로 내내 가려져 있던 산길이 일지암에 다다르자 확 트이며 맑은 하늘을 내보였습니다.
이런 험한 산세에 자리 잡은 일지암은 전의 글에서 말한 초의선사가 만년에 거주했던 작은 암자입니다. 원래는 화재로 없어졌지만, 원래의 초가집 그대로 1979년에 복원했다고 합니다. 초의선사는 <동다송>에서 한국 차를 예찬하며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주장하였습니다. 다선일미란 차와 선을 추구하는 일이 한 가지 맛이라는 뜻으로 차를 끓이고 마시는 마음가짐이나 선을 추구하는 마음가짐이 같으면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하나라는 이야기입니다. 초의선사는 이렇게 차만 추구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에 재능이 있었다고 합니다. 범패와 같은 불교 음악부터 장을 담그는 실생활에 관련된 것까지 다재다능했다고 전해집니다. 유유상종이라고 초의선사와 교류했던 다른 사람들의 면면을 봐도 매우 다재다능했는데요. 글씨는 말할 것도 없고 금석문과 문인화에서 이름 높았던 추사 김정희와 정치, 과학, 경제와 같은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조선의 손에 꼽는 엘리트인 다산 정약용이 이에 해당합니다. 초의선사와 그와 교류했던 이들이 추구했던 정신인 ‘실사구시’에 따라 한 가지에 중점을 두지 않고 여러 방면에서 생각해보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러했던 초의선사는 만년에 초가집의 일지암에서 살면서 장을 담그고 차를 달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검소한 생활이 자그마한 일지암에 모두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 자그마한 초가집이 한국의 차 문화 명맥을 끊기지 않게 한 중심지라는 생각이 들자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습니다. 일지암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 옆의 대웅전 앞에서 두륜산의 전경을 내려다보는데 절경이 따로 없더군요. 초의선사가 모든 걸 비워내고 검소한 삶을 사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 광경만큼은 욕심 가득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절로 나오더군요. 구름과 어우러진 맑은 하늘과 그에 맞닿은 산봉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그가 가졌던 행복을 잠시 느껴보았습니다.
일지암에서 국보인 석조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북미륵암까지는 험하디험한 산길이었습니다. 경사가 급하다는 느낌은 아니었으나 돌과 흙이 마구 뒤엉켜 있는 길은 일지암까지의 포장도로와는 다르게 매우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거기다 길의 표시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몇 번이고 길을 잘못들 뻔하였습니다. 이끼로 뒤덮인 돌이나 돌 밑에 있는 흙 모두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어 매우 미끄럽기도 하였습니다. 거기에 날씨가 점점 흐려져 비가 올 것 같다는 걱정까지 겹치기 시작했습니다. 수풀이 우거지고 이끼가 잔뜩 낀 두륜산의 속살은 원시림과 비슷한 그것이었으나 그것을 만끽하기에는 제가 매우 위태위태했던 것 같습니다. 이미 빠른 속도로 산행을 한 저는 지쳐서 내려갈 때는 북미륵암에서 이어진 오심재 근처에서 케이블카를 타기로 마음먹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사람도 잘 보이지 않는 산길을 얼마쯤 갔을까. 현대식 기와집 건물이 눈앞에 보이며 북미륵암의 모습이 드러나더군요. 북미륵암에는 도둑과 산짐승을 경계한 거대한 개가 묶인 채로 으르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군견병 때 길렀던 개들보다 훨씬 사나워 보여 등골이 서늘하더군요. 개를 조심히 피해 담쟁이 덩굴이 뒤덮인 석축을 올라 석조 마애여래좌상을 보자 소름이 돋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보존각 내에 조용히 정좌한 마애여래좌상의 느낌은 인상을 강렬하게 남겼습니다. 어두운 보존가 아래에서 부처님의 눈을 보며 한참을 빠져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불상의 양식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양쪽의 어깨에 천을 걸친 채 천이 유려한 곡선으로 풍만한 불상의 몸매를 덮은 것이 보였으나 통일신라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통일 이후부터 성덕왕 대까지의 불상들보다는 조금 양식적인 느낌이 들었기에 성덕왕 대 이후이나 나말여초 이전의 불상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석조 마애여래좌상에서 받은 조용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간직한 채로 옆의 북미륵암 3층석탑을 보러 갔습니다. 신라의 3층탑 양식을 따랐으나 그 비례나 조각 면에서는 전성기의 수준은 벗어나 있었기에 표지판을 살펴보았더니 고려 시대에 신라의 양식을 따라 조성한 것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간략한 구성을 통해 주는 단순한 미가 있어 이 조용한 북미륵암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옆에는 한자를 새겨둔 바위가 있었는데 아마 이 힘든 데까지 올라와 마애불을 보았다며 남긴 기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미륵암의 고요하면서도 신비로운, 마음을 사로잡는 느낌을 뒤로하고 오심재로 향했습니다. 경사는 없었지만, 좁은 산길이 계속되었고 양옆의 세죽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오심재에 도착하자 한껏 흐려진 하늘과 산 중간에 갑자기 나타난 분지가 저를 반기더군요. 맑은 날에 오면 하늘과 분지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산봉우리가 어우러져 참으로 멋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케이블카로 올라가는 길이 보이지 않더군요. 그러고 나서 표지판을 보는데 바로 옆의 봉우리에 케이블카가 있기는 하지만, 거기로 가는 길이 이어져는 있지 않더군요. 표지판을 제대로 보지 않은 저의 완벽한 오판이었습니다.
시간은 5시가 조금 넘어있었고 하늘은 한껏 흐려져 조금이라도 뒤에 비를 마구 쏟아낼 것처럼 보이더군요. 산길은 나무들로 가려져 더 빨리 어두워질 테니 한시라도 빨리 내려가지 않으면 조난을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일단 마음이 급해져 재빠르게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급하게 가는 동안 몇 번이나 돌에서 미끄러질 뻔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2km가 넘는 험한 산길을 30분 만에 주파하고 일지암 근처의 포장도로에 와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핸드폰과 몸 하나만 끌고 왔던 저는 앞으로는 험한 산을 탈 때 어느 정도의 장비는 갖춰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지암에서 이제 급한 경사를 천천히 내려오는데 갑자기 왼쪽 발목이 쓰리더군요. 얼마나 긴장했는지 운동화에 왼쪽 발목이 쓸려 다 까지도록 모르고 있었습니다. 천천히 걸으면 발목이 매우 쓰려 계속 뛰어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4km 정도 되는 산길을 40분 만에 내려와서야 숙소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땀은 범벅이었는데 저녁이 너무 먹고 싶어서 근처 식당들에 들어갔는데 대부분 문을 닫았더군요. 간신히 문을 연 식당에 들어가 산채비빔밥을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습니다. 밑반찬으로 나온 김치가 남도의 묵은지였는데 정말 맛있더군요. 그 묵은지의 맛을 느끼자 제가 남도에 온 것이 절절히 느껴졌습니다.
밥을 먹고 숙소로 다시 향하자 주인장께서 저를 보고 놀라시더군요. 땀으로 인해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더니 잠시 저를 불러세우시고 수박을 나누어주셨습니다. 남도의 정에 마음이 찡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방으로 올라가 에어컨을 켜고 씻은 후 수박을 먹는데 극락이 따로 없더군요. 접시를 반납하고 잠시 누워서 내일 갈 강진 숙소를 예약하고 강진 여행을 계획한 다음 책을 보고 핸드폰을 보다가 너무 피곤해서 9시에 바로 곯아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