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의 제주 사진들을 보면 맑은 하늘 아래 푸르른 바다나 신록의 자연과 함께한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남쪽의 따스한 햇살을 가득 담은 다양한 빛깔들이 찬란한 사진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제주의 이미지지요. 하지만, 놀랍게도 제주의 맑은 날은 흔치 않습니다. 비나 눈이 내리지 않더라도 구름이 많이 껴있으며 어쩌다가 구름 좀 없는 날에도 강렬한 바닷바람이 살갗을 때리지요. 그래도 한 달 쯤 제주올레를 걸으면 맑은 날들을 꽤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제주는 강렬한 햇빛을 바탕으로 자신이 숨겨두었던 자연의 색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지요.
7코스 올레꾼들이 사랑하는 ‘수봉로’를 지나고 나면 자그마한 몽돌해안을 만나게 됩니다. 아침에는 조금 흐렸던 하늘이 이곳을 지날 때쯤 되자 구름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맑아졌고 원래는 빛을 내지 못하던 것들이 조금씩 제 빛깔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해가 뜬지 꽤 지난 시간이었지만, 겨울이라 해의 고도가 매우 낮아 바다에 아주 가깝게 떠있었습니다. 반질반질 닦인 몽돌길과 잔잔하게 들어오는 파도, 그리고 간만에 얼굴을 의기양양하게 드러낸 해가 어우러져 무척 평화로운 풍경을 자아냈습니다.
그리고 해가 뜨자 흐리면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 드러나더군요. 매우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듯 사람들이 다녀간 길의 돌만 돌의 표면이 닳아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밝은 햇빛이 제게 다가와 어쩌면 놓치고 지나갔을 앞에 지나간 사람들의 발자국과 이 길을 닦은 사람들의 고생을 말한 듯했습니다. 그 순간 사람들의 시간들이 돌에 반사된 햇빛을 통해 느껴져서 무척 감동을 받았습니다.
올레길이라고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호젓한 오솔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주시내나 서귀포시내를 지나기도 하고 제주의 각 면이나 읍의 중심지는 대부분 지나는 편이지요. 하지만, 이런 도심의 중심지가 아님에도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유명해진 관광지가 대표적인 예이지요. 근처에 큰 도심도 해수욕장도 없음에도 바다를 바라보는 카페와 유명세만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애월입니다.
올레 15-B코스에서 곽지해수욕장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애월의 카페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게 됩니다. 관광객들이 무척 많지요. 카페의 음악과 사람들의 말들로 무척 소란스러운 곳입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고 하기는 뭐합니다. 올레길에는 더 아름다운 장면들을 간직한 곳들이 가득하니까요. 사실 그래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날의 날씨는 무척 맑았고 하늘과 바다도 흔히 제주도를 생각하는 만큼 푸르렀지만, 올레길을 지나며 만난 무수히 많은 제주도의 특색 있는 풍경들보다 대단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맑은 날씨에 다른 곳들을 볼 수 있었으면’하는 생각도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입니다. 누군가는 애월의 카페에서 아름다움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고내포구의 올레지기께서는 15-B코스의 묘미는 야경이라고 하더군요. 카페에서 나오는 불빛과 어우러지는 바다가 참 예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밤에 그곳을 다시 갈 정도의 정성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밤에 갔으면 이곳이 다른 풍경이라며 아름답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보기 힘든 맑은 날씨에 이곳을 지나간 것이 조금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그러자 문득 제주에서 맑은 날이 얼마나 희귀한지를 깨닫게 되더군요. 육지에서는 평범하지만 제주에서는 흔치 않은 맑은 날의 풍경을 눈과 사진에 소중히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제주의 풍경들을 하나하나 담아가고 있을 때 정말 맑은 날에 오기를 잘했다는 곳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20코스의 끝인 세화해수욕장이었습니다. 맑은 날의 세화해수욕장을 보기 전까지 제가 생각한 최고의 제주 해수욕장은 협재해수욕장이었습니다. 비양도를 끼고 에메랄드빛깔을 뽐내며 검은 암반까지 모래사장과 섞여있는 협재해수욕장은 근래의 유명세 이상의 아름다움을 분명 보여주었습니다.
세화 앞바다는 비양도와 같은 섬이 따로 있지 않은 사실 그냥 평범한 바다입니다. 그러나 맑은 날 바라본 세화 앞바다는 매우 뚜렷하고 선명한 빛깔을 뽐내고 있었고 하늘 또한 무척 높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한 햇살을 그 무엇보다 눈부신 에메랄드빛으로 바꾸어 보여주는 세화바다는 살랑거리는 산들바람에 조용히 흔들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단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천을 가져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바다와 모두가 흔히 생각하는 이상적인 엷은 파랑색의 하늘은 수평선 너머까지 무한하게 뻗어 있는 듯 무한한 느낌까지 주었습니다.
바다를 위주로 제주의 맑은 날을 말한 것 같은데 맑은 날의 제주는 제각각의 색채를 뽐내며 눈은 즐겁게 하기에 무엇을 봐도 아름답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가장 평범한 아름다움이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제주의 날씨를 생각하면 제주에서는 꽤 보기 힘든 아름다움이기도 하죠. 그래서 가끔 볼 수 있는 진짜 맑은 날이면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한 아름다움이 그 무엇보다 특별한 아름다움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혹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 제주를 방문하게 된다면 제주 어느 곳에 있든 평범하지만 보기 쉽지 않은 제주를 하나하나 세세하게 보기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