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정문(明政門), 명정전(明政殿), 문정전(文政殿)
홍화문 다음은 정전으로 가는 문인 명정문입니다. 원래 궁궐이라면 세 개의 문을 갖추어야 하지만, 전에 말했던 창경궁의 용도를 생각했을 때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창경궁은 홍화문과 명정문, 이렇게 두 개의 문만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복궁과 창덕궁을 비교해보면 무척 그 사이의 공간이 작고 거리도 짧다는 생각이 듭니다. 격이 떨어지는 것이지만, 격이 떨어져 조금 공간이 친근하게 다가오는 감은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빛바랜 단청은 광해군 때부터 서있었던 명정문이 가진 세월의 격을 느끼게 합니다. 사실 단청은 1975년에 다시 칠한 거지만, 나무 부재들에서 느껴지는 고풍스러움이 빛바랜 단청을 통해 더 잘 드러납니다. 지금은 새로 단청을 칠한다고 하니 새로운 명정문의 모습에 기대가 되면서도 예전의 모습이 사라진다는 것은 좀 아쉽습니다.
명정문을 넘어서 명정전(明政殿, 정사를 밝히다)으로 들어갑니다. 다른 정전들과 달리 단층 건물이고, 명정전 또한 단청이 빛바래서 권위나 화려함은 떨어집니다. 하지만, 늘 명정전을 볼 때마다 친근한 마음이 들어 좋습니다. 다른 궁궐의 정전은 뭔가 저와 맞지 않는 전각을 보러 오는 기분이라면 명정전은 함께 앉아 있으며 서로 기대는 친구와 함께 있는 기분이랄까요? 경복궁과 창덕궁에 비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도 않아 늘 사람이 적어서 한적한 분위기가 늘 흐르는 것도 이런 느낌에 한몫하는 듯합니다. 약간은 경사가 진 명정전 주위의 회랑에 잠시 앉아 명정전과 명정전 앞 조정을 둘러보는 것만큼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도 없습니다. 보통의 조정은 권위가 느껴져서 부담스러운 느낌이 있는데 명정전에서는 그런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아 딱히 원하지 않아도 오래 머물게 됩니다. 답사지 보다는 확실히 여행지 같은 느낌을 가장 많이 주는 곳이죠.
이처럼 편안함을 주고, 격이 떨어지는 곳이니 만큼 여기서 즉위한 이는 많지 않습니다. 즉위한 사람은 딱 한 사람으로 인종입니다. 중종 39년(1544)에 중종이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에서 붕어하고, 효심이 지극했던 인종은 즉위식을 창경궁에서 거행하죠. 실록에도 창경궁에서 즉위를 하고 명정전 처마에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음을 적어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창경궁에서 유일한 즉위식을 가졌던 인종은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붕어했고, 이후 창경궁에서 즉위식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창경궁에서의 즉위식은 한 번 이었지만, 창경궁이 지어지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은 성종이나 연산군, 중종 때에는 명정전에서 문무잭관의 하례를 받고 성대한 잔치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얼마 되지 않고, 왕실의 잔치를 자주 열었습니다. 성종 19년(1488) 정월 초하루에는 인수대비와 안순대비에게 와과 왕세자, 내외 명부들이 절을 올리고 잔치를 여는 회례연을 열었으며, 중종 38년(1543)에는 명정전 뜰에서 양로연을 행했습니다. 대비들의 궁으로 창경궁이 아예 자리 잡은 조선 후기에는 대비를 위한 잔치와 하례가 이어졌죠. 영조 16년(1740)에는 아예 왕의 존호는 인정전에서 받고, 대비 존호를 명정전에서 받도록 구분해서 두 정전의 쓰임새를 명확히 했습니다. 잔치가 열리는 창경궁이라……. 평생을 조용한 창경궁만을 봐온 저로서는 상상하기는 쉽지 않으나 편안한 분위기를 이곳에서의 잔치라면 무척 흥겨웠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제 조정을 걸어 명정전의 내부를 볼 차례입니다.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의 내부는 좀 더 화려하고 볼 것이 많지만, 그만큼 보는 사람들도 많아 보는 자리를 차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창경궁 명정전은 그 내부를 편안하게 오랫동안 볼 수 있죠. 단층 건물로 공간이 넓지는 않지만, 어좌 위의 닫집이나 천장 위의 봉황 조각은 이곳이 왕이 사용하는 공간임을 확실하게 인식시킵니다. 창경궁의 내부는 오래된 나무냄새가 확 느껴지는데 이 덕에 광해군 8년(1616)에 지어진,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궁궐의 정전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명정전을 보고 나면 그 옆으로 돌아 문정전(文政殿, 문교로써 정치를 편다)으로 향합니다. 문정전은 편전으로 국왕이 일상 업무를 보고 상참을 받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곳이 업무를 보는 궁으로 거의 쓰이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문정전이 편전으로 쓰일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둥근 기둥이 아니라 사각 기둥으로 세워졌다는 것도 이곳이 일상적으로 중요한 전각은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죠. 그래서 문정전은 국상을 당했을 때 왕들의 신주를 모시는 혼전(魂殿)으로 오히려 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중종·인조·효종·숙종·경종 등의 혼전이 이 문정전을 사용했죠. 하지만, 정조의 혼전이 창덕궁 선정전에 모셔진 후부터 순조·헌종·철종의 혼전은 창덕궁에 모셔졌습니다.
문정전은 왕비의 혼전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영조 33년(1757) 영조 비 정성왕후의 사망 이후 혼전은 동궁 안의 강서원(講書院, 세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으로 삼았고, 혼전 휘호는 휘령전(徽寧殿)으로 했습니다. 정성왕후가 승하하고 2개월도 지나지 않아서 대왕대비 인원왕후(숙종 계비)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인원왕후의 혼전은 문정전으로 삼고, 전호는 효소전(孝昭殿)으로 했습니다. 왕비의 남편인 왕이 살아 있는 경우 왕이 죽을 때까지 왕비는 삼년상이 지나도 종묘에 신주가 봉안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원왕후의 신주가 종묘로 옮겨가고 나서는 정성왕후의 신주를 문정전으로 옮겨왔고, 자연히 효소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던 문정전은 휘령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바뀐 휘령전으로 바뀐 문정전은 조선 왕실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한 사건을 지켜보게 됩니다.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것은 정전 앞의 조정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그와는 달랐습니다. 문정전 앞의 마당은 그리 넓지 않습니다. 지금은 터만 남은 행각까지 복원하면 더 좁았겠죠. 문정전 서편에는 화계까지 있습니다. 엄숙함이 감도는 조정과는 다른 편안한 마당입니다. 그리고 이 마당에서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었습니다. 사도세자가 갇혀 죽은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영조의 엄격한 기준에 맞추지 못했다는 것이 첫 째 일겁니다. 총명했으나 영조가 원하는 방향대로만 나아가주지는 않았던 사도세자는 영조의 꾸지람을 밥 먹듯이 들었습니다. 결국에는 영조만 봐도 두려움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고, 아예 미쳐버렸습니다. 미쳐버린 채로 사도세자는 많은 궁인들을 죽였고, 자신의 후궁과 후궁 사이에서 낳은 아들까지 죽여 버렸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영조의 귀에 까지 들어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사도세자가 본격적으로 미치기 시작한 것은 생모는 아니나 자신에게 정을 쏟아주던 정성왕후와 자신에게 꾸준한 관심을 주었던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죽기 이후였습니다. 사도세자의 광증이 영조의 강력한 압박이 원인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이유죠.
사도세자가 죽고 영조는 시호를 사도(思悼)로 내렸습니다. ‘思’는 반성하고 생각한다는 의미이고, ‘悼’는 죽음을 슬퍼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미쳐버린 왕세자를 선택할 수 없었던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의 결단이 아닌 아버지로서의 회한이 보이는 부분입니다. 사도세자가 죽은 곳이 이곳 문정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늦은 밤 창경궁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영조의 왕으로서의 결단, 아버지로서의 회한,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사도세자와 그 모든 것들을 보면서 감내해야 했던 정조의 마음이 뒤엉킨 이곳에 가만히 서서 문정전을 계속 바라보았습니다. 조명이 밝혀진 저녁의 문정전은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쓸쓸함이 느껴졌습니다.
문정전 뒤에는 숭문당(崇文堂)이 있습니다. 숭문당은 왕의 서재이면서 경연을 하던 곳으로 문정전과 더불어 편전의 역할을 나누어 하던 곳입니다.(숭문당 뒤의 함인정도 편전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명정전, 문정전, 숭문당은 익랑(翼廊)과 천랑(穿廊)으로 이어져 비가 와도 편안히 정전과 편전을 오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법도에 어긋나 격은 떨어지나 편함을 추구한 부분이죠. 이 점에서도 창경궁이 경복궁과 창덕궁과는 확실히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숭문당까지 훑고 나면 이제 천랑을 벗어나 밖의 넓은 모래마당으로 나갈 차례입니다. 화계와 높은 담 그리고 그 너머 낙선재에서는 보이지 않는 취운정의 지붕이 보입니다. 무수히 많은 전각들이 가득했을 공간에 한 발짝 발을 들여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