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의 다른 한 때, 창경원

춘당지(春塘池), 대온실

by baekja

이제 정일재가 있던 너럭바위 뒤로 올라갑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고즈넉한 산책길이 이어집니다. 이제부터 궁궐의 전각들은 사라지고, 식물들과 흙길만이 있는 마치 공원 같은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그 산책길의 시작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예측하던 풍기대, 해로 시간을 재던 앙부일구, 그리고 추상조각의 느낌이 나는 괴석이 나란히 있습니다. 전부 원래부터 여기 있던 것은 아니고 창경원으로 조성된 후 이곳에 옮겨졌습니다. 수정전 앞의 경복궁 풍기대와 여기 있는 창경궁 풍기대는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가치는 풍기대와 앙부일구가 높지만, 만많은 이들의 시선은 괴석에 멈춥니다. 오돌토돌하게 무언가 난 듯한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기도 하고, 호기심에 돌을 만져보기도 합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올 때마다 보여주는 각기 다른 반응이 참 재미납니다.


20220629_135840.jpg
20220629_135825.jpg
20220629_135838.jpg


이제 조용히 산책길을 걷습니다. 나무들이 내뿜는 청명하면서도 신선한 냄새가 마음을 안정시킵니다. 천천히 오솔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 중간에 한 석조물이 나타납니다. 성종대왕 태실과 태실비입니다. 처음 방문했을 때는 으레 있는 것이겠거니 하고 지나갔지만, 태실이 궁궐 안에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 또한 일제강점기에 옮겨온 것이지요. 왕손의 태(胎)를 태항아리에 담아 지세 좋은 곳에 조성하는 태실은 원래 곳곳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도굴로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 조선 왕실의 업무를 전담하는 이왕직에서 태실에서 태항아리만 빼어내 서삼릉(西三陵)으로 모아오고 석물들은 그냥 놔두었습니다. 태실들 중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던 성종 태실만 연구 목적으로 창경궁에 배치한 것이죠. 태실이 이곳에 있다는 것 또한, 창경궁이 궁궐역할을 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20220629_135955.jpg


산책로를 조금 지나 빠져나오면 이제 거대한 연못이 드러납니다. 누구나 감탄을 자아낼만한 아름다운 연못이죠. 이름은 춘당지입니다. 창덕궁 후원의 영화당을 이야기하면서 춘당지가 원래 춘당대였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춘당대와 같은 넓은 들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옆에 작은 연못과, 내농포(內農圃)라는 11개의 논이 있었습니다. 궁궐에 있는 이 논은 왕이 직접 농사를 지어 모범을 보이고 농업을 장려하는 친경례를 행하는 곳이었으며, 가끔은 밭으로 쓰며 채소를 기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작은 연못과 논을 합쳐 만든 것이 춘당지입니다. 일본의 뜻대로 만들다보니 전통적인 방형(方形) 연못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일본의 정원을 몇 번 보신 분들이라면 창덕궁 후원의 연못과 일본 정원의 연못을 비교해보면 춘당지가 전통적인 조선의 연못과 거리가 있음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1907년 이렇게 만들어진 춘당지는 오랜 시간 유지되었습니다. 주변에 벚꽃을 잔뜩 심어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 사이에서 보트놀이를 즐길 수 있게 했고, 겨울이면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있게 했습니다. 1962년에는 춘당지 위를 가로지르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었으며, 1966년에는 재일동포 사업가가 춘당지 가장자리에 수정궁(水亭宮)이라는 레스토랑을 지었습니다. 1980년대에 창경궁을 복원하며 일제가 심은 벚나무는 여의도의 윤중로(現 여의도 벚꽃축제가 열리는 곳)로 옮겨 심었으나 춘당지는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창덕궁 후원에서 내려오는 빗물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이 춘당지 없이는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안타까운 역사를 갖고 있는 춘당지이나 여전히 창경궁을 찾는 많은 이들의 눈을 매혹하고 있습니다. 아마 춘당지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많은 이들이 아름다운 연못은 어디 갔냐고 당황하시겠죠. 저 또한, 청사초롱을 밝힌 야경에 감탄하고, 낙엽이 연못 주위를 덮는 가을에는 한복을 입고 이런저런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창경궁하면 춘당지가 가장 먼저 떠오를 때도 있었습니다. 여름의 흐린 하늘 아래에서도 춘당지는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그 역사를 생각하며 춘당지를 방문하니 마냥 아름다움을 즐기지는 못하고 수면만 멍하니 쳐다보게 되었습니다. 그 수면에서는 소금쟁이들이 방방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물에 조그만 파문을 일으키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소금쟁이를 보니 복잡한 고뇌들이 사라지는 기분마저 들더군요. 어지러운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고 춘당지를 돌아 창경궁의 끝으로 향했습니다.


20220629_140530.jpg
20220629_140432.jpg


춘당지를 돌다보면 북서쪽에서 이상한 석탑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무척 특이하게 생긴 이 석탑은 1470년 명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이왕가박물관을 건립할 때 1911년 만주 상인으로부터 구매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는 이 탑을 보며 층도 많고 높이도 커서 ‘와, 멋있다!’라고 생각했는데 한국 궁궐과 일본식 연못, 중국 탑이 같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지금은 무언가 어색합니다. 서로 다른 문화가 조화를 이룬 것이 아닌 억지로 섞어 놓은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중국, 한국 등을 통합하여 하나의 공영권(共榮圈)을 억지로 만들려던 일제의 욕망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20220629_140620.jpg


춘당지를 지나면 남녀노소 누구나 감탄하는 창경궁의 하이라이트인 대온실이 나옵니다. 서양식 디자인과 시각적 효과에 익숙해진 우리는 바로크식으로 만들어진 정원과 서양식 유리 건물인 대온실을 보고 누구나 감탄을 터뜨리죠. 이 대온실을 차분히 살펴보기 전에 대온실의 동쪽 언덕에 있는 자그마한 정자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름은 관덕정(觀德亭)으로 별거 없어 보이지만, 내력이 생각보다 깊습니다. 인조 20년(1642)에 만들어진 이 정자는 단풍정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불렸던 것으로 보이며 앞의 춘당대에서 치러지는 무과 시험이나 활쏘기를 정조·고종 등이 지켜보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만, 인조 때 지었던 것이 그대로 이어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헌종 때 이후로도 몇 차례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나 자세한 이력은 잘 알 수 없습니다.


20220629_140749.jpg
20220629_140850.jpg


관덕정을 보고 오니 비가 오더군요. 빗소리가 먼저 다가오더니 비의 장막이 대온실을 거쳐 대온실 동쪽에 있는 저에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재빨리 비를 피하려 대온실로 들어갔습니다. 목조 뼈대에 유리를 얹어 만든 대온실은 일본인 후쿠바 하야토가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을 담당하여 1909년 9월에 준공하였습니다. 이때 당시의 이름은 식물원이었고, 차차 식물원본관으로 불리다가 1959년부터 대온실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1950년 6·25전쟁 때 폐쇄되면서 관리부실과 폭격으로 크게 훼손된 것을 1955년에 보수하였고, 그 후로 1961년, 1976년에도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KakaoTalk_20230612_090643428_01.jpg


창경궁이 창경원이었음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건물인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라는 점과 그 건축미의 가치가 인정되어 창경궁이 복원되고 나서도 계속 남아 있습니다. 다만, 온실 내에서 키우는 식물들이 달라졌는데 원래 한반도에서 보기 어려운 열대 식물이나 희귀식물을 길렀으나 현재는 우리 땅의 야생 식물을 기르고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모수(母樹)에서 채취한 후계목부터 우리나라의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온실을 메우고 있으니 천천히 살펴볼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겨울의 동백이 참 예뻐서 겨울에 가서 동백꽃을 한 번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20220130_121253.jpg
20220130_121234.jpg
20220130_121223.jpg


이제 창경궁 관람은 거의 끝입니다. 제가 아는 창경궁은 말 그대로 창경궁입니다. 단 한 번도 창경궁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을 쓰면서 문득 어머니께 궁금해져 물어봤습니다. 창경궁이 아닌 창경원에 가보신 적 있었냐고. 서울에 사셨던 어머니께서는 당연히 가봤다고 말하셨습니다. 당시 모든 서울 국민학교 학생들의 소풍은 그곳이었다고 말하시더군요. 저는 그 역사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들어 알 뿐이죠. 하지만, 어머니께는 생생한 일상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궁궐이 동·식물원이었던 그 역사는 아픈 역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즐거운 추억이었습니다. 장소가 가진 역사의 역설이라고나 할까요. 여의도 윤중로의 벚꽃길을 걷거나 과천의 서울대공원을 방문하면 창경궁이 떠오르고는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섞여 있던 17만 평의 거대한 유원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궁궐 창경궁도, 유원지 창경원도 모르는 저는 그저 추측해볼 뿐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