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덕정(尊德亭), 옥류천(玉流川)
태일문을 나와 산책길을 조금 걸어가면 몇몇 건물들이 보입니다. 길을 내려와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건물은 폄우사(砭愚榭)입니다. 폄우(砭愚)의 의미는 ‘어리석은 자에게 돌침을 놓아 경계한다.’는 의미입니다. 효명세자의 독서처로 잘 알려져 있으나 정조가 남긴 <폄우사사영(砭愚榭四詠)>이라는 글이 있는 것을 보아 정조 이전 시기부터 존재한 건물로 보입니다. 2칸이 온돌방이고 1칸이 누마루여서 여름이나 겨울이나 편히 쉬며 책을 읽기 좋은 곳으로 보입니다.
폄우사에서 살짝 고개를 돌리면 무척 화려하고 격식 있는 정자가 보입니다. 인조 22년(1644)에 세워진 이 정자의 이름은 존덕정입니다. 덕을 높인다는 의미를 가진 이 정자는 생긴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육각정이어서 사각정보다 훨씬 화려해 보이고, 지붕은 두 겹으로 하여 아래에는 눈썹 지붕을 올리고 맨 위에는 절병통(節甁桶)을 올렸습니다. 정자임에도 마루에 바깥 퇴를 두었을 뿐 만 아니라 6개의 주 기둥 주위로 각각 3개씩의 가는 기둥이 둘러싸고 있어 정자의 격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장에는 청룡과 황룡이 어우러져 있어 이곳이 평범한 정자는 아니란 것도 추측할 수 있죠. 이 정자가 유명해진 것은 이런 격식 높고 특이한 외면 때문이 아니라 여기에 걸린 정조의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 현판 덕분입니다.
조선 후기 최고의 개혁 군주로 이름이 드높은 정조가 정조 22년(1798)에 쓴 이 글은 정조의 정치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이를 여기에 다 옮길 수는 없고 짧게 요약해보겠습니다.
‘달은 하나뿐이고 물의 숫자는 1만 개나 되지만, 달빛이 물에 닿으면 1만 시내에 전부 달이 생겨 달이 1만 개가 된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달은 물론 하나뿐이다. 세상에는 많은 이들이 있고,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이러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내 식대로 쓰면서 피곤함을 느껴온 지 어언 20여 년이 되었다. 이 세월을 겪으며 느낀 바는 사람은 생김새 대로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이 변할 때 그에 비춰진 달도 변하지만, 여전히 하늘의 달은 그대로 밝다. 물이 다양한 세상 사람들이라면 달은 나이다.’
쉽게 말하자면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파악하여 그에 맞추어 쓰는 것이 자신의 통치 철학이며,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달인 나 하나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왕이라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만나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이들을 파악하여 어떻게 써야 할지 정조는 이미 근본적인 해답을 내놓았고, 그에 맞는 섬세함도 갖춘 임금이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능력자죠. 그리고 밤하늘의 달이 오직 하나인 것처럼 사람을 활용하여 잘 쓰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라는 말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많은 개혁을 실시했던 강한 군주로서의 정조를 추측해볼 수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존덕정에서 뒤를 돌면 관람정(觀纜亭)과 관람지(觀纜池)가 보입니다. ‘관람(觀纜)’은 닻줄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뱃놀이를 구경하고자 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관람정은 무척 생김새가 특이합니다. 부채꼴 모양에 파초잎 모양의 현판을 달고 있죠. 존덕정이 격식이 높은 정자라면 관람정은 무척 장식성이 강한 화려한 정자입니다. 보고 즐기기에 적합한 정자죠. 관람정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아 1907년 순종이 창덕궁에 이어한 후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관람지 또한 이 때 서로 다른 세 못을 합쳐 관람지로 조성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처음 조성했을 때는 호리병 모양이었으나 1911년에 와서 연못을 한반도 모양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이후로 반도지(半島池)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일제강점기부터 사용된 이름인지라 이 연못을 끼고 있는 관람정의 이름을 따 요즘은 관람지라고 부릅니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는 관람지이나 그 모습의 화려함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정자이기도 합니다. 존덕정 권역에서 자유시간을 주면 많은 분들이 관람정 주변에 서서 관람지에서 했던 뱃놀이를 상상하기도 하죠. 코로나가 막 시작하고 잠시 동안 창덕궁 후원이 정해진 시간 내에 정해진 구역에서 자유 관람이었을 때 친구와 함께 관람정을 찾았던 적이 있습니다. 화창한 봄날에 부채꼴의 관람정에서 화사한 분위기를 한껏 즐기고 있을 때 부채꼴의 정자를 보고 신기해하던 친구가 갑자기 천장을 보더니 탄성을 지르더군요. 따스한 햇빛이 관람지의 일렁이는 물결에 반사되어 관람지의 천장을 또 다른 물결로 적시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감탄하며 이것이야 말로 눈으로 즐기는 뱃놀이라 생각했습니다.
관람정의 반대편 언덕에는 또 하나의 정자 승재정(勝在亭)이 있습니다. 여름에는 무성한 나뭇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나뭇잎이 다 떨어진 겨울이면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승재정 또한 1907년 순종의 이어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한 승재정은 그 이름처럼 경관이 빼어납니다만, 주변의 나뭇잎 때문에 경관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겨울이면 꼭 승재정에 올라 관람지와 관람정의 모습을 살펴보시기를 권합니다.
승재정까지 보았으면 이제 존덕정 옆의 돌다리를 건너 다음 권역으로 넘어갈 차례입니다. 작고 예쁘게 생긴 돌다리와 석조를 건너 반월지(半月池)에 두 발을 담근 존덕정에 다시 눈길을 한 번 주고 천천히 걸음을 재촉합니다. 지금부터 후원의 가장 깊은 권역인 옥류천 권역까지는 험한 오르막길입니다. 다행히 비가 조금 그쳐 조금 쉬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름철이야 무성한 이 길에서 나뭇잎밖에 보이지 않지만, 봄이면 개나리가 활짝 피어있고, 벤치에서는 고양이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잠시나마 시끄러운 도시에서 벗어나 힐링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죠. 이 오르막길의 하이라이트는 언덕 꼭대기 근처에 있는 아름드리 벚나무에 흐드러지게 핀 벚꽃입니다. 화창한 봄날 하얗게 핀 벚꽃이 반기는 언덕길은 마치 무릉도원의 입구로 향한다는 느낌마저 줍니다.
그렇게 이것저것 구경하며 언덕길의 끝까지 오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취규정(聚奎亭)을 만납니다. 취규정에 올 때쯤이면 숨을 헐떡이시지 않는 분들이 없어 이곳에서 설명을 들으며 쉬어 갑니다. 이 정자는 인조 25년(1647)에 만들어졌으며, 별들이 규성(奎星)으로 모여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운(文運)을 관장하는 규성에 별들이 모여든다는 것은 인재가 모여들어 천하가 태평해짐을 의미합니다. 이곳에서 이제 옥류천이 있는 언덕 아래로 내려갈 차례입니다. 제법 경사가 있어 힘든 분들은 이곳에서 바로 후원을 나가시도록 권하고 있지만, 5개의 정자가 모여 있는 옥류천 권역을 보지 않는 것만큼 손해가 없지요.
언덕길을 내려가면 취규정과 비슷한 정자가 맨 처음 관람객들을 맞이합니다. 푸르고 서늘하다는 뜻을 가진 취한정(翠寒亭)입니다. 언제 지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숙종의 <취한정제영(翠寒亭題詠)>이 있어 숙종 이전에 지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취한정 또한 독서와 휴식의 공간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취한정을 지나 옥류천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섭니다. 옥류천 내에는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청의정(淸猗亭), 농산정(籠山亭)이 있으며 이 중 인조 14년(1636)에 세워진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을 통틀어 상림삼정(上林三亭)이라고 합니다. 인조는 창덕궁 후원을 적극적으로 경영한 임금 중 하나였습니다. 창덕궁이 인조반정으로 불탄 후 인조는 인조 25년(1647)까지 창덕궁을 영건하면서 후원에 이런저런 정자들을 세웠습니다. 그 중 남아 있는 예가 옥류천과 상림삼정인 것이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인조의 부정적 평가들을 생각해보면 무언가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역사적 평가들은 뒤로 하고 인조가 조성한 옥류천에 집중해 보죠. 응봉 자락에서 내려온 물줄기를 끌어와 너럭바위에 홈을 파서 인공적으로 돌린 후 폭포처럼 떨어지게 한 옥류천은 무척 운치가 있습니다. 이 옥류천이 돌아나오는 큰 바위 소요암(逍遙巖)에 ‘玉流川(옥류천)’이라는 한자도 인조의 어필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옥류천을 많은 임금들이 즐겼습니다. 특히 숙종은 옥류천을 오언절구 시로 지어 옥류천 글자 위에 새겼습니다.
飛流三百尺 삼백 척 높이에서 날아 흐르니
遙落九天來 저 멀리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듯
看是白虹起 바라볼 땐 흰 무지개 일어나더니
飜成萬壑雷 갑자기 온 골짜기 우렛소리 이루었네
무척 커다란 폭포를 연상시키게 하는 시지만, 물줄기가 좀 있다는 여름도 비가 무척 많이 오고 난 후가 아니면 실폭포가 전부입니다. 그나마 가장 굵은 물줄기를 본 것은 제 중학생 때였는데 그 때를 생각해봐도 삼백 척 높이에서 우렛소리를 낼 정도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숙종도 모를 리 없었겠죠. 다만,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며 옥류천의 자그마한 폭포만으로 저런 큰 폭포를 상상하는데 이른 그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느낄 뿐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생각하는 풍류인 것이죠.
이 옥류천을 가장 가까이서 즐기는 정자는 소요정입니다. 구속 없이 천천히 노닌다는 의미를 가진 소요정의 이름처럼 인조, 숙종뿐만 아니라 정조와 순조도 이곳에서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즐겼습니다. 연회를 하면 술이 빠질 수 없죠. 이곳에서 마시는 술은 각별했습니다. 물에 술잔을 띄운 후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를 한 수 읊으며 술을 즐기는 유상곡수(流觴曲水)를 옥류천 위에 앉은 소요정에서 즐겼기 때문이죠. 다만, 매번 이런 연회를 즐기지는 않았고, 조용히 소요하며 옥류천을 바라보고 마음을 닦는데도 이곳 소요정을 자주 이용했다고 합니다.
소요정 뒤편에는 태극정과 청의정이 나란히 있습니다. 태극정에는 원래 들문이 달려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사면이 모두 개방되어 있습니다. 태극정은 3단의 장대석 위에 세워져 있는데 태극(太極)이라는 의미가 ≪주역≫에서 태초의 혼돈(混沌)한 원기(元氣), 즉 세상의 시작과도 비슷한 말인 것을 생각해보면 그 격이 좀 높게 느껴집니다. 청의정은 후원에서 초가지붕으로 된 정자입니다. 연못 가운데에 지어져 있으며 그 연못은 현재 논으로 사용하여 농사를 짓고 벼 베기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여기서는 물고기를 키워 낚시하던 곳이라 논으로 사용한 적은 없으며 현재에 와서 볏짚으로 된 청의정의 지붕에 착안하여 친경례를 흉내 내어 행사를 진행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럼 지금 이 청의정 주변의 벼는 누가 기르고 수확하는 것일까요? 자원봉사자 분들과 직원 분들이 하신다고 합니다. 이 깊숙한 곳까지 와서 농사를 지으시는 그 분들의 노고가 참으로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태극정과 소요정을 보고 나면 이제 다시 돌아 나올 차례입니다. 돌아 나오는 길에는 농산정(籠山亭)이 있습니다. 농산정에는 마루, 부엌, 온돌방이 딸려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이곳은 옥류천에서 연회를 벌일 때 음식이나 다과를 준비하는 곳으로 사용했으며 궂은 날이면 이곳에 들어와 연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정조는 정조 19년(1795)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위해 화성 행궁으로 떠나기 전 후원 일대에서 가마꾼들에게 혜경궁의 가마를 메는 연습을 시키고 수고한 관원들에게 농산정에서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농산정에서 어머니를 위해 직접 가마꾼들을 연습 시키는 정조의 효심과 연습임에도 음식까지 베푼 정조의 넓은 마음씨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죠.
농산정까지 보고 나면 창덕궁 후원 관람은 끝입니다. 연경당의 담 옆을 지나 서편의 언덕을 하나 넘어서서 길을 따라 쭉 나오면 궐내각사와 창덕궁의 담장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 궐내각사 사이로 커다란 향나무가 후원 관람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향나무는 수령이 약 750년 정도로 추정됩니다. 2011년 처음 후원을 방문했을 당시 2010년의 태풍으로 인해 피해를 받아 죽어가고 있었지만, 동쪽 가지만은 기어코 살아남아 그 형세를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창덕궁의 모든 역사를 기억하고 가지고 있는 것은 이제 이 향나무뿐입니다. 저의 길고 긴 창덕궁 여행은 늘 창덕궁의 모든 세월을 함께한 향나무 앞에서 끝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