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쉬어가는 창경궁 내전의 입구

함인정(涵仁亭), 환경전(歡慶殿)

by baekja

천랑을 빠져나와 빈 모래밭 위에 섭니다. 궁궐에서 이러한 큰 모래밭은 거의 볼 수 없기에 자연히 전각이 허물어져 사라졌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있던 전각들이 사라지고 세워진 것은 3층으로 된 동·식물 표본박물관과 공작, 코끼리, 원숭이 등 동물들의 우리였습니다. 말 그대로 동물원이 된 것이었죠. 궁궐 전각들 사이의 동물원. 지금은 생각하기 쉽지 않으나 몇 십 년 전만 해도 창경원은 여전히 있었습니다. 창경원의 동물 우리들이 옮겨진 것은 과천 대공원이 생긴 이후죠. 한 나라의 왕이 살았던 공간을 부수고 동물원으로 만들다니. 어처구니없지만, 일제는 그 모든 걸 해냈고, 그 잔재를 지우는 시간은 꽤나 오래 걸렸습니다.


그 어지러운 속에서도 몇몇 전각들은 꿋꿋이 살아남았습니다. 숭문당과 창덕궁 내전 사이 섬처럼 서있는 한 정자가 가장 먼저 볼 전각입니다. 어짐(仁)에 흠뻑 젖는다는 뜻을 가진 이 정자가 지어진 것은 인조 11년(1633)이었습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인양전(仁陽殿)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왕이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어준 기사가 16세기, 실록에 보이고 있죠. 광해군 때 창경궁이 재건될 때도 지어졌으나 이괄의 난으로 불탄 후 인양전 대신 그 자리 근처에 함인정을 세웠습니다. 굳이 인양전을 복원하지 않고 함인정을 세운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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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만들어진 함인정은 왕이 강론을 듣고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연회를 베푸는 곳이 되었습니다. 대체로 편전의 역할을 했으나 조금 더 쓰임새가 다양했죠. 영조는 인원왕후 승하 후 통명전에 빈전을 차리고 왕이 머물며 곡하는 거려(居廬)를 통명전 옆에 마련하면서 함인정에서 자주 신하들을 보았습니다. 내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아 이곳을 편전처럼 사용했던 것이죠.


뒤에 내전이 있는 만큼 원래 함인정 좌우로는 담장이 쳐져 있었습니다. 그 담장은 길게 이어져 지금은 창덕궁의 권역에 속하는 취운정까지 포함하기도 했습니다. 예전엔 창경궁 안에 취운정이 포함되었다는 것이죠. 함인정 또한 지금처럼 사방이 뚫려있는 모습이 아니었고, 분합문을 달아 내전 쪽으로만 문을 닫아두고 3면을 개방하는 방식으로 운용했습니다. 함인정의 가운데 마루만 위로 올라와 있는데 이곳이 왕이 머물며 신하들을 접견했던 곳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20220629_135046.jpg 함인정 뒤로 보이는 내전의 건물인 환경전


함인정의 마루는 왕이 앉은 자리를 제외하고는 올라가 걸터앉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휴일 낮이면 많은 어르신들이 이곳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죠. 저도 어느 더운 여름날 창경궁을 산책하다 지쳐 함인정의 기둥에 기대어 앉은 적이 있습니다. 그날따라 무척 피곤했는지 저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이내 고개를 숙이고 솔솔 잠이 들었습니다. 한 십 분쯤 잤을까요. 갑자기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놀라 두리번거리는데 옆에서 어르신 한 분이 웃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계시더군요. 살짝 부끄러워 씨익 웃으며 자리를 떴습니다. 고궁 안에서 자본 건 그 때가 유일한데 무척 평화롭고 아늑한 분위기가 기억으로 남아 함인정을 보면 그때를 추억하며 잠시 마루에 앉아보곤 합니다.


함인정의 위치에서 이것저것을 보는 것도 좋지만, 함인정 내에 걸린 시구 현판을 보는 것도 무척 좋습니다. 그리 어렵지 않은 한자로 적힌 이 시는 늘 함인정에서 제게 사시사철의 감회를 불러일으킵니다.


春水滿四澤 봄물은 네 연못에 가득하고

夏雲多奇峰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에 모인다

秋月揚明輝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떨치고

冬嶺秀孤松 겨울 고갯마루엔 외로운 소나무가 빼어나구나


이 시는 도연명의 시로 널리 알려졌으나 최근에 고개지의 시로 고증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도연명의 시로 알고 썼다고 합니다. 어떤 왕이 무슨 연유로 이 시를 적은 현판을 걸어 놓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만히 앉아 사계를 상상하며 풍류를 즐길만한 무언가를 잘 적어 놓았다고는 생각합니다.


함인정에서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잔디밭 위에 웬 5층 석탑이 하나 있습니다. 처음 이 석탑을 볼 때 ‘와 석탑이다!’라고 생각했고, 이후에는 ‘왜 궁궐 안에 불교의 석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는데 창경원으로 만들어질 때 일제가 석탑과 승탑을 많이 들고 와 창경궁 이곳저곳에 배치했다고 하더군요. 많은 수는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갔지만, 함인정 동쪽의 5층 석탑은 그냥 이 자리에 남았다고 합니다. 내력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 고려시대 석탑이 외로이 서있는 모습을 보면 이런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었던 과거가 아프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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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이 대비들과 후궁들을 위한 공간인 만큼 내전의 대부분은 여성들을 위한 곳이지만, 함인정 바로 북쪽의 환경전(歡慶殿, 기쁘고 경사스럽다)만큼은 남성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중종은 오랫동안 중풍과 합병증으로 고생하면서 더 편안함을 느끼는 이곳으로 와서 종종 치료를 받고는 했습니다. 이 때 중종의 치료를 맡은 것이 바로 대장금입니다. 중종은 중종 19년(1524)부터 중중 39년(1544)까지 대장금의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런 중종이 붕어한 곳이 바로 이곳 환경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인종이 즉위식을 명정전에서 가진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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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전을 자주 사용했던 것은 중종만이 아닙니다. 소현세자가 이곳을 사용한 대표적 사람입니다. 인조가 병자호란에 패배한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전부 청에 볼모로 잡혀 갔는데 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소현세자는 청의 발달한 문물을 받아들이고 과학기술을 배우는데 힘쓰며 청의 인사들과 친하게 지낸데 반해 봉림대군은 청에 대해 적개심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인조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야사에서는 소현세자가 인조의 앞에 와서 청나라에서 받아온 책과 기계를 보여주자 소현세자의 얼굴에 인조가 벼루를 내려쳤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가 나돌 정도로 인조가 소현세자 맘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겠죠. 이후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몇 달 되지 않은 인조 23년(1645) 4월 26일 사망합니다.


“세자가 심양에 있은 지 이미 오래되어서는 모든 행동을 일체 청나라 사람이 하는 대로만 따라서 하고 전렵(田獵)하는 군마(軍馬) 사이에 출입하다 보니, 가깝게 지내는 자는 모두가 무부(武夫)와 노비들이었다. 학문을 강론하는 일은 전혀 폐지하고 오직 화리(貨利)만을 일삼았으며, 또 토목 공사와 구마(狗馬)나 애완(愛玩)하는 것을 일삼았기 때문에(…)”


세자가 죽고 나서 사관이 쓴 졸기(卒記)입니다. 청나라를 아주 고깝게 보았으니 그와 가깝게 지냈던 세자에 대한 좋은 글을 썼을 리가 없죠. 실록 또한 주관성이 들어간 기록임을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위의 말을 다르게 보면 사냥과 가축을 기르고, 재화의 이득을 셈하는 일과, 토목 공사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공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실용적인 학문을 배우는 것을 일컬어 학문을 강론하는 일을 전혀 폐지했다고 했으니 당대의 백성들이 무척 힘들었음은 알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다음 왕위에 오른 봉림대군은 청을 싫어했으나 현실은 명확히 알고 있는 임금이었습니다. 청의 북벌론을 주장하면서도 적절히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이 더 이어나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이제 더 깊숙이 궁궐의 내전 쪽으로 들어갈 차례입니다. 창경궁이 대비들과 후궁들을 위한 궁임을 생각하면 명정전보다도 중요한 권역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행각들이 다 사라져 내전으로 들어가는 기분은 들지 않지만, 예전 구중궁궐을 상상하면서 내밀한 전각들을 하나씩 뜯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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