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대군에서 덕혜옹주까지

석어당(昔御堂), 즉조당(卽阼堂), 준명당(浚眀堂)

by baekja

유현문을 나오면 남쪽에 2층 목조건물이 보입니다. 단청이 되지 않은 건물이나 낙선재나 연경당, 건청궁처럼 편안한 사대부의 기와집 느낌이 아닙니다. 어딘지 모를 기품이 느껴지는 건물이죠. 그도 그럴 것이 이 전각의 역사가 왕들이 편안함이나 연회를 즐기자고 지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름부터 옛날에 임금이 머물렀다는 집이라는 ‘석어당(昔御堂)’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궁궐 내의 많은 전각들은 다 임금이 예부터 머물던 곳인데 왜 이 건물에만 ‘석어당’이라는 이름까지 붙였을까요? 그를 알기 위해서는 이 전각이 석어당이기 이전에 어떤 건물이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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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석어당은 월산대군의 저택이었습니다. 월산대군은 세조의 장손으로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존)의 장남이었습니다. 하지만, 의경세자가 일찍 죽고 세자의 자리는 둘째 아들인 예종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이때 출궁하는 의경세자의 부인인 한씨와 두 손자가 같이 살도록 집을 마련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예종마저 일찍 죽고, 월산대군의 동생인 성종이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둘째인 성종이 왕위를 이어받은 것은 그의 장인이 당시 최고의 권신(權臣) 한명회였기 때문입니다. 왕위를 이어받지 못했다고 불만을 가질 법도 했는데 월산대군은 대인배적인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왕위를 이어받은 동생과 어머니 한씨는 다시 입궁했고, 세조가 내려준 집은 온전히 월산대군의 저택이 되었습니다. 이후로는 쭉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이 집에서 살았죠.


그럼 성종이 살았다고 월산대군 저택이 석어당이 되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이제 백여 년이 지나 임진왜란이 되었습니다. 알다시피 왜군에 의해 한양은 점령당했고, 한양을 놔두고 도주한 선조에 분노한 백성들은 궁궐을 불태웠습니다. 선조 26년(1593)에 한양으로 돌아와 있을 때 그나마 큰 건물들이 남은 곳은 정릉동 주택가였습니다. 왜군들이 이곳에 주둔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선조가 행궁(行宮)으로 삼은 곳은 바로 월산대군 저택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월산대군 저택을 침전으로 삼고 곁에 있는 저택들을 정전, 동궁, 임시 종묘, 궐내각사로 지정하여 임시 궁궐을 갖추었습니다. 이 행궁에서 선조가 새로 지은 건물은 석어당 서편에 편전 용도로 지은 즉조당뿐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의 피해로 인해 불에 탄 창덕궁을 다시 짓기 위해 영건도감(營建都監)을 것도 선조 39년(1606)의 일이었습니다. 선조는 창덕궁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2년 후에 사망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선조는 무능한 임금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국난의 위기를 끝내 극복했다하여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이에 국난의 위기를 버텨낸 선조가 머무른 곳이라 하여 월산대군 저택에 석어당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죠.


행궁으로만 남을 수 있었던 월산대군 저택은 광해군 3년(1611) 광해군이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이며 궁궐로 격이 높아졌습니다. 광해군은 광해군 10년(1618) 창덕궁이 완공되자 그곳으로 완전히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이 해에 인목대비가 이 궁에 유폐됩니다. 인목대비가 유폐된 것은 5년 전인 1613년에 일어난 계축옥사 때문입니다. 선조 말엽 왕위 계승을 두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 간의 암투가 심각했습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1613년에 광해군과 대북파는 소북파를 몰아내면서 영창대군과 더불어 인목대비의 형제 아들, 조카들 또한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 계축옥사가 일어난 지 5년 뒤 광해군은 인목대비의 칭호를 삭탈하고 경운궁에 유폐하면서 경운궁을 서궁(西宮)으로 낮추어 불렀습니다. 이때 유폐된 후 5년간의 일을 담은 것이 ≪계축일기≫입니다. ≪인현왕후전≫,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더불어 3대 궁중문학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광해군이 내쫓긴 뒤 석어당을 비롯한 경운궁은 아관파천(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 이후 고종이 다시 찾아 여러 전각들을 다시 지을 때까지 역사의 뒤편에 서있었습니다.


석어당 서편의 즉조당은 반정을 일으킨 인조가 즉위한 곳이라 즉위라는 뜻을 가진 ‘즉조(卽阼)’가 이름으로 붙었습니다. 이곳에서 즉위한 임금은 인조 말고도 광해군과 순종이 있습니다. 이곳은 이름은 인조가 즉위하여 즉조당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석어당과 더불어 국난을 극복한 선조가 지낸 곳이라는 상징성이 더 컸습니다. 영조는 선조가 임진왜란 때 한양으로 돌아온 지 3주갑(180년)이 되는 영조 49년(1773)에 즉조당에서 국란을 치른 선조를 추모하며 왕세손(정조)와 함께 사배례(四拜禮)를 올렸습니다. 고종은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온 지 5주갑(300년)이 되는 고종 30년(1893)에 즉조당에 찾아와 참배했습니다. 자신이 외세에 시달리는 것을 선조가 임진왜란을 겪은 것에 빗대어 당시의 위기를 타파하고자 하는 의지를 전한 것이죠.


이 참배 이후 조선이 외세의 침략을 잘 이겨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한 나라의 왕비가 살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에 위협을 느껴 왕이 다른 나라의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까지 일어났습니다. 이후 고종은 다시 한 번 굳게 마음을 먹고, 근대화로 나아가는 의지를 불태웁니다. 고종 34년(1897) 많은 나라의 공사관과 각종 근대 건물들로 둘러싸인 경운궁에 커다란 전각들을 세우기 시작하며 이 의지를 널리 알리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즉조당은 유지되어 정전인 중화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태극전(太極殿)이라는 현판을 달고 정전의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하지만, 다 알고 있듯 조선은 망했습니다. 1904년의 화재로 경운궁의 역사를 증언해오던 즉조당과 석어당은 불에 탔습니다. 즉조당과 석어당은 다시 지어졌지만, 이후 조선은 멸망하고 다시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경운궁 또한 덕수궁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지요.


즉조당 서편에 복도로 이어진 준명당은 이토록 깊은 내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1897년 덕수궁을 고종의 황궁으로 바꿀 때 지은 건물입니다.(1904년 화재로 다시 지음.) 고종이 편전으로 사용하며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입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고 이곳은 고종이 늘그막에 얻은 덕혜옹주를 위한 유치원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무척 아꼈습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거나 일본인과 정략결혼을 할까봐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비밀리에 약혼을 계획하였지만, 일본의 방해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이토록 자신을 아껴주던 아버지를 잃은 후 덕혜옹주의 삶은 비극이었습니다. 강제로 끌려간 일본에서의 생활 때문에 정신병이 생겼고, 1962년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습니다. 그리고 창덕궁 낙선재의 수강재에서 1989년 굴곡진 삶을 마감했습니다.


석어당, 즉조당, 준명당의 역사적 사건을 생각해보고 난 뒤 그 겉모습을 스윽 살폈습니다. 가로로 긴 중층의 목조건물인 석어당이나 복도로 연결된 즉조당 준명당 모두 사람의 눈길을 끌만한 겉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덕수궁을 방문하면 석조전이나 정관헌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꼭 한 번씩은 눈길이 갑니다. 특히, 석어당은 단청 없는 목조 건축물의 안에서 새어나오는 조명이 아름다워 밤이면 그 모습이 정말 볼만 합니다. 편안하지는 않지만, 그윽하고 깊은 맛이 있죠. 이런 멋스러운 전각들을 오래보고 있자하니 길고 긴 경운궁에서 덕수궁까지, 월산대군에서 덕혜옹주까지의 이야기가 배어나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야기에 생생함은 없었으나 한 때 한반도를 통치했던 나라 조선의 옛 모습을 건너 듣는 아련함이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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