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역
제가 다닌 대학 서강대 근처에는 총 4개의 역이 있습니다. 2호선 신촌역, 2호선 이대역, 6호선 대흥역, 경의중앙선 서강대역. 신촌역은 제가 술을 먹기 위해 찾던 역, 이대역은 등하교할 때 자주 쓰던 역, 서강대역은 서강대 정문에서 가장 가깝지만, 배차간격이 너무 넓어 잘 쓰지 않는 역입니다. 대흥역은 이 세 역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술을 먹고, 등하교를 하면서 남문과 후문에서 가장 가까운 역입니다. 줄여 말하자면 제 대학생활을 모두 담고 있는 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들을 일 없는, 서울에서 오래 산 이들조차 많이 들어보지 못했을 대흥역의 이름 옆에는 ‘서강대앞’이라는 부가설명이 괄호로 붙어 있습니다. 매번 띄어쓰기가 틀린 게 신경 쓰이지만, 대흥역이라는 생소한 이름 뒤에 제가 20대를 늘 함께했던 장소가 함께 붙어있어 불만 없이 그냥 ‘서강대앞’이라는 글자를 바라보곤 합니다. 역 중간의 벤치에 앉아 생각해보니 뭔가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정문에서는 꽤 먼 편이라 ‘서강대옆’이나 ‘서강대뒤’라고 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수도 없이 다닌 이 역이지만, 대흥역에 대해 이리 깊이 생각해본 건 앉아 있는 그 순간이 처음이었습니다.
낯설디 낯선 이름을 가지고 있고, 환승은 하나도 되지 않는 이 역은 같은 섹션 사람들과 여의도 한강공원을 가면서 처음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무척 가까운 이곳에서 6호선을 타고 공덕역에서 5호선으로 환승한 뒤 여의나루역에 내리면 바로 앞에 여의도 한강공원이 있습니다. 원래 같으면 처음 이용하는 낯선 역에 부담을 가졌겠지만, 많은 사람들과 떠들며 이동하니 별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역이 그 자리에 존재했던 것을 항상 인식했던 것처럼, 과거부터 늘 이용했던 것처럼, 나의 삶에 늘 자리했던 것처럼.
대흥역은 약속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1, 2, 3, 4번 출구로 이루어진 대흥역의 입구는 랜드마크가 따로 없는 서강대 남문과 후문 주변에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모두가 아는 공간이었습니다. 역과 서강대 사이의 곳곳은 친구들과 만남을 가졌던 장소들이 가득했습니다. 기사식당에서 먹은 백반, 돼지껍데기와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던 소주, 잔치국수 국물과 닭모래집 튀김을 안주 삼아 마시던 병맥주, 사람 없는 길가에 앉아 시원한 탄산과 함께 들이키던 캔맥주, 뜨끈한 순대국 국물에 술술 말아 넘기던 막걸리까지. 제 뱃속을 채우던 밥과 안주, 그리고 술은 대부분 이곳 근처에 있었습니다.
온갖 먹을 것만 이곳에 가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추억들도 거리와 역 곳곳을 메우고 있습니다. 여유부리면서 1호선 급행 안 타고, 금정역에서 환승해서 대흥역으로 등교했다가 시간이 늦어 급하게 역을 뛰어가던 추억, 마트에서 맛난 거 사오자면서 장바구니를 메고 공덕 이마트를 가자며 저를 불러내던 친구와 함께한 추억, 비가 잔뜩 온 날 미끄러운 역의 바닥에 미끄러질 뻔한 추억, 취한 채로 신촌역까지 가기 너무 멀어 그냥 대흥역에서 지하철을 택했던 추억, 합정 교보문고에서 일하면서 출퇴근하던 추억까지. 여기에 친구들과 걸으며 말하던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까지 합치면 이곳은 따뜻하지만, 단조로운 일상에 빛나고 다채로운 경험이 합쳐진 제 삶 그 자체가 됩니다.
20대의 대학생활, 제가 보낸 그 시간들, 기쁘든 슬프든 아름답든 추하든 재미있든 지루하든 빛나든 단조로웠든 평화로웠든 시끌벅적했든 대부분의 시간들은 대흥역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 품을 벗어나 처음 맞이한 사회. 그곳에서 늘 대흥역은 열차를 받아주며 이 근처에서 쉬고 놀 수 있게 해주었고, 열차를 보내주며 새로운 곳을 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가끔 삶을 살다 목적지를 잃은 느낌이 들어 이곳에 오면 목적지를 찾을 때까지 쉬거나 놀 수 있었고, 그 목적지를 찾는 여행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제 삶을 지탱하는 공간이자 제 삶의 새로운 이정표를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제 대학 생활은 거의 끝났습니다.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를 끝내고 대학교마저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해진 길은 이제 끝났고, 길이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만이 제 앞에 있습니다. 이제 제가 내딛는 발걸음은 천 길 낭떠러지 일수도, 꽃향기 가득한 오솔길일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제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인 아름다운 과거를 담은 대흥역은 늘 이 자리에 있을 겁니다. 사람이 없는 지하철역의 조용한 흐름을 감각하며 저는 잠시 눈을 감고 추억에 잠긴 채 오랜 시간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