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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완주기-눈, 고됨

by baekja

앞에서는 눈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해 말했습니다. 분명 눈이 내린 제주의 설경은 아름다웠습니다만, 눈이 내린 제주올레를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전에 저와 여행을 하던 친구가 아름다운 풍경을 보려면 고생을 해야 한다는 말을 했었는데 제주올레의 설경을 눈에 담았던 그 때가 이 말에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행 당시 신발을 등산화가 아닌 런닝화를 신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런닝화는 밑바닥은 닳을 대로 닳아 신발 밑창의 무늬가 사라져 있는 신발이었습니다. 솔직히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제주에 폭설이 올 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도 종아리 이상까지 쌓일 정도라니. 절대 생각 못할 겁니다. 눈 자체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방설 준비는 해갔지만, 이 정도 신발로도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눈이 온 첫 날은 별로 쌓이지 않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둘째 날부터는 온도가 내려가고 눈이 더 쌓이면서 길이 미끄러워졌습니다. 처음부터 자그마한 언덕을 지나는 데도 내리막길에서 엉덩방아를 수없이 찧어야했죠. 그래도 이 날 걸은 21코스는 대부분 평지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코스의 마지막 지미봉은 저를 쉽게 숙소에 보내 줄 생각이 없어보였습니다.

지미봉은 오르막길부터 문제가 되었습니다. 계단은 없고 대부분 가파른 언덕길 옆 나무에 줄이 매달려 있는 형국이었지요. 신발은 계속 미끄러지고 올라가지 못하는 상태에서 줄에만 몸을 의지해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갔습니다. 몇 번을 미끄러져 넘어졌을 때는 힘들어 포기하고 싶었지만, 이미 올라온 만큼 내려가는 게 무서워 일단 이 악물고 올라갔습니다. 지미봉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무언가 해낸 것 같은 뿌듯함이 조금이지만 느껴졌습니다. 뿌듯함도 잠시, 내려갈 생각을 하니 아득해졌습니다.

내려가는 도중 두 번째 엉덩방아를 할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엉덩방아를 계속 찧을 거라면 그냥 앉아서 내려가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저는 썰매를 타고 내려오듯이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즐겁기는 했지만, 중간 중간 계단이 있어 엉덩이에 불이 나는 고통을 몇 번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 탓으로 저는 무척 천천히 내려가야 했는데 이 상황에서도 저를 기다려준 제 친구와 더불어 당시 뒤에서 부담주지 않으셨던 부부 올레꾼께 무척 감사를 느꼈습니다.

쨌든 길고 긴 하산이 끝나고 다음 날도 저는 오름을 올라야 했습니다. 2코스의 대수산봉이 있었기 때문이죠. 대수산봉은 경사는 조금 완만한 대신 옆에 잡고 올라갈 줄도 별로 없어서 말 그대로 네 발로 산을 올라갔습니다. 엉금엉금 기어가다가 미끄러지면 아예 온몸을 눈에 묻고 꾸역꾸역 올라가기도 했지요. 내려올 때는 다시 엉덩이로 썰매를 타야했지만, 이번에는 악천후에 2코스를 걷는 분들이 없어서인지 다른 분께 민폐를 끼치지 않고 천천히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눈이 가장 많이 쌓인 넷째 날에는 오히려 오르막길에서 미끄러질 일이 없었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아예 발이 미끄러지는 것을 눈이 잡아주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요. 그래서 눈을 다리로 헤쳐 가며 올라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좀 더 편안했습니다. 그러다 완만하게 내려오는 3-A코스 통오름의 완만한 내리막길에서 일이 터졌습니다. 통오름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에 시선을 뺏긴 채 걷다가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고 만 것이지요. 사실 단순한 엉덩방아였는데 살짝 잘못 미끄러져 무릎이 살짝 접질렸습니다. 사실 작은 부상으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전에 동아리에서 상모를 돌리던 중 다친 곳이라 통증이 갈수록 심해지더군요. 20여 일을 더 걸어야하는 상황에서 걱정만 늘었습니다.

그래도 어찌저찌 악천후와 눈이 내리는 날씨에도 걸었던 코스들은 전부 완주를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름다운 설경들을 보는 데도 성공했지요. 과정은 고되었지만, 보상은 충분했습니다. 고생을 해야지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식상한 교훈을 다시 얻으면서 며칠 동안 눈을 헤쳐 나가야했던 고되고 길었던 날들은 끝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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