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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올레 완주기-눈, 아름다운 풍경

by baekja

제주도에 눈이 내리는 상상 해본 적 있나요? 저는 별로 해본 적 없습니다. 아, 다만 한라산에는 겨울 내내 눈이 쌓여 있긴 하죠. 그래도 겨울 내내 높은 온도를 자랑하는 제주도 해안가에 눈이 내리는 것은 생각하기 쉽지 않습니다. 제주도 곳곳의 야자수에 쌓인 눈, 정말 믿기지 않는 광경일 겁니다. 올해 1월 그 믿기지 않는 광경은 제 눈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1월 초 강력한 한파와 함께 폭설이 쏟아졌습니다. 전국이 눈으로 덮였고 놀랍게도 제주도 또한 그랬습니다. 눈이 사흘 내내 쏟아져 중산간지역에는 30~40cm 정도의 무척 많은 눈이 쌓였습니다. 제 20여 년 간의 삶에서 본 눈 중 가장 많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설경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잡았었다고도 할 수 있겠죠.

눈이 내리는 제주올레를 걷는 나흘간은 하늘이 무척 흐렸습니다. 깜깜한 먹구름 까지는 아니었지만, 곧 있으면 푹풍우를 몰아칠 것 같은 회색 구름이 하늘에 끼어 있었죠. 하지만, 눈이 종일 내리는 것은 아니다보니 군데군데 파란 조각들이 섞여 있기도 했었습니다. 흰색부터 검은색까지 섞인 구름이 가득한 하늘 아래에서 햇빛의 색을 모두 담지 못한 제주의 풍경은 대체로 어두웠습니다. 그 어두운 색을 담은 제주의 드넓은 하늘, 끝없는 바다, 검은 현무암과 하얀 눈이 뒤섞인 장대한 해안가는 자연의 위대함을 제게 가슴 깊이 깨닫게 해주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장대하고 웅장한 장면 뒤에 겨울 바다가 주는 쓸쓸함도 풍겨서 무척 신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분명 제주가 가진 자산 중에는 무척 밝은 하늘과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가 유명하지만, 이제주임을 확실히 알 수 있게 하는 특별한 자산은 현무암이 있습니다. 무척 검은 현무암은 눈과도 잘 어울리죠. 제주올레에서 이 매력을 알게 된 곳은 밭길입니다. 제주올레 21코스의 낯물밭길은 돌담 사이의 조그마한 오솔길입니다. 눈이 쌓인 낯물밭길은 허리춤까지 오는 야트막한 검은 돌담 사이에 깔린 화이트 카펫의 대비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온통 하얀 눈밭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자연스런 검은 돌담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콘크리트의 직선이 아닌 크기가 제각각인 돌을 모아 적당히 쌓은 돌담의 직선은 자연의 경관을 해치지 않고 무척 잘 어울렸습니다.

제주, 특히 구좌의 겨울 밭에서는 당근밭을 다수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생물들이 몸을 사리고 가만히 있는 겨울에 잎의 진한 초록빛과 뿌리의 선명한 주홍빛을 뽐내는 당근은 무척 이질적입니다. 이런 밭에 눈이 약간 쌓인 경관 또한 무척 볼만합니다. 현무암과 눈의 어우러짐은 물론이고 흙의 갈색과 당근의 초록색과 주홍색까지 어우러져 겨울에는 좀체 보기 힘든 알록달록한 색의 향연이 펼쳐지지요.

눈이 오는 날 밭을 지나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눈에 내린 제주 돌담밭의 풍경을 그저 감상하며 지나가면 될 뿐이지요. 하지만, 오름을 오르거나 중산간 올레를 지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가 생각해도 쉽지 않은 일이기에 악천후에는 이런 코스들을 피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친구와 저는 알 수 없는 오기에 사로잡혀 눈이 종아리까지 쌓인 날 3-A코스를 걸었습니다.

눈이 무척 많이 와서 길에는 사람이 지나간 발자국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도화지처럼 아무것도 없는 하얀 길을 걷는 것은 생각보다 무척 힘든 일이었습니다. 추위나 미끄러움보다 힘들었던 것은 바로 눈을 헤치고 지나가는 일이었죠. 눈이 마치 갯벌의 진흙처럼 다리를 붙잡는 것을 털어내며 나아가는 것을 상상하시면 그 힘듦이 예상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힘듦을 잊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오름의 중턱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볼 때지요.

오름을 올라 뒤를 돌아보니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이 내 발 아래에 모두 보였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눈이 내리고 날씨가 잔뜩 흐린데 밑의 풍경이 잘 보일 리 없지요. 다만 목표를 향해서 정신없이 나아가다 멈추어 섰을 때 바람 소리 하나, 새소리 하나, 풀벌레의 울음소리 하나 안 들리는 고요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면 눈이 나풀나풀 지상을 향해 내려오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눈의 하강만 눈에 들어오며 움직이는 물체가 있음에도 소리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이질감이 드는 풍경이 제 모든 감각을 빼앗습니다.

하얀 눈이 세상 만물을 백지로 돌려버리고 소리마저 없애버린 풍경은 마치 자연의 중심부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합니다. 사실 우리는 도시에서 무수한 소리 아니, 소음에 시달립니다. 자동차나 비행기의 엔진 소리, 사이렌 소리, 사람들이 소리 지르고 뛰어 다니는 소리 등 다양한 소음이 도시의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단 한 순간도 소음을 듣지 않는 순간이 없죠. 그 소음을 다른 소리로 덮기 위해 음악을 틀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니는 것이 습관화 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도시를 벗어나 우리가 원했던 것은 새소리, 동물의 울음소리와 같은 자연의 다양한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도 들리지 않는 침묵일 수도 있습니다. 원했을지 모를 눈이 보여주는 침묵의 풍경 앞에서 우리는 치유 받고 편안함을 느끼게 되지요.

3-A코스에서 길고 긴 중산간 올레를 끝내고 신풍리 바다목장에 이르자 해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바다를 앞에 둔 너른 목장은 눈이 가득 쌓인 시베리아의 들판을 연상케 합니다. 눈이 잔뜩 쌓여서인지 말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눈이 가득 쌓인 넓은 목장과 바다와 하늘이 보이는 풍경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끝이 잘 보이지 않는 눈 덮인 땅, 구름이 채 가시지는 않았지만, 해가 인사하는 맑은 하늘과 하늘을 닮아 매우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광경은 자연이 이전에 보여주었던 침묵의 풍경을 깨고 오케스트라의 교향곡을 들려주는 듯했습니다. 3-A 코스의 끝인 표선 해수욕장에서는 모래사장이 눈과 같이 있는 희귀한 모습과 더불어 사람들이 만든 돌하르방 눈사람도 볼 수 있었습니다.

혹자는 설경이 아름다운 이유를 하얀 눈이 모든 흉측한 것을 덮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눈이 많이 내리면 세상 모든 것들을 새하얀 도화지처럼 만들기도 하지만, 분명 눈에 완전히 덮이지 않고 형체를 드러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새하얀 눈과 융화하여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새로운 풍경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제주올레라는 장소와 눈이 내린다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볼 수 있었던 다양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어 저의 올레 완주는 몹시 즐거운 길이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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