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아름다움

부용정(芙蓉亭), 규장각(奎章閣) 주합루(宙合樓), 영화당(映花堂)

by baekja



낙선재의 그윽한 향기에서 벗어나 발걸음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면 다시 희정당 권역이 보입니다. 그쪽으로 가지 않고 발걸음을 동편으로 향합니다. 담장 사이의 자그마한 광장 같은 공간에는 컨테이너 박스와 매화나무가 보입니다. 봄이면 사람들이 잔뜩 모여 사진을 찍는 이곳은 창덕궁 매화 포토존으로 유명합니다. 홍매화가 피는 날이면 사람들이 모여서 이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죠. 서편에 하나, 동편에 하나 이렇게 두 그루 모두 크고 아름다워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저도 봄이면 이곳에 와서 매화를 실컷 구경하고 합니다.


20200328_121546.jpg


이 공간에서 서편 너머의 담장은 성정각(誠正閣)이 있는 동궁 권역이고 동편의 꽃담과 함께 있는 전각은 동궁의 부속 전각인 승화루(承華樓)입니다. 성정각은 세자가 공부를 하는 곳이었고, 승화루는 낙선재를 조성한 문예군주 헌종이 각종 책과 서화를 보관하던 곳이었습니다. 헌종 때 여기에 보관된 책과 서화 목록을 정리하여 <승화루 서목(書目)>을 펴냈는데 이를 보면 승화루에 보관된 책과 서화 등은 910종 4,555점으로 참으로 방대한 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모두 망실되어 찾을 수 없게 되었음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동궁의 한 구역이었을 이 빈 공간에서 이제 사람들은 후원을 들어가기 위한 기다림을 마음에 가득 채운 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없는 무더운 여름이나 눈 하나 없는 추운 겨울이면 컨테이너 박스에서 재빨리 후원을 예약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죠. 제가 이곳에 처음 서서 후원입장을 기다렸던 건 초등학생 때였습니다. 가족 4명이 전부 인터넷으로 예약하여 후원을 보러 가기로 했죠. 매우 많이 후원을 드나든 지금에 이르러서도 인터넷으로 후원을 예약하여 들어갔던 건 이 날이 유일합니다. 그때도 많은 사람이 서있었고, 비가 조금씩 왔습니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푸르른 나무들을 살피며 후원 입장을 기다리고 있던 날에도 비가 왔습니다. 다른 점이라면 비가 주룩주룩 쏟아졌다는 점일까요? 저는 우비를 꺼내어 입고, 가방에 방수커버를 덮었습니다. 준비가 끝나자 설명하시는 분이 나와 안내를 시작했습니다.


20220629_114601.jpg


설명하시는 분이 달라질 때마다 그 설명도 변하기 마련이지만, 늘 후원의 초입에서 하는 설명이 있습니다. 바로 명칭에 관한 것이죠. 당장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북원(北苑), 내원(內苑), 금원(禁苑), 후원(後苑), 비원(秘苑)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창덕궁 후원이라 칭하는 것은 후원이 조선의 모든 왕들을 통틀어서 이 정원을 지칭할 때 가장 많이 쓰인 단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후원은 언제부터 만들어졌을까요? 아마 창덕궁이 만들어지는 그때부터 어느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연못을 파고 건물을 지어 본격적으로 자연을 정원으로 경영한 것은 세조 때부터였습니다.


“후원(後苑)에 나아가서 좌우(左右)를 나누어 못을 파게 하고, 술과 고기를 역부(役夫)에게 내려 주었으며…”


“처음에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의 후원(後苑)이 얕고 좁다고 하여 동쪽 원장(垣墻)을 넓혀서 쌓으려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공 제조(繕工提調)에게 명하여 그 기지(基址)를 살펴서 정하게 하니, 주위의 둘레가 모두 4천 2백 척(尺)이고…”


위는 <세조실록> 세조 5년(1459) 9월의 기사이고, 아래는 세조 8년(1462) 1월의 기사입니다. 위의 기사는 세조가 연못을 팠다는 내용이고, 밑은 후원이 좁다하여 동쪽 담장을 넓혀 쌓아 후원의 넓이를 넓혔단 내용이죠. 이처럼 창덕궁 후원은 조선 초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이토록 오래된 정원을 하나씩 하나씩 관람할 차례입니다. 봄을 바라는 망춘문(望春門)을 왼쪽에 끼고 천천히 걸으면 하늘이 점점 나뭇잎으로 뒤덮이기 시작합니다. 비와 함께 녹음을 짙게 내뿜는 여름도 참 좋지만, 붉은 단풍이 하늘을 뒤덮는 가을의 정취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가을이면 후원의 초입은 울긋불긋한 단풍들로 물들어 사람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게 합니다. 단풍이 만들어낸 자연의 붉은 터널은 환상적이라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죠.


KakaoTalk_20230612_090747544_08.jpg


단풍나무 터널을 지나 언덕 아래로 내려가면 부용지(芙蓉池)와 주합루가 드러납니다. 나뭇잎에 가려져있던 비밀스러운 공간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이 순간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탄성을 자아내지요. 다만, 겨울이면 나뭇잎이 다 떨어져 나뭇가지 사이로 부용지와 주합루가 보여서 극적인 느낌은 떨어지긴 합니다. 그래도 아름답기는 매한가지죠. 이 아름다운 곳에 못을 처음 판 사람은 세조로 추측되고 이만한 크기로 넓힌 것은 연산군 때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숙종 때에 와서 못가에 택수재(澤水齋)라는 정자를 만들면서였습니다. 정조 때는 못을 다시 정비하고, 다 허물어져 가는 택수재를 정비하여 부용정이라는 정자를 지으면서 이름을 부용지라 하였습니다.


KakaoTalk_20230612_090747544_12.jpg


부용지는 네모나지만, 가운데 있는 섬은 둥급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따라 연못을 조성한 것이지요. 조선 시대 연못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모습입니다. 이 부용지를 둘러싸고 있는 네 가지 건물들 중 가장 먼저 볼 것은 부용정입니다. 그 이름이 똑같은 것처럼 정조가 이 부용지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 지은 아담하고 예쁜 건물이죠. 흔히 보기 쉽지 않은 ‘아亞’자형 건물에 두 기둥을 연못에 담그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 건물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도 볼만하지만, 역시 부용정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정자에 올라가 부용지 일대를 살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까지는 허락되지 않으니 그저 부용정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운 채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정조를 그저 상상해 볼 뿐입니다.


20220629_121146.jpg


정조는 이곳을 혼자 이용하기 위해 이렇게 조성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신하들을 불러 함께 놀기 위해 조성했지요. 다산 정약용의 <부용정 시연기(侍宴記)>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 있습니다.


“ … 부용정에 배를 띄우고 배 안에서 시를 지었는데 정해진 시간 안에 시를 지어 올리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연못 가운데 있는 조그만 섬에 안치(安置)시키기로 했다. 몇 사람이 과연 섬 가운데로 귀양을 갔는데 곧 풀어주셨다.”


봄날 꽃구경하고 낚시를 하면서 시를 지으면 술 마시던 정조와 신하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가운데 당시의 화목한 분위기에서 조선의 마지막 태평성대가 이루어졌던 그 시대가 보이는 듯합니다.


비가 오는 날 사람들은 아무도 부용정 근처로 가지 않습니다. 호기심에 누군가는 부용정을 살펴볼 만도 하지만, 비가 제법 오는 지라 비를 피할 수 없는 부용정 근처로 가기 보다는 사진을 찍고 대부분 부용지 동쪽에 있는 영화당으로 향합니다. 꽃과 어우러진다는 의미를 가진 이 전각은 <광해군일기>에 처음 이름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때의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고 숙종 18년(1692)에 재건한 건물이지요. 영화당은 원래 부용지를 보기 위해 만든 건물은 아닙니다. 영화당의 현판이나 영화당으로 오르는 기단이 부용지의 반대편에 있다는 것을 알면 쉽게 알 수 있죠. 지금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가르는 담장과 빈 공간 밖에 보이지 않는 이곳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단순하게 말하자면 더 큰 빈 공간이 있었습니다.


20220120_101220.jpg


창덕궁 후원을 이야기할 때 실록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이야기는 활을 쏘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창덕궁 후원은 곳곳이 나무로 덮여있어 시계가 넓지는 않습니다. 활을 쏠 수 있는 들판이 따로 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죠. 그 활을 쏘는 들판이 영화당 앞의 들판이었습니다. 원래 영화당 들판 앞의 담장은 없었고, 현재는 큰 창경궁 내의 큰 연못인 춘당지(春塘池)까지 그 들판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를 일컬어 춘당대라 하였습니다. 이 춘당대에서 했던 것은 활쏘기, 과거 시험, 연회 등등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보는 과거인 춘당대시(春塘臺試)는 유명하였죠.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과거를 본 곳도 이 춘당대였으며 글제가 ‘춘당춘색고금동(春塘春色古今同, 춘당대의 봄빛은 어제와 오늘이 같다)’였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매우 넓었던 춘당대는 1907년 이후 춘당대가 춘당지로 바뀌고 창덕궁과 창경궁 권역을 담장으로 분리하면서 사라졌습니다.(춘당지가 그 이전에도 있기는 하였으나 지금의 형태가 된 것은 1907년 이후 입니다.) 그리고 영화당 남쪽에 세워져 춘당대와 부용지를 갈라놓았던 행각과 담장은 이젠 사라져 영화당이 부용지 권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지요.


영화당이 없을 적에는 춘당대의 북쪽에 장전(帳殿)이라는 큰 천막을 두어 무과 시험이나 활쏘기 등을 관람하고는 했는데 영화당을 세우고 나서는 춘당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행사들을 영화당에서 시행했습니다. 다만 영화당에서 행사가 이루어진다고 영화당을 그대로 놔둔 것은 아니고, 영화당에 햇빛 가리개인 차일(遮日)과 나무로 짠 행사용 발판인 보계(補階)를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보계는 영화당 월대와 높이를 같게 하였으며 300명 정도가 그 위에 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영화당에서 춘당대를 바라보는 것이 그 원래의 목적이 맞으나 이제는 아무도 영화당에서 춘당대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부용지를 바라보고 있죠. 분합문을 열어 건물의 정면이 아닌 그 반대 또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조선 건물의 장점 덕에 우리는 영화당에서 부용지를 바라보며 봄에는 꽃과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코로나 초기에는 창덕궁 후원을 궁궐 안내하시는 분이 안내하지 않고, 좁은 구역에서 정해진 시간동안 자유롭게 관람하도록 해주었습니다. 그 덕에 무척 많은 시간을 부용지에서 보낼 수 있었고, 원래라면 사람이 많아 앉지 못할 영화당의 마루에 걸터 앉아볼 수 있었습니다. 차분히 앉아서 바라보는 봄의 고요한 부용지는 여태껏 맛보지 못한 부용지의 모습이었기에 제 마음을 사로잡았고, 잠시나마 왕이 후원에서 느꼈을 감상을 조금이나마 추측해볼 수 있었습니다. 고요한 황홀함이 가득했던 영화당 마루에서 본 부용지의 모습을 저는 제 최고의 부용지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91175562_1312077858985758_8321126697910927360_n.jpg


영화당에서 눈을 돌려 부용지 북쪽을 바라보면 이 권역에서 가장 큰 건물이 보입니다. 중층으로 된 저 건물은 아래층의 이름과 위층의 이름이 다릅니다. 아래층은 규장각, 위층은 주합루입니다. 정조는 1776(영조 52)년 즉위한 바로 그 해 3월 후원 안에 선왕 영조가 지은 글들을 보관하기 위한 어제각(御製閣)을 짓도록 명했습니다. 9월에 완성되면서 이름을 규장각으로 고쳤지요. 규장각은 숙종 때부터 궁궐 안에 왕실 서책을 보관하는 용도로 지었던 건물 이름이었습니다. 그 뜻은 ‘문장을 담당하는 하늘의 별인 규수(奎宿)가 빛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름과 용도가 참 잘 어울리죠.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고, 정조는 상층에 주합루라 이름을 지어 편액 글을 써서 걸었습니다. 주합루는 ‘천지우주와 통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정조가 이곳을 단순한 학문의 공간으로 생각하고 만든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규장각은 정조에게 있어 다분히 정치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규장각을 만들자마자 제학(提學), 대교(待敎) 등의 직제를 마련하고 황경원, 홍국영, 유언호 등 명신들을 임명했습니다. 어진 신하들을 후원 깊숙한 곳에 두어 신하와 소통하여 정치를 이끌어가겠다는 뜻을 천명한 것이죠. 정조 3년(1779) 3월에는 검서관(檢書官)직을 설치하고 특명으로 서얼 출신의 뛰어난 학자인 박제가·이덕무·유득공·서이수 등을 등용했습니다. 이들이 널리 알려진 규장각 사검서입니다. 정조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같이 어울리며 친애로 대했습니다. 약식을 내려주기도 하고, 박제가가 숙직을 자청해 규장각에서 책을 읽다 잠든 것을 보고 자신의 담요를 덮어주기도 하였지요. 이처럼 정조 시대의 문치가 이루어진 기반이 이 규장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합루 건립 때 아래층 규장각은 각종 어제, 어필을 봉안하도록 했으므로 그 용도가 뚜렷했지만, 위층 주합루는 그 용도를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언덕 위의 높은 곳에 자리한 주합루의 자리앉음새를 보면 경치를 감상하고 즐기기에 적합해보이지만, 주합루를 그런 용도로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주합루의 용도는 건립 5년째인 정조 5년(1781)에 드러납니다. 정조가 화원을 시켜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후 그것을 주합루에 봉안하도록 했죠. 이때 어진을 그린 화가는 한종유, 신한평(신윤복의 아버지), 김홍도였습니다. 총 3본의 어진을 제작하였고, 주합루에 봉안한 어진에 규장각 각신들이 1년에 네 차례 절을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국왕의 존엄을 올리기 위한 방법이었죠. 그리고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후대 순조, 헌종에 이르기까지 주합루에서는 역대 왕의 초상화를 모시고 철 따라 제사가 치러졌습니다.


주합루의 용도는 학문, 정치였지만, 이제는 정원에 딸린 건물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저 사시사철 주합루를 감상하면 될 뿐이죠. 주합루는 변하지 않는 건물이지만, 아름다운 주합루를 한껏 꾸미는 자연은 사계절마다 옷을 갈아입고 우리에게 아름다운 자태를 뽐냅니다. 저는 봄의 꽃핀 주합루, 여름의 짙고 푸른 주합루, 가을의 그윽한 주합루, 겨울의 눈 덮인 주합루를 전부 보았습니다. 주합루 주변에는 꽃이 많지 않다 보니 봄은 마냥 화사하지만은 않고, 눈이 내린다 하더라도 나무들이 헐벗은 겨울은 조금 스산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짙은 푸름을 더하는 비 오는 날의 여름이나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붉은 단풍들이 곳곳을 메우는 가을의 주합루가 훨씬 제 마음에 듭니다.


20200328_123054.jpg
KakaoTalk_20230612_090747544_25.jpg
20220120_101053.jpg
20220629_121251.jpg
주합루의 사계,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봄, 가을, 여름, 겨울


주합루에서 눈을 아래로 돌리면 주합루로 들어가는 문과 대나무 울타리가 보입니다. 문 이름은 어수문(魚水門)입니다. 어수는 물과 물고기라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는 ≪삼국지≫의 사자성어 수어지교(水魚之交)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만나 매일 붙어 다니자 이에 불만을 품은 장비가 유비에게 투정을 부렸고 이에 유비는 이렇게 답합니다. ‘내가 제갈량을 만난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임금과 신하의 사이가 무척 친함을 의미하죠. 신하들과 계속 어울려 소통하고자 했던 정조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다만, 임금이 드나드는 문은 높되 신하들이 드나드는 양쪽문은 매우 낮습니다. 임금의 어진을 봉안하고 있으니 임금의 존엄을 존중하라는 의미에서 허리를 숙이고 드나들라는 뜻이었겠죠.


어수문 옆으로 이어진 대나무 울타리는 신우대를 직접 심어 만든 생울타리입니다. 이를 취병(翠屛)이라고 합니다. 사실 생가지를 엮어 틀을 만들고 그 사이에 꽃들을 심어 아름답게 만들어야 하나 지금의 취병은 대나무 울타리에 대나무를 빼곡히 심은데 그치고 있습니다. 그래도 자연스런 멋이 제법 살아나 볼 맛이 있지요. 제가 찍어둔 2011년의 취병 사진을 보는데 무척 빈 공간이 많이 보입니다. 아직 대나무들이 다 자라지 못해 울타리를 제대로 메우지 못한 것이지요. 2022년에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대나무들로 울타리가 빼곡히 메워진 것을 보니 참 세월이 많이 흘렀다 싶습니다.


SDC10174.JPG
20220629_121229.jpg
2011년과 2022년 6월 29일의 취병, (사진에 나온 시간과 다른 것은 디카 사진기 시간이 이상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수문과 취병을 다 살피고 나면 부용지 서편의 비각(碑閣)을 살필 차례입니다. 사정기비(四井記碑)라는 이름이 붙은 비각 안의 비석은 숙종 때 세워진 것으로 세조 때 후원을 정비하며 판 네 개의 우물 중 두 개의 우물을 숙종 때 정비하고 이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이때 당시에 찾은 우물 두 곳도 세월의 흐름에 다시 묻혀 사라졌으나 2008년 부용지 주변 관람로 정비공사 도중 연못 북서쪽 모서리에서 우물 하나가 발견되어 숙종 대에 정비된 두 곳 중 하나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20220629_121338.jpg


주합루 주변에는 위의 전각들 말고도 책을 말리고 보관하던 서향각(書香閣)과 서향각 북쪽의 희우정(喜雨亭), 주합루 동북쪽 위에 있는 천석정(千石亭)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수문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기에 이 건물들은 아예 볼 수 없거나 멀리서 그 형체나 어렴풋이 볼 뿐입니다. 이 건물들의 기와지붕에까지 눈길이 미치고 나면 잠깐 주어졌던 관람의 자유시간은 끝나고 이동할 차례입니다. 여전히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후원의 더 깊은 곳으로 가기 위해 영화당 앞 춘당대에 안내자의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서 있었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