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터미널역
고속터미널역은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버스터미널인 고속터미널의 지하에 자리한 역입니다. 3호선, 7호선, 9호선, 이렇게 세 개의 노선이 다니는 역으로 위에 자리한 버스터미널의 규모가 큰 만큼 역의 규모도 꽤 큰 편입니다. 3, 7호선에서 9호선 사이에는 무척 긴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3호선과 7호선도 가까운 곳에 환승구역이 있다고 말하기에는 애매합니다. 특히 9호선에서 7호선으로 환승하려면 오랜 시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와 긴 무빙 워크를 타고 가야 하죠. 꽤 넓은 역이지만, 사람들도 많이 다녀 역이 비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이만한 역 위에는 딱 하나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 있습니다. 무척 많은 노선이 있고, 큰 매표소가 있지만, 이것만으로 그렇게 큰 넓이를 차지한다고 하기에는 애매하죠. 사람이 모이는 곳이니 만큼 다양한 상점들이 있습니다. 그 상점들은 역과 터미널 사이의 빈 공간을 메꿉니다. 다만, 터미널과 역 자체가 넓고 공간이 넓은데 이런저런 것들이 많이 자리하다보니 복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처음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이나 길을 잘 못 찾는 사람이라면 헤매기 십상이지요. 저 또한, 처음 고속터미널에서 지하철을 이용할 때 길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이는 버스에, 다양한 노선의 지하철, 이것들을 이용하기 위한 승객들과 이 승객들을 노린 상점들이 모인 이곳을 우리는 터미널이라고 부릅니다. 터미널은 정확히 말하면 노선의 끝점입니다. 노선의 출발지이자 도착지가 되죠. 운송수단이 모이는 종점이다 보니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가뜩이나 일평균 5만 명이 이용하는 터미널이 바로 위에 있는데 터미널과 이어지는 지하철의 역이 바로 밑에 있으니 사람들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운송수단을 쉽게 이용하기 위해 모아 놓은 공간이기에 사실 어떤 여행의 목적지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이곳을 환승 구역으로 생각했을지언정 무언가를 하기 위해 오는 장소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 가끔 반포한강공원을 가기 위해 들리기는 하지만, 반포한강공원 자체를 그다지 많이 방문하지 않으니 예외로 두어야겠습니다. 오산에서 고속터미널로 오는 버스도 없어 자연적으로 고속터미널역도 생각보다 많이 방문하지는 않았습니다. 저에겐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 역입니다.
아침 11시 30분경 간신히 벤치에 자리를 잡아 앉은 제가 고속버스터미널에 앉아 몇 분 정도 고민을 하고나서 딱 위의 생각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러다 이 시간에도 에스컬레이터에서 사람들이 끝없이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그냥 사람구경이나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출근 시간도 아닌데 다양한 사람들이 계속 승강장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거든요. 사실 터미널 근처니 당연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일단 제 흥미가 이끄는 대로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승강장 쪽을 보는데 서양 쪽의 외모를 하신 할아버지와 함께 다니는 한국계 할머니가 다가와서 제게 말을 거셨습니다. 어떤 말을 하실까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종로5가를 어떻게 가냐고 물으시더군요. 9호선 쭉 타고 가서 노량진에서 1호선 갈아타면 된다고 하시니 아니라며 어떤 사람이 여기서 내려서 갈아타라고 했다고 말하셨습니다. 당황했지만, 천천히 설명을 드렸고, 천천히 하는 설명을 듣다 성격 급하신 분이 끼어들어 큰 소리로 다시 노량진에서 갈아타라고 한 번 더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갸우뚱거리며 돌아가는 두 분을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제 쪽으로 이번엔 한 할아버지께서 다가왔습니다. 제 얼굴을 낯부끄러울 정도로 쳐다보시기에 몸을 배배 꼬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고 그냥 지나가셨습니다. 뭐지 하고 제 뒤를 봤더니 열차 시간표가 있더군요. 머쓱해져서 혼자 씨익 웃었습니다.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나서야 사람들의 모습을 조금씩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스컬레이터와 승강장, 스크린도어로 참 많은 사람들이 오고갔습니다. 헤드폰을 쓴 젊은이,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지하철과 함께 사라지고, 꽃무늬 코트를 입은 화사한 사람, 경량 패딩을 입은 사람, 외투는 걸치지 않고 맨투맨만 입은 사람 등 비 오는 봄의 쌀쌀한 날씨 덕에 다양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승강장에 서 있었습니다. 비가 오니 자연히 우산을 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보라색, 검은색, 연두색의 장우산, 체크무늬와 군청색의 접이식 우산 등 다양한 우산들이 시선을 잠시 가져갔습니다. 또한, 삼십분 간의 짧은 시간동안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있는 사람을 두 사람이나 볼 수 있었는데 모두 고속터미널 3층 화훼 시장에서 구매한 것 같았습니다. 이처럼 무척 다양한 사람들이 역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외견도 무척 다양했는데 내면까지 생각한다면 무척 많은 다양하고 특별한 사람들이 이곳을 이용하고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나르는 많은 버스가 모이는 터미널, 그 아래의 커다란 역. 이 고속터미널역은 무척 다양한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다양한 사람들은 모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저처럼 여행을 목적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마 그 삼십분 동안 한 명도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각자 자신의 빛나는 삶을 사느라 저에게 신경 쓸 겨를은 없었겠지요. 그래서 편안하게 남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정말 미세한 단편이나마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 단편들은 평범했을지 모를 제 30분의 여행을 빛내 준 일등공신이었습니다. 그 고마움을 담아 역을 지나가고, 나와 스쳐갔던, 내 눈길이 닿았던 모든 인연들이 그날은 좋은 하루를 보냈기를 바랐습니다. 그런 작지만 소중한 바람을 끝으로 여행을 갈무리하며, 관찰하던 일상의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일상의 밖인 여행에서 다시 일상의 안으로 들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