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역
이전 종교학 수업에서 불교에 관한 강의를 들을 때였습니다. 교수님께서 중도(中道)에 대한 얘기를 꺼내시면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불교에서 중도는 우리가 흔히 아는 중립(中立)이 의미가 아닙니다. 찬성과 반대 사이 가운데의 의견이 아닌 찬성과 반대를 모두 아우르는 포용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찬성과 반대 사이 어느 곳에도 치우쳐서 서있는 의견이 아니라 가운데에서 그 두 가지를 모두 이해하고 포용하는 의견입니다.”
제 삶에서 수원역은 그 위치만 따지면 중립입니다. 제 고향 오산과 20대를 전부 보낸 서울의 중간이죠. 위치는 오산에 많이 가까운 편이지만, 시간을 생각한다면 중간이라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1호선을 타고 오산에서 서울로 향할 때 수원역에 도착하면 서울로 가고 있구나 싶고, 서울에서 오산을 올 때 수원역에 오면 오산까지 많이 왔구나 싶습니다. 무언가 오산과 서울 사이 중간 정류장 같은 기분입니다. 그런 곳을 서울로 가는 도중에 내려서 잠시 여행을 하자니 뭔가 신기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수원역은 수인분당선과 1호선, 그리고 많은 기차들이 서는 환승역이지만, 제가 수원역을 이용한 것은 거의 1호선이 전부였습니다. 1호선을 타고, 오산과 서울을 지나며 차창 밖으로 본 무수히 많은 수원역의 모습이 제 기억의 대부분입니다. 물론 수원역은 그냥 지나치기만 한 그저 가운데에 위치한 큰 역은 아닙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난 역이기도 합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저는 수원역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수원역을 이용했던 것은 대학교 이후입니다. 중학교 때까지 친구들과 노는 것은 오산 주변이 전부였고, 수원까지 나갈 생각도 안 했으니까요. 서울에서 놀기도 바쁜 제가 수원에서 놀 일이 뭐가 있냐고요? 아, 저는 종종 오산에서 서울까지 통학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 종종 오산 근처까지 와서 놀아주곤 했습니다. 오산 시내에는 생각보다 놀거리가 그리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친구들이 온다고 하면 기차도 많이 서고 이런저런 상점들이 많은 수원역 주변으로 부르고는 했었습니다. 서울에 사는 친구랑 주변에서 족발을 먹은 적도 있고, 근처에서 놀다가 찜질방에서 잤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수원역을 꼬박꼬박 이용하게 된 것은 영통에 사는 형과 친해지고 나서였습니다. 망포역 근처에 사는 그 형과 오산역 근처에 사는 제가 중간에서 만나면 딱 수원역이더군요. 그 형과 많이 친해져서 수원역 주변을 많이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수원 로데오 거리 근처를 중심으로 놀았습니다. 같이 먹는 저녁은 대부분 고기 무한리필이었고, 다 먹고 나면 수다를 떨러 카페를 가곤 했습니다. 그러다 아예 디저트를 제대로 먹어보자며 케이크를 먹었고, 너무 많이 먹어서 소화가 안 된다며 수원역 위의 애경백화점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것들을 구경했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해보자며 양궁카페를 가기도 했었습니다.
위처럼 수원역에는 20대 이후에 친분을 쌓게 된 사람들과의 추억이 많지만, 중학교 동창들이나 중학교 때 다녔던 학원 친구들과 20살이 넘어서 만난 추억도 있습니다. 동탄에 있었던 학원을 같이 다녔던 친구들과 함께 모여서 밥을 먹을 만한 곳으로 모두가 교통이 편한 수원역을 택했고, 주변에서 재밌게 놀았습니다. 중학교 동창들과는 연어와 육회 무한리필집을 가서 뱃속에 가득 단백질을 채워놓고 껄껄거리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지요.
몇 번은 혼자 방문하기도 했었습니다. 경인지방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거나 공군 면접을 봤을 때 모두 수원역을 통해 집에 왔습니다. 갈 때는 버스를 이용했지만, 집에 올 때는 버스 편이 녹록치 않아 그냥 좀 더 걸어서 수원역을 이용했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수원화성을 갈 때도 가끔 수원역을 이용하곤 했습니다. 수원역에 내려서 버스를 한 번 갈아타면 무척 쉽게 수원화성에 도착할 수 있죠. 그렇게 수원화성에 가서 성곽을 돌거나 그 가운데에 있는 수원화성행궁과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수원역은 중립에 위치한 역일뿐만 아니라 제게 있어 많은 인연(因緣)들을 떠오르게 하는 역입니다. 씨줄 날줄이 베틀에 엮어 천을 만들어내듯이 다양한 사람들과 저는 수원역에서 엮여 인연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중학교 동창부터 학원친구들, 20대 때 만난 수많은 사람들까지 다양한 만남의 장소는 수원역이었고, 수원역은 이 만남들을 기꺼이 포용해 주었습니다. 제 삶의 터전들 가운데 서있어 자칫 애매할지 모르는 수원역의 이미지는 삶의 터전들을 오가며 만들어진 인연들을 엮어주고 포용해주며 그 만남들을 강화해주었습니다. 수원역의 위치는 그저 중립일지 모르나 수원역의 의미는 중도의 의미인 것이죠. 제 삶의 터전이 여전히 오산과 서울인 한 수원역은 가운데에서 제 삶의 다양한 관계들을 포용하는 아늑하고 따뜻한 장소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