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는 비를 무척 좋아합니다. 흔한 맑은 날보다 일상 같지 않은 특별함이 느껴져서 좋아하고 평상시에는 느끼기 쉽지 않은 제 마음속의 우울한 면모를 쉽게 들여다 볼 수 있는 날이라서 좋아합니다. 하지만, 겨울비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단 맞으면 온도가 떨어지기에 바람까지 불면 밖에서 감기에 걸리다 못해 동상에 걸리기 십상이죠. 특히, 무조건 야외 활동이 강제되는 제주올레 완주에서 겨울비는 최악입니다.
여름의 제주는 잘 알지 못하지만, 겨울의 제주는 비가 엄청 많이 온다고 말하기에는 애매합니다. 다만, 내륙보다는 많이 오는 것 같습니다. 1월 달에 호우주의보가 내리는 걸 제 눈으로 봤으니까요. 다행히 그 호우주의보는 새벽에 내리고 해제되었습니다만, 그 외에 아침부터 낮까지 많은 비가 내렸던 하루가 있었습니다.
그 날은 17코스를 걷는 날이었습니다. 숙소를 나오자마자 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방수대책도 이미 해놓았지만, 비가 많이 내려 몸으로 비가 스며드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간만에 비를 맘껏 맞는 기분이 들어 어린 시절 비 맞으며 뛰어 놀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 좋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한 한 시간 뒤에는 바닷바람이 몸 깊숙이 스며들며 비를 말려 체온을 뺏어가 매우 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몸을 부르르 떨어가면서도 몸 내부는 그리 춥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손 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원래 체질적으로도 손발이 찬데 우산을 쓴 상태에서 손이 젖으면서 손이 거의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아마 중간에 따뜻한 물로 씻고 말리는 일을 반복하지 않았다면 분명 동상에 걸렸을 것입니다. 쨌든 강한 바람에 실려 크게 치는 파도를 계속 바라보며 빠르게 걸어 완주는 성공했습니다. 극도로 지친 상태로 숙소에 도착한 뒤에는 혀를 내두르며 다시는 겨울비가 내리는 날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눈은 풍경을 볼 여유라도 있었지만, 장대비에 시달릴 때는 풍경을 볼 여유조차 생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보슬비가 내릴 때는 스산하고 어두워진 제주를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새벽에 호우주의보가 내리고 해제된 아침,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진다는 정도만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적은 비만 내리고 있었습니다. 서귀포 버스터미널에서 고근산을 지나 제주올레 여행자센터로 오는 7-1코스를 걷기로 한 날이어서 버스를 타고 서귀포 버스터미널까지 향했습니다.
서귀포 버스터미널에서 신시가지를 지나 천천히 고근산을 향해 가던 도중 매우 큰 물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쏴아아 정도의 소리가 아닌 콰아앙 정도의 매우 큰 소리였죠. 엉또폭포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풀숲을 옆에 끼고 조금 걸으니 풀과 나무가 가리고 있던 웅장한 자태가 드러났습니다. 100mm이상의 비가 오는 날만 물이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니 겨울에 엉또폭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말 그대로 천운이었다고 밖에 말을 못하겠습니다. 큰 바위벽을 옆에 끼고 우렁찬 소리를 내며 힘차게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기는 굉장했습니다. 마치 물의 군대가 거칠게 쏟아져 내리는 느낌을 주었지요. 솔직히 세찬 물줄기의 힘에서 나오는 느낌은 제주의 그 어떤 폭포보다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비가 오는 일이 마냥 좋을 수는 없지요. 원래는 서귀포의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와야 한다는 고근산 정상에 산안개가 짙게 깔려 있어 서귀포의 시가지는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고근산에서 내려와 아스팔트 도로를 걸을 때 과속방지턱의 페인트에 신발이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했습니다. 매우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라 주변에 사람은 다니지 않았지만, 페인트에 미끄러져 넘어졌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앉아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뭔가 엉또폭포라는 좋은 걸 봤으니 그 다음은 고생 좀 해보라는 누군가의 장난을 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도 바지를 털고 일어서서 이런 것도 추억이지 하며 다시 즐거이 길을 걸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비를 좋아합니다. 그래도 겨울비는 조금 피해볼까 합니다. 손이 얼어붙고 몸이 덜덜 떨만큼 추운데다 길이 쉽게 얼어 미끄러지기 쉬운 상황은 아무리 비가 내릴 때의 분위기가 좋다지만, 몸이 버티질 못한다는 것을 소중한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당연한 이야기를 굳이 비를 맞아가며 배운다고 한 소리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늘 경험은 상상 이상의 무언가를 전해주는 것이 있더군요. 비가 주는 고통은 상상보다 힘들었지만, 비가 내릴 때만 느낄 수 있는 제주의 신비하고 조용한 분위기와 모습은 제가 비 내리는 풍경을 상상하며 그렸던 장면 이상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제주에 비가 내린다면 가끔은 조용히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가 빗소리와 함께 제주의 자연을 오롯이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