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하게 마음이 머무는 곳

낙선재(樂善齋)

by baekja



여춘문을 나와 동쪽으로 향합니다. 이제 앞을 가로막는 전각들이나 담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모래벌판을 조금 걸으면 저 너머 단청이 되지 않은 검갈색 나무로 지어진 큰 기와집이 보입니다. 낙선재입니다. 낙선재를 관람하기 전에 화장실이 가고 싶습니다. 남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언덕 위에 살짝 숨은 화장실이 보입니다. 가는 길을 꽃과 나무로 가려놓고 화장실의 높이를 낮게 하여 창덕궁 관람에 하등 방해가 되지 않게 하였습니다. 검회색의 돌들과 나무가 주가 된 화장실은 눈에 크게 띄지는 않으나 궁궐의 분위기와 어울려 우아한 멋을 냅니다. 화장실이 우아한 멋을 내다니. 뭔가 웃기지만, 정말 잘 만든 화장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늘 깔끔하게 유지되는 화장실의 내부도 이 화장실을 자주 찾게 만드는 이유가 되죠. 아름다운 화장실을 만들고 이를 잘 관리해주시는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20220629_113346.jpg


화장실을 이용하고 나오면 낙선재 일원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단 높이가 매우 높은 화계가 보입니다. 사시사철 푸른 반송(盤松)이 화계를 아름답게 꾸미고 있지만, 봄이면 이 화계의 주인공이 바뀝니다. 담장 너머 능수벚나무가 가지를 화계 안쪽으로 내려 벚꽃을 흐드러지게 피우면 사람들의 마음은 온통 그곳으로 쏠립니다. 작년 봄인가 방문했을 때는 그 벚나무 아래 줄을 서고 한 명씩 사진을 찍고 있더군요. 낙선재 앞의 너른 들판에 10여명이 줄 선 것을 보면서 ‘궁궐에서의 상춘(賞春)은 역시 창덕궁이 제일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날이 잔뜩 흐린데다 여름이니 화계 앞에 사람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더군요. 화계에서 눈을 돌려 낙선재로 향했습니다.


KakaoTalk_20230612_090747544_02.jpg


낙선재는 낙선재, 석복헌(錫福軒), 수강재(壽康齋)를 통틀어 부르는 말입니다. 낙선재에서 가장 먼저 지어지고 가장 서쪽에 있는 건물은 낙선재입니다. 길이 즐거움을 누린다는 낙선재의 정문, 장락문(長樂門)으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과 함께 낙선재의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납니다. 낙선재도 건청궁처럼 단청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권력 행사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자기 권력을 행사하려 건청궁을 만들었다면 헌종은 내전에서 떨어져 문예를 즐기기 위해 지은 개인 서재로 낙선재로 지었습니다. 이렇게 왕들이 단청을 하지 않은 기와집을 지은 것은 각기 다른 세부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모두 자신만의 편안함을 느낄 공간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20220120_092920.jpg


헌종을 생각하면 어떤 것이 떠오르시나요? 순조·헌종·철종으로 이어지는 세도정치 60년에 희생된 무능력한 왕으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헌종은 요절하여 그 업적을 남기지는 못하였어도 마냥 무능력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순조 34년(1834) 할아버지 순조의 사망 이후 8살의 나이로 왕좌에 오른 헌종은 자신이 15세가 되던 헌종 7년(1841)부터 수렴청정을 끝내고 자신이 정사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안동 김씨가 득세했던 정국은 이를 계기로 풍양 조씨가 주도하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을 이용해 왕권 강화를 시도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것들이 효과를 보기도 전인 헌종 15년(1849) 23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순식간에 스러져간 헌종의 삶을 조금이라도 깊이 보려면 문예를 사랑했던 군주의 삶이 드러나는 낙선재를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선(善)을 즐긴다는 낙선재에서 헌종은 문예 군주로서의 삶을 표방하여 많은 학자들과 신하들을 낙선재로 불러들여 접견했습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제자 소치(小癡) 허련(許鍊)을 만난 예가 대표적이죠. ≪소치실록(小癡實錄)≫에 그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1849년 1월 15일 나는 비로소 입시(入侍)했습니다. … 화초장을 지나 낙선재에 들어가니 상감께서 거처하는 곳으로 현판 글씨는 추사의 것이 많더군요. 향천(香泉), 연경루(硏經樓), 유재(留齋), 자이당(自怡堂), 고조당(古藻堂)이 그것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소치 허련은 낙선재에서 헌종을 세 번 더 알현하였습니다. 헌종은 허련을 만나 제주도에 귀양 간 추사의 안부를 묻고 추사의 서화를 받아오라고 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헌종이 죽기 직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를 통해 헌종이 얼마나 서화를 사랑한 문예 군주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낙선재의 마당에 서서 낙선재 건물을 보고 있노라면 문예 군주인 헌종이 사랑했던 건물인 만큼 문기(文氣)가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단청이 없어 겉으로는 위엄이 크게 드러나지 않으나 건물의 속에서 배어나오는 차분한 분위기가 마당 전체를 뒤덮고 있습니다. 낙선재는 차분한 분위기의 조용한 기와집이지만, 왕이 지내는 기와집인 만큼 기와집 곳곳을 꾸며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낙선재의 아궁이를 막아 놓은 가벽을 보면 얼음이 갈라진 무늬와 비슷한 빙렬(氷裂)문으로 꾸며 놓았고, 낙선재의 동편 담장은 거북이 등딱지 무늬인 귀갑(龜甲)문으로 담장을 꾸며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문살 또한 하나하나가 섬세한 무늬들을 새겨 놓아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차분한 문기 사이에 드러나는 이런 정교한 화려함은 낙선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입니다.


20220130_113644.jpg
20220130_113738.jpg
왼쪽은 빙렬문, 오른쪽은 귀갑문입니다


이 낙선재 건물 하나만 있었으면 낙선재 권역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겁니다. 옆의 두 건물까지 합쳐지면서 낙선재 권역이 꽤 커졌죠. 낙선재의 바로 오른쪽에는 석복헌이 있습니다. 탁 트인 낙선재의 마당과 달리 석복헌의 마당은 닫혀 있고 아늑한 느낌을 줍니다. 낙선재가 사랑채라면 석복헌이 안채라는 것일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죠. 낙선재에 왕이 살았으니 석복헌에는 중전이 살았을 것 같지만, 석복헌에 살았던 것은 헌종의 중전이 아니었습니다. 헌종이 무척 사랑했던 후궁 경빈 김씨였습니다.


20220629_113827.jpg


헌종은 재위 3년(1837) 열한 살에 효현왕후와 혼례를 올렸으나 효현왕후 김씨가 열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효정왕후 홍씨를 계비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헌종은 왕비에게 생산의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3년 후인 헌종 13년(1847)에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헌종의 강력한 의견 주장이 있었습니다. 계비를 뽑는 간택 자리에 직접 나가 간택에 참석한 헌종은 경빈 김씨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효정왕후 홍씨가 간택에서 뽑히자 이를 기다렸다가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맞이한 것이죠. 그토록 마음속에 담고 있던 그녀였기에 자신이 편하게 취미 생활을 즐기는 낙선재 옆에 그녀를 위한 석복헌을 지어준 것이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석복(錫福)’의 의미가 ‘복을 내려준다.’라고 생각하면 헌종은 경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아이도 만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헌종은 2년 후에 사망하였고, 효정왕후와 경빈 김씨 둘 중 누구와도 아이를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요절한 헌종과 달리 효정왕후와 경빈 김씨는 70세가 넘도록 사이좋게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컬한 기분이 듭니다.


석복헌 옆에는 수강재가 있습니다. 수강(壽康)은 ‘오래 살고 건강하다.’는 의미로 건물의 이름만 들어도 왕실의 어르신이 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원래 이곳은 태종이 세종에게 보위를 물려준 후 머물던 수강궁(壽康宮) 자리인데 수강궁 동편에 창경궁(昌慶宮)이 생기면서 수강궁이 사라졌고, 이 자리에 세자가 머무는 동궁전의 여러 전각들이 들어섰으나 화재로 불타고 정조 때 수강재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서재를 지었습니다. 헌종이 이것을 행랑으로 연결시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머물 수 있는 지금의 모습으로 바꾼 것입니다. 당시에는 단청이 칠해져 있었다는 점이 아마 당시와 다른 유일한 점일 것입니다.


SDC11455.JPG


수강재까지 보고 나와 조금 더 오른쪽으로 움직입니다. 정조의 서재로 기능했던 때부터 있던 우물을 지나쳐 낙선재에 딸린 몇몇 건물의 사이를 지나 동편 담장의 끝에 이릅니다. 동편 담장 너머로는 창경궁이 보입니다. 담장이 높아 보기 쉽지 않지만, 중학생 겨울 저는 이 너머로 창경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동생과 함께 창덕궁, 창경궁을 전부 관람하던 날이었습니다. 눈이 이미 꽤 왔었고, 돌아다니는 중에도 눈이 왔었습니다. 원래 이 구석까지 발걸음이 닿을 일은 없었지만, 담장 구석에 눈을 쌓아둬서 궁금하여 구석까지 가보았습니다. 이미 얼어서 딱딱해진 자그마한 눈 언덕 위로 올라가서 창경궁을 구경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없이 구경했던 지라 이곳에 디지털 카메라의 sd카드를 떨어트려 놓았고, 창경궁을 다 관람하고 난 후에야 그것을 눈치 챈 저는 간신히 이곳에 돌아와 sd카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동생 앞에서 태연한 척 했지만, 눈 언덕 위에 있는 sd카드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20220629_113847.jpg
20220629_113935.jpg
왼쪽 수강재 앞의 우물, 오른쪽 눈이 쌓여 있던 동쪽 담장


동편 구석 담장에 남은 추억을 되새기고 다시 수강재로 들어가 낙선재의 후원으로 향했습니다. 낙선재의 후원은 아름다운 화계와 꽃담, 꽃담 너머의 몇몇 전각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쉽게도 화계 너머로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기에 화계 아래에서 그 모습을 살짝 엿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수강재 뒤로 후원에 들어오면 낙선재의 화계가 펼쳐집니다. 교태전 뒤의 아미산이 화려하고, 대조전 뒤의 화계가 규모가 크고 널찍하다면, 낙선재 뒤의 화계는 아기자기함과 섬세함이 돋보입니다. 뇌문(雷紋)과 연환문(連環紋)이 끝도 없이 수놓아진 꽃담 아래로 갖가지 꽃과 나무들이 화계 곳곳에 딱 알맞게 배치되어 있으며 꽃과 나무 사이사이 예쁜 굴뚝들은 인공미와 자연미의 조화를 완성합니다. 화계 아래로는 수석(壽石)들이 석대 위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금사연지(琴史硯池, 거문고를 연주하고 역사책을 읽는 벼루같은 연못)라고 쓰인 네모난 돌 연못은 이 공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물마저 끌어와 이상향의 풍광을 이곳에 재현합니다.


20220120_093409.jpg
20220629_114125.jpg


홀린 듯 화계를 바라보다 위를 보면 상량정(上凉亭)의 지붕이 보입니다. 상량정의 제대로 된 모습은 오히려 위에서 말한 화장실 앞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낙선재 바로 위로 보이는 높은 정자가 바로 상량정이죠. 원래 이름은 평원루(平遠樓)였으나 상량정으로 이름이 변하였습니다. 시원한 곳에 오른다는 이름처럼 낙선재 화계 한참 위에 있는 이 상량정은 승화루(承華樓)에서 바라보면 꽃담이 무척이나 아름답습니다. 원형으로 된 만월문은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것으로 신비한 분위기까지 자아냅니다. 다만, 봄에 특별 관람을 신청해야만 볼 수 있어서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20220629_114117.jpg 사진 위쪽의 지붕이 상량정


상량정 동편의 한정당(閒靜堂)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한정당은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1917년에 만들어진 <동궐도형>에는 없고, 1936년 만들어진 창덕궁 평면도에 는 그려져 있어 그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래서 1926년 순종 승하 후에 순정효황후 윤씨가 대조전에서 낙선재 석복헌으로 거처를 옮긴 후 1950년 초까지 살았으므로 윤비를 위해 석복헌 뒤 언덕 위에 이 건물을 지었다는 추측이 있습니다. 작지만 정교하고 세밀한 장식들이 많은 한정당은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후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라는 구심점마저 잃은 조선 왕실의 쓸쓸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정당의 ‘한가하고 조용하다.’는 의미가 마냥 편안하게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이 한정당 담 너머 동편에는 취운정(翠雲亭)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해 저는 저 건물이 저기쯤 있겠거니 그저 추측할 따름입니다.


20220120_093400.jpg
20220629_114050.jpg
화계 위에 보이는 건물인 한정당


순정효황후 윤씨가 낙선재 석복헌에 자리 잡은 이후 낙선재는 조선 왕실 가문의 마지막 거처가 되었습니다. 고종 아래의 황실 직계는 장성한 네 자녀인 순종,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가 있었습니다. 1926년 순종 황제의 사망 이후 나머지 세 명은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버림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셋의 한국 국적 회복과 귀국을 거부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후에야 국적을 회복하고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순정효황후는 이승만 대통령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6·25전쟁 때까지 창덕궁 낙선재를 지켰으나 인민군의 압박으로 인해 운현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휴전 이후 낙선재로 귀궁하려 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거부당하여 4·19 혁명 전까지 낙선재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960년 5월 15일 낙선재로 다시 온 뒤 1966년 죽을 때까지 낙선재 석복헌에서 삶을 보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국장으로 치러졌고, 대한민국 최초의 국장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순종의 유릉(裕陵)에 합장되었습니다. 부장품에는 토스터기와 커피포트가 있었다고 하니 그녀가 73살 평생 동안 얼마나 격변의 시기를 거쳤는지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1907년 순종 다음의 황태자에 책봉된 영친왕은 1920년 일본 친왕의 딸과 마사코(方子, 마사코)와 정략결혼을 시켰습니다. 일본에 억류되어 있다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하려 했으나 정부의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1963년에야 국적을 회복할 수 있었고, 귀국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걸린 상태였습니다. 병환으로 인해 낙선재는 잠시 방문하고 말년 내내 병원에서 보내다 결국 1970년 향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영친왕비인 이방자 여사는 1963년 영친왕과 함께 귀국한 이후로 장애인 복지 사업에 전념하고 시누이인 덕혜옹주를 챙기며 지내다 1989년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소설과 영화로 이미 널리 알려진 덕혜옹주는 8세에 아버지 고종을 잃고 14세에 유학을 명분으로 생모와도 헤어져 일본으로 끌려가 대마도의 번주와 정략결혼 했습니다. 잘 맞지 않는 결혼 생활과 향수 등 각종 외부적 문제로 인하여 결혼 전후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덕혜옹주는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미군정의 일본 귀족 재산 몰수로 돈이 없어진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후, 일방적으로 이혼절차를 밟았습니다. 1962년 기나긴 일본 생활 끝에 서울로 돌아온 그녀는 수강재에 머물며 순정효황후와 이방자 여사의 보살핌을 받다 1989년 사망했습니다. 이방자 여사의 사망 9일 전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시기 낙선재에서 살았던 황실 사람들은 이들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사이에서 난 황세손 이구가 그였습니다. 뉴욕의 아이엠페이(I. M. Pei)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던 그는 1959년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과 결혼하였고, 1963년에는 줄리아와 귀국하여 낙선재의 한정당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이구는 사업 실패 후 1973년 일본으로 돌아갔고, 종묘제례 때에나 한국을 방문하고는 했습니다. 이구와 줄리아 부부는 1977년부터 별거에 들어갔고 종친들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이혼을 종용하여 1982년 두 사람은 이혼했습니다. 2005년 도쿄에서 이구는 후손 없이 죽었고, 대한제국의 황태자인 영친왕의 자손인 이구가 죽음으로써 대한제국 황실의 적통은 끊기게 되었습니다. 의친왕이 남긴 자손이 많아 대한제국의 핏줄은 끊기지 않았으나 낙선재와의 관계는 없어 낙선재는 이제 빈 상태로 관람객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군주가 사라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대한제국의 핏줄을 더 따지는 것도 웃긴 일이지요. 그저 역사의 한 이야기의 연장선으로 남아 우리에게 이런저런 과거를 떠올리게 할 뿐입니다.


이제는 널리 알려진 덕혜옹주의 이야기와 봄이면 만발하는 꽃들로 인해 낙선재는 더 이상 마냥 조용한 공간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한 번 쯤 와서 꼭 둘러보고 가는 곳이 되었죠. 공간이 주는 분위기는 차분하고 문기가 있으나 사람들이 많이 오기에 제가 여기 와서 쉬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가서 창덕궁에 들르면 꼭 한 번 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격조 있는 문기와 아담하고 예쁜 장식들이 어우러져 사랑스러운 공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마지막까지 사람이 살았던 궁궐 건물이라 그 사람들의 삶과 숨이 배어 있어 이 공간을 더욱 찾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헌종부터 이방자 여사까지 150여 년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역사에 제 삶과 마음까지 은은하게 배어있는 이 공간을 보러 늘 창덕궁을 찾을 것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