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련정(愛蓮亭), 의두합(倚斗閤), 연경당(演慶堂)
춘당대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는 멈출 생각을 안 하고, 창덕궁 곳곳의 모래에는 물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물 고인 곳을 밟으면 시원한 빗물이 신발 안으로 들어옵니다. 무더위를 피해서 좋아해야 하는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울상을 지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비가 많이 온 덕에 흐릿한 시계가 만들어져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창덕궁 후원의 산책길이 조금 더 신비로워집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금마문(金馬門)이 나옵니다. 보통 관람에서는 금마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담장을 따라 더 걸어가서 불로문(不老門)으로 들어갑니다. 판석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든 이 문은 후원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문이기도 합니다. 전서체로 쓰여 있어 처음 보면 잘 읽히지 않으나 몇 번 보다보면 금방 알 수 있게 됩니다. 쇠못을 박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이 돌로 된 문틀 사이에 문짝을 고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앞에는 불로지(不老池)라는 연못이 있었고 이 곳에도 과녁을 놓아 춘당대처럼 무과의 활쏘기 실력을 측정했다고 합니다. 이 문은 조선 시대에 갑자기 만든 것은 아니고, 한나라 궁궐의 여러 문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제 좀 덜 늙어보려고 불로문으로 지나가면 꽤 큰 연못과 그 연못가에 자리 잡은 정자가 보입니다.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입니다. 경복궁의 향원정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애련정의 이름을 따왔습니다. 처음 이곳을 봤을 때는 그리 마음이 가지는 않았습니다. 심심한 모습의 연못과 작은 정자. 눈에 보이는 것만 담으면 그렇죠. 하지만, 연잎이 무성한 여름이면 이 연못의 크기가 참 알맞고, 무성한 연잎과 적당히 넓은 연못에 지지 않는 당당한 모습의 정자가 참으로 어울립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후원 곳곳을 대하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아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유순하게 흘러가는 분위기는 읽을 수 있을지언정 더 어릴 때의 패기는 조금 사라진 것 같아 그에 대한 아쉬움도 남아 있습니다.
연잎과 연못, 정자가 어우러진 애련정 주변의 분위기를 만끽하고 나면 이제 이 정자와 연못을 조성한 숙종에게 관심을 가져볼 차례입니다. 숙종 18년(1692)에 연못을 조성하고 가운데에 정자를 만든 뒤 애련정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가운데에 있던 정자는 이제 북쪽 못가에부터 있지만, 그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숙종은 <애련정기(愛蓮亭記)>에서 이곳을 여가를 즐길 때 씀을 밝히면서도 그 때에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쓰며 두려워하고 삼간다면 다스려지는 효과가 날로 바르게 될 것이니 풍경의 번화함만 구경하겠다는 즐거움이라면 나는 이를 취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도 즐거움만 취하지 않겠다니 조선시대 왕들이 대단하게 느껴지면서도 그들의 삶이 조금 팍팍하게 느껴집니다.
애련정에서 뒤를 돌아보면 담장 너머로 두 채의 아담한 기와집이 보입니다. 동편의 조금 큰 기와집은 의두합이고, 서편의 한 칸짜리 기와집은 운경거(韻磬居)입니다. 의두합은 순조 26년(1826)에 효명세자가 자신의 독서처로 지은 건물로 석거서실(石渠書室)로 이름을 지었다가 이듬해 대리청정을 맡고 나서 이름을 의두합으로 고쳤습니다. 의두(倚斗)는 ‘북두성에 의거하여 서울의 번화함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다만, 이 건물의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기오헌(寄傲軒)으로 기오(寄傲)는 ‘거침없이 호방한 마음을 기탁한다.’는 뜻입니다. 거침없이 호방한 마음을 기탁할 만큼 편안한 집이라는 뜻이죠. 다른 대다수의 기와집들과 달리 북향인 것이 특징인데 편안히 공부하는 곳이라 햇빛이 덜 드는 북향으로 지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후원이라는 정원에 공부하는 곳을 지은 곳부터 효명세자가 무척 학구적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학구적인 것이 아니라 아버지인 순조가 18세인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을 맡기 전 궁궐 밖으로 나가 박규수 등의 젊은 학자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가르침을 받을 정도로 깨인 사람이었습니다. 대리청정을 하자마자 효명세자는 이미 흔들리기 시작한 조선의 토대와 그로 인해 발생한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50여 차례의 과거를 실시해 전국의 인재들을 등용하였고, 장인 조만영과 그의 동생 조인영 등을 중용하여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함은 물론 추사 김정희와 권돈이 등 반(反) 안동 김씨 세력들의 지지까지 얻어냈습니다. 하지만, 무너져가는 조선은 하늘조차 버렸습니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3년 만인 순조 30년(1830)에 사망하였습니다. 다산 정약용까지 궐에 불렀으나 이미 세자는 살 방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살았다면 ‘정조 때와 같은 조선의 문예 부흥을 한 번 더 볼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은 들지만, 흘러간 세월은 변하지 않는 법이지요. 조선은 점점 무너져갔습니다.
운경거에서 운(韻)은 울림(리듬) 운 자고 경(韻)은 악기의 하나인 경쇠 경입니다. 이 이름을 비추어 볼 때 춤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효명세자가 악기와 무용 도구를 보관했던 곳으로 보입니다. 효명 세자는 정치, 학문 뿐 아니라 예능에도 큰 재능을 보였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재능을 보였던 것은 무용이었습니다. 궁중무용을 보통 정재(呈才)라고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정재는 ‘재주를 보인다.’는 뜻으로 춤뿐 아니라 모든 재예를 말한 것인데, 차츰 궁중무용의 대명사가 된 것이죠. 효명세자 이전에 창작된 정재는 5종목이었으나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춘앵전(春鶯囀)>, <헌천화(獻天花)> 등 무려 19종목의 새로운 정재가 등장했다. 그중 효명세자가 13종목의 정재 창사(唱詞, 춤추는 사람이 직접 부르는 노래 가사를 말하는 것)를 지었습니다. 또 효명세자 이전에는 정재에 독무가 거의 없었는데 <춘앵전>에서 시도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재는 대부분 연경당에서 벌어진 연회에서 등장했습니다. 그 연경당을 보려 발걸음을 돌립니다. 애련정에서 북서쪽에 보이는 큰 기와집이 바로 연경당입니다. 이 연경당도 효명세자가 건립했습니다. 순조 27년(1827)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세운 이유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사대부의 생활을 알기 위해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요청하여 세웠다는 설과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경축 의식을 거행할 곳으로 건축했으며 ‘연경’이라는 이름도 이 때에 지었다는 설이죠. 연경(演慶)의 의미가 ‘경사가 널리 퍼진다.’라는 것을 생각하면 뒤의 설의 훨씬 설득력 있는 이야기입니다.
연경당의 앞에 서면 정문인 장락문(長樂門)이 있습니다. 길이 즐거움을 누린다는 장락문을 지나면 행랑과 함께 두 가지 문이 나옵니다. 이곳 행랑은 보통 하인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행랑과 같은 공간에서는 평범한 궁궐의 전각에서 보기 쉽지 않았던 것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뒷간이나 말을 매어두는 주마장도 이곳에 있죠. 행랑에서 눈을 돌리면 사랑채로 들어가는 장양문(長陽門, 오래도록 볕이 드는 문)과 안채로 들어가는 수인문(修仁門, 어짐을 닦는 문)이 있습니다. 장양문은 솟을대문이고 수인문은 그냥 문인데 그 이유는 사랑채로만 초헌(軺軒, 벼슬아치가 타고 다니던 외바퀴 수레)가 드나들었기 때문입니다.
행랑에서 잠시 멈추어 설명을 듣는데 낙숫물이 떨어지는 모양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방울이 쉴 새 없이 처마 끝에서 내려 떨어져 이미 지붕 아래로는 물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비가 워낙 많이 오는지라 빠르게 물웅덩이로 물방울이 떨어지며 계속 동심원을 만들어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동심원 모양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만들어지며 땅에 하나의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여름의 소낙비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한옥의 숨겨진 멋이었습니다.
낙숫물에 눈을 떼니 이제 장양문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랑채의 너른 마당이 드러납니다. 이곳에서 효명세자는 세 차례의 연회를 열었는데 순조 27년(1827)에는 부왕에게 존호를 올리는 자경전 진작정례의(慈慶殿進爵整禮儀)를 행했고, 이듬해 무자년에는 어머니 순원왕후의 40세 생일을 기념하는 무자 진작의(戊子進爵儀), 그 이듬해인 기축년에는 부왕 순조의 등극 30년과 탄신 40년을 기념하는 기축 진찬의(己丑進饌儀) 연회를 열었습니다. 이러한 연회는 그냥 먹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올려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아, 안채와 사랑채를 나누는 내외담이 있는데 어떻게 연회를 했을지 궁금해 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바깥의 마당은 내외담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사랑채와 안채가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쉬이 오가며 사랑채의 마당에서 연회를 즐길 수 있었지요.
연회를 열며 새로운 조선을 만들고자 했던 효명세자는 요절했고, 이곳은 효명세자의 어진을 봉안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습기가 많아 헌종 3년(1837)에 어진을 다른 곳으로 옮긴 후 한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종을 왕위에 올린 신정왕후 조대비가 고종 2년(1865) 남편인 효명세자가 지었던 연경당을 크게 수리했습니다. 이렇게 수리된 연경당은 경복궁 중건 이후로 또 비어 있다가 고종 20년(1884) 갑신정변 때 청군에게 쫓기던 개화파와 고종의 피신처가 되었고,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여는 곳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1917년 창덕궁 내전 화재 때에는 순종과 윤황후의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많은 사연이 있는 연경당이지만, 낙선재나 건청궁과 달리 제 마음은 이곳에 잘 머물지 못합니다. 아마 늘 사람들과 부대끼며 몰려다니고 설명을 들으며 촉박하게 움직여야 하는 창덕궁 후원 관람 방식 때문이겠지요. 아마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면 단청 하나 없는 기와집인 이곳도 제 마음이 머무는 곳이 되었을 겁니다. 저는 여기 길게 머물 수 없었지만, 순조나 조대비는 종종 여기서 길게 머물며 총명했던 아들이자 남편이었던 효명세자를 추억하지 않았을까요?
연경당에는 사랑채와 안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향재(善香齋, 좋은 향기가 서린 집)라는 책들을 보관하고 책을 읽는 서재와 북동쪽에 자리한 농수정(濃繡亭)이라는 정자가 연경당을 또 꾸며주고 있죠. 선향재는 서향 집이어서 석양빛을 가리기 위해 처마 앞쪽으로 동판으로 만든 인갑문 차양을 덧대고 그 아래에는 삼끈과 고패로 기울기를 조절할 수 있는 이중 차양을 설치했습니다. 선향재의 옆 벽면에는 연꽃과 비슷한 꽃 모양이 그려져 있는데 태평화(太平花)라고 합니다. 태평화는 잘 다스려진 안락한 세계인 태평세계를 상징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도 모르게 늘 태평화에 끌려 연경당만 오면 태평화 사진을 찍어두곤 했습니다. 그래서 연경당하면 고즈넉한 기와집의 이미지도 있지만, 늘 이 태평화가 떠오릅니다.
선향재 뒤편에는 화계가 있고, 그 위에는 농수정이 있습니다. ‘농수(濃繡)’는 ‘짙은 빛을 수놓는다.’는 의미입니다. 농수정이 연경당 깊숙한 곳에 있어 늘 녹음에 둘러싸인 풍경을 표현한 말이죠. 아담하지만 당당한 애련정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농수정을 보고 나면 연경당 관람은 끝입니다. 이제 태일문(太一門)으로 나가 창덕궁 후원의 다른 연못들과 정자들을 만날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