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 머물던 곳

광명문(光明門), 함녕전(咸寧殿), 덕홍전(德弘殿), 정관헌(靜觀軒)

by baekja

대한문을 지나 덕수궁을 본격적으로 관람하기 전에 한 가지 정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덕수궁의 명칭이죠. 덕수궁이 처음 광해군 3년(1611)에 지어졌을 때 명칭은 경운궁(慶運宮)이었습니다. 이 경운궁이라는 이름은 고종이 중건한 이후에도 계속 쓰이다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한 이후에 순종이 태황제인 고종이 오래 살기를 바라며 ‘덕수(德壽)’라는 궁호를 올려 이름이 덕수궁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실록에 덕수궁이라는 궁호를 올린 것이 친일파 이윤용이고, ‘덕수’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물러난 왕이나 황제에게 자주 올리는 일반적인 궁호라는 것을 보았을 때 경운궁으로 바꾸는 것이 맞다는 의견이 한 때 많이 나왔었습니다. 요즘도 자주 볼 수 있는 의견입니다만 문화재청에서 발의한 공청회에서 굳이 바꾸지 말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덕수라는 궁호를 윤허한 것도 어쨌든 순종이고, 고종이 죽은 후에도 덕수궁이라는 이름을 썼음이 실록에도 나와 있으니까요. 둘 다 일리가 있는 의견이나 덕수궁이 더 널리 알려진 이름이니 이 글에서는 덕수궁이라는 이름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덕수궁 안으로 들어서면 하마비와 함께 금천교가 보입니다. 하마비는 말에서 내리라는 것을 알리는 비석으로 원래는 궁궐 밖에 있어야 하는 비석입니다. 하지만, 서울광장과 태평로가 차지한 덕수궁의 앞에 하마비를 둘 곳은 녹록치 않습니다. 그래서 덕수궁 권역 안으로 들여놓은 것이죠. 덕수궁의 금천교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그것보다 느낌이 강하지는 않습니다. 석조 조각도 나름 잘 만들어졌고, 조형적으로 괜찮은 다리이나 덕수궁의 축소된 영역 때문에 금천교의 영역이 확실히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다른 궁궐의 금천교와 비교해 보았을 때 아쉬운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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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교를 건너면 권역을 나누는 담장은 거의 보기 힘들고 나무들과 뻥 뚫린 공간들 사이에 배치된 전각들만이 먼저 보입니다. 그 중 가장 먼저 볼 것은 광명문입니다. 광명문은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으로 지금은 함녕전의 앞에 배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정문이라기보다는 섬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광명문이 고종 41년(1904) 대화재로 타지 않고 남아 1938년 덕수궁미술관 개관 때 이왕직에서 중화문 서쪽 구석에 배치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광명문은 문으로써 기능하지 않고 보루각 자격루, 흥천사 범종, 신기전기화차를 보관하고 전시하는 건물로 기능했습니다. 이것을 2018년 제자리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죠. 이 광명문은 함녕전에서 숨을 거둔 고종의 국장 행렬이 시작된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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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광명문 아래의 신기전기화차, 가운데 광명문 아래의 보루각 자격루, 오른쪽 현재 광명문


광명문을 지나 함녕전이 있는 권역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은 함녕전, 왼쪽에는 덕홍전이 있습니다. 두 전각 모두 19의 04년의 대화재로 불에 탔다가 바로 다시 지은 건물들입니다. 이때의 화재는 영선사(營繕司)에서 함녕전의 온돌을 수리하던 중 발생했습니다. 원래는 함녕전에서 고종이 자주 머물지 아니했으나 1907년 고종의 황제 양위 이후 함녕전에서 줄곧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계속 머물다 1919년 고종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죠. 고종은 제법 건강한 편이었는데 갑자기 병이 생기고 병이 생긴 지 하루 만에 죽어 독살설이 나돌았습니다. 이완용이 두 나인을 시켜 독약 탄 식혜를 올리고, 그 두 명도 입을 막기 위해 살해했다는 등의 소문이 퍼졌죠. 이는 조선을 충격에 빠지게 했고, 1919년 3·1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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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홍전 자리에는 원래 명성황후의 혼전으로 사용되었던 경효전(景孝殿)이 있었으나 1904년의 화재로 소실 된 후 경효전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1906년 덕홍전을 지어 1911년엔 내부 수리까지 하였습니다. 덕홍전은 외국 사신이나 조정 대신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쓰였으며 함녕전과 복도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나라 잃은 채로 함녕전과 덕홍전을 오가다 죽어간 고종을 생각해보면 모두가 평안하다는 이름의 함녕전이나 덕이 넓고 크다는 덕홍전의 의미가 참으로 허망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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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녕전과 덕홍전 뒤로는 모란과 소나무 가득한 화계가 있고 그 위에 정관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자와는 다른 근대와 서양의 느낌이 물씬 나는 이 건물은 고종 37년(1900)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독립문, 인천해관청사, 러시아 공사관, 경복궁 관문각 등 설계)이 설계한 것입니다. ‘조용히 관조하는 집’이라는 이름에 맞게 이 건물에서 고종은 휴식을 취하고는 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외교관을 만나기도 하고, 화가를 불러 자신을 그리게도 했으며, 음악을 감상하면서 다과와 커피도 즐겼다고 합니다. 이 당시에 커피는 가배(珈琲)라고 하여 실록에도 그렇게 쓰였습니다. 고종이 꽤 커피를 좋아하였는지라 고종 35년(1898)에는 고종을 커피로 독살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 김홍륙(金鴻陸)이 한 냥의 아편을 찾아내어 갑자기 흉역(凶逆)의 심보를 드러내어 친한 사람인 공홍식(孔洪植)에게 주면서 어선(御膳, 임금께 진공하는 음식)에 섞어서 올릴 것을 은밀히 사주하였다.

(…)커피(珈琲) 찻주전자에 넣어 끝내 진어(進御)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홍륙이라는 자가 사주하여 고종과 순종이 먹는 커피에 아편이 다량 들어가게 된 것이죠. 고종은 이를 바로 뱉어내어 건강에 큰 이상이 없었으나 순종은 한 모금 삼켜 오랜 시간 여독으로 고생했다고 합니다.


늘 정관헌에 와서 이 ‘가배(珈琲)’ 생각을 하고 있으면 저도 정관헌의 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몸에 카페인이 잘 맞지 않아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 저이지만, 소나무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장식 가득한 이 근대 건물에서 마시는 커피를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저 코린트식 주두와 난간에 새겨진 각종 꽃과 동물들의 문양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그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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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종의 생활공간을 벗어날 차례입니다. 마지막은 고종이 커피를 마시던 이야기로 끝나 조금은 분위기가 가벼워졌지만, 망국의 운명을 지켜보는 왕의 마음은 마냥 가볍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 공간을 오가는 동안 고종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다는 그 무게감이 감조차 오지 않는 저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고종이 조금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이제 고종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고 전돌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홍예문인 유현문(惟賢門)을 지나 덕수궁의 더 안쪽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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