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慶熙宮)
대온실에서 나오니 이미 비는 그쳐 있었습니다. 춘당지 옆을 거쳐 흰색 수피(樹皮)가 인상적인 백송을 보고 홍화문을 나오니 서울대학교 암병원 건물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하얀색 예쁜 건축 뼈대에 유리를 입힌 대온실 건물과는 달리 유리가 가득한 전면이 보이는 암병원 건물은 제가 여행하는 지금 이 공간과 이 시간이 궁궐의 이야기가 가득한 과거와 상상이 아닌 현재이고 현실임을 깨닫게 합니다.
서울대학교 암병원 건물과 홍화문 사이 차선 가운데에 있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합니다. 비 오는 평일 낮 2시 30분 경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잠시 기다리니 곧 160번 버스가 옵니다. 버스는 종로를 가로지르고, 광화문 교보건물과 광화문 광장을 지나 천천히 서쪽으로 향합니다. 자주 보는 광경이지만, 궁궐에서 궁궐로 이동한다고 생각해서 인지 조금 낯선 기분이 듭니다. 멍하니 그저 빗방울이 맺힌 차창 밖만 바라봅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내립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입구 바로 옆에 한 커다란 문이 서있습니다. 흥화문(興化門)입니다.
광해군 10년(1618)에 지어진 흥화문은 ‘교화를 북돋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느 궁궐의 정문처럼 가운데에 화(化)자가 들어갔지만, 조금 권위가 떨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처음부터 경희궁이 법궁이 아닌 이궁이자 별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흥화문이 중층이 아닌 단층으로 지어졌기에 드는 느낌이라고 하기에는 무척 허전한 느낌까지 같이 듭니다. 이는 경희궁의 복원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드는 느낌입니다. 흥화문 뒤로 당연히 있어야 할 어도는 없고 공원만 주욱 펼쳐져 있는 것이 경희궁의 복원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경희궁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려면 그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경희궁이 세워진 이곳은 원래 인조의 생부 정원군의 개인 주택이 있었으나 이곳에 왕기(王氣)가 서린다는 말을 듣고 광해군이 그 기운을 누르려 광해군 8년(1616)에 경덕궁(慶德宮)을 지었습니다.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대에 지은 궁궐들이 여럿 헐렸지만, 이곳은 인조의 부친이 살았던 곳이라 헐지 않았습니다. 이후로도 여러 임금들이 이곳에 머물며 정사를 보았고, 경희궁은 계속 쓰였습니다. 그리고 영조 36년(1760)에 경희궁으로 궁호를 바꾸었습니다. 정원군의 시호에 들어가는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는 이유였습니다. 순조 29년(1829)에 10월 화재로 건물이 대부분 소실됐으나 순조 31년(1831)에 다시 중건하였습니다. 이후 고종 2년(1865) 경복궁 복원을 위한 자재 확보로 경희궁의 건물들이 대부분 헐려 숭정전(崇政殿), 회상전(會祥殿), 흥정당(興政堂), 흥화문, 황학정(黃鶴亭),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만이 남았습니다. 이후 1910년 경성부에서 발행한 《경성부사》에서 정심합과 사현합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사이에 소실된 것으로 봅니다.
경복궁 중건에 쓰이고 남은 전각들은 일제에 의해 각기 다른 곳으로 불하 받아 나갔습니다. 숭정전은 1926년 남산 기슭의 일본인 사찰 조계사(曹谿寺) 본당으로 옮겼다가 현재는 동국대학교 안에서 정각원(正覺院)이라는 법당으로 쓰고 있습니다. 서울시에서 이 건물을 제자리로 옮기려 하였으나 건물이 너무 낡아 실패하고, 원래 자리에 새 건물을 복원했습니다. 회상전은 1928년에 마찬가지로 조계사로 옮겨 주지 집무실로 쓰이다가 1936년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흥정당은 1928년 광운사(光雲寺)로 옮겼다가 1950년대 이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황학정은 1923년 사직단 뒤 활터로 옮겼습니다. 마지막으로 흥화문은 1932년 박문사(博文寺,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한 사찰) 정문으로 옮겨졌다가 박문사 자리에 영빈관이 들어서고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다 1988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습니다. 이마저도 원래 흥화문이 있던 자리에는 도로와 구세군회관 건물이 들어서 있어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건물들이 사라진 터는 자연히 다른 것들이 들어섰습니다. 1915년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를 세우고, 전각들을 중학교의 부속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광복 후에는 서울중고등학교가 자리 잡았으며, 1980년 서울중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하자 서울시와 현대건설이 그 부지를 매입해 사용했습니다. 경희궁이 무척 넓었기에 현재 경희궁 자리에는 서울역사박물관, 서울특별시교육청, 아파트와 각종 빌딩이 지어져 있어 경희궁의 완전한 복원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처럼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까지 계속 훼손을 당한 경희궁은 사실 궁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합니다. 현재 경희궁지에 남아 있는 원형(原形)의 건물은 흥화문뿐이죠. 그래서 자연히 경희궁을 보면 궁궐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들보다 상실과 허무의 기분이 먼저 듭니다. 그나마 복원도 제대로 되지 않아 숭정전, 자정전(資政殿), 태녕전(泰寧殿)과 같은 건물들에 정도 들지 않죠. 그래서 경희궁은 제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며 닿는다 하더라도 답사가 아닌 산책에 그칠 뿐입니다.
예전엔 궁궐의 권역이었을 공원을 지나면 복원한 숭정문이 눈에 띕니다. 높은 기단 위에 올라선 숭정문은 경희궁이 다른 궁궐들과 달리 조금 험한 뒷산을 끼고 만들어졌음을 알게 합니다. 예상보다 많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정전인 숭정전이 보입니다. 경사가 꽤 급하면서도 좁은 조정이 눈앞에 드러납니다. 사람이 없는 복원된 빈 궁을 잠시 바라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편전인 자정전이 있습니다. 숭정전과 자정전 모두 제 마음을 붙잡지 못하고, 어진을 보관하던 태전마저 지나 조그만 공간의 끝에 이르러서야 제 마음을 붙잡는 것이 나옵니다.
태녕전 뒤의 서암(瑞巖)입니다. 이 커다란 바위는 경희궁이 지어지기 이전부터 있던 것으로 경희궁의 세월 전부를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숙종 34(1708)에 직접 글자를 새기라고 명하여 그때부터 서암이라고 불렀습니다. 서암을 새긴 사방석은 사라졌으나 바위에 깎아 놓은 물길은 남아 옛 자취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바위를 볼 때마다 경희궁이 있었음을, 이곳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음을 생각합니다. 넓은 궁궐이 이렇게 퇴색하여 좁아지는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이 바위는 한때 이곳에서 영광의 시간 또는 일상의 시간이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급한 경사를 넘어 서암에 이르면 경희궁 관람은 끝입니다. 이 이상 보고 싶지도 않고, 더 보고 있기에는 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시간이 사라지면서 공간의 의미가 변한다지만, 이곳에 남은 것은 변화가 아닌 상실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잃었고, 복원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이곳은 붙잡을 수 없는 허무한 것들을 전부 대변하는 듯합니다. 쓸쓸함이 가득한 이 공간을 천천히 나오는데 소방관 분들이 잠시 이곳을 관람하러 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이 입고 있는 옷의 주황색이 밝아 잠시지만, 이 공간이 생기를 찾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언젠가 이 공간에서 쓸쓸함과 허전함 너머 상실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게 되기를 바라며 한적한 공원을 걸어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