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와 대비들의 공간, 창경궁 내전

경춘전(景春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영춘헌(迎春軒)

by baekja


환경전 옆에는 경춘전이 있습니다. 왕비, 대비 혹은 그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 여성들이 잠시 머무르는 곳으로 쓰였던 이곳에서 성종의 어머니 덕종 비 인수대비, 숙종 계비 인현왕후, 정조의 생모이자 장조(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헌경왕후)가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 건물은 인수대비를 위해 성종 15년(1484)에 지어졌지만, 이곳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수대비가 아니라 혜경궁 홍씨입니다.


경춘전에는 원래 탄생전(誕生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정조가 건 것으로 자신이 이곳에서 태어남을 기념하기 위해 걸어둔 것입니다. 또한, 이 현판을 걸면서 죽은 아버지(사도세자)를 생각하며 경춘전을 수리했다고 합니다. 대대적인 개수가 아닌 서까래 몇 개만 바꾸고 초석 하나만 바꾸어 비스듬한 것은 지지하고 새는 것만 막았다고 합니다. 이후에는 정조의 아들인 순조가 어릴 때 이 경춘전에 방문하여 혜경궁 홍씨를 보고 경춘전 동쪽 벽에 걸린 용 그림에 대해 물었다고 합니다. 이는 정조가 태어나기 전날 밤 사도세자가 혜경궁이 있는 침실 안으로 용이 들어오는 꿈을 꾸고 그린 것이라고 혜경궁이 순조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아직은 정신이 멀쩡했던 다정한 남편(사도세자)와 늘 어머니를 생각했던 효심 깊은 아들(정조)과 함께했던 ‘햇볕 따뜻한 봄(景春)’과 같은 기억이 혜경궁에겐 이 건물에 남아 있었습니다. 지아비를 잃고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뒤 자신의 동생마저 잃어야 했던 그녀의 기구한 인생에서 아마 이곳은 한줄기 빛과 같은 느낌이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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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전의 북쪽으로는 창경궁 내전에서 가장 큰 건물이자 창경궁의 메인 건물인 통명전이 보입니다. 월대가 있고, 용마루가 없다는 것이 바로 보입니다. 이러한 점들은 이 건물이 창경궁 내에서 높은 격을 가진 건물임을 보여줍니다. 아예 ≪궁궐지≫에서는 통명전을 내정전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내정전이면 왕이나 왕비가 머무는 경우가 많았지만,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로 같은 궁궐 취급을 받아 창덕궁 대조전에 왕이나 왕비가 머물렀고, 통명전에는 왕대비가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다만, 무조건 대비전으로 쓰인 것은 아니고 경종의 거처로 쓰이기도 했으며 대비의 존호를 올리거나 가례(嘉禮, 왕가(王家)에서는 왕의 성혼이나 즉위, 또는 왕세자ㆍ왕세손ㆍ황태자ㆍ황태손의 성혼이나 책봉 따위의 예식)를 하고 잔치를 여는 장소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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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명전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장소로도 유명합니다.


“(…) 무녀가 ‘중전 전하가 만약 없어진다면, 희빈께서 다시 중전이 될 것이다.’ (…) 재작년 9, 10월에 희빈의 말로 인하여 (…) 죽은 새·쥐·붕어 각각 7마리를 아울러 (…) 통명전(通明殿)·대조전(大造殿) 침실 안에다 같이 묻었다.”


숙종 27년(1701) 10월 3일에 실린 이 기사는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해하는 역모를 행했음을 실토하는 궁녀의 말입니다. 사람을 저주하는 흉물스러운 것들을 통명전 근처에다 묻었다는 것이죠. 이 일로 장희빈은 사약을 받아 죽었습니다. 인현왕후를 위시한 서인과 장희빈을 위시한 남인의 권력 싸움,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던 숙종의 환국,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근본이 된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사랑과 질투는 인현왕후의 사망 이후 이 통명전에서 끝맺게 되었습니다. ‘통달하여 밝다.’는 통명전의 의미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지만, 두 여인의 치정극과 더불어 얽힌 정치적 갈등 때문에 길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있습니다.


통명전 주변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이한 기물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통명전의 자그마한 모형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기물인데 눈으로 궁궐의 기물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들이 모형을 만져 통명전의 대략적인 생김새를 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튼튼하게 잘 만들어두기는 했지만, 너무 튼튼해서 장갑을 끼지 않고 만졌다가는 손을 다칠 것 같다는 점이 좀 아쉬웠습니다. 통명전의 월대 옆에는 휠체어 리프트가 있어 휠체어를 타고 월대 위로 올라가 볼 수 있게 해두었습니다. 월대와 그 계단의 높이가 상당하여 오르기 쉽지 않은 편인데 이런 리프트를 통해 조선시대 잔치가 벌어진 현장 위로 누구나 오를 수 있게 한 점은 무척 보기 좋았습니다. 왕실을 위한 궁궐이 아닌 모두를 위한 문화재로 궁궐이 더욱 변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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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통명전 뒤로 발걸음을 돌리면 화계가 있습니다. 꽃이 피면 아름답겠지만, 저는 여기서 화계에 주안점을 두고 보지 않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올려 통명전 위의 처마를 바라봅니다. 중학교 3학년 무렵 한창 낙숫물에 대한 어떠한 로망을 가지고 있을 때였지만, 겨울이라 낙숫물을 볼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처음 창경궁을 방문한 그날 무슨 이유인지 통명전에서 소방훈련을 하고 있더군요.(이후로도 무수히 많은 궁궐방문이 있었지만, 소방훈련을 본 것은 그 때가 유일했습니다.) 통명전 지붕 위로 물이 끼얹어지는 것을 보면서 문득 낙숫물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잔뜩 기대를 앉고 소방 훈련이 끝난 뒤 통명전 뒤로 향했는데 많은 낙숫물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천천히 뚝뚝 떨어지는 제 소망 속의 낙숫물은 아니었지만, 우수수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보면서 무척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행을 갔던 날은 비가 왔지만, 창경궁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비가 거의 그쳐서 낙숫물은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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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명전의 북쪽으로 돌아가면 자그마한 연못이 있습니다. 이 연못에 물을 대주는 샘을 열천(冽泉)이라하고 연못은 보통의 연못들처럼 연지(蓮池)라고 합니다. 성종 때부터 이곳에 샘이 나와 작은 못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곳을 적극적으로 조성한 것은 현종 명성왕후로 통명전 서쪽 장춘각(藏春閣)에 머물면서 이곳을 바라보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연못 석조물들이 참으로 공교하여 보기만 해도 무척 즐거웠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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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명전의 동쪽에는 양화당이 있습니다. 양화당도 조선 전기부터 있던 건물로 명종 때에 이곳에서 신하들과 즐겨 술을 마시고는 했습니다. 친히 신하들을 맞이하고 시를 짓게 시키면서 잘 지은 자들에게는 포상을 내려주고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연회를 즐겼죠. 이후에도 종종 편전 기능을 가진 별당처럼 다용도로 쓰이다가 순조 30년(1830) 환경전 화재로 불에 탄 후 순조 34년(1834) 후궁들의 처소로 그 목적이 아예 변경된 채 다시 지어졌습니다. 드라마로 유명한 철종 비 철인왕후가 고종 15년(1878) 사망했습니다.(<철인왕후>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양화당에 머물렀던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인조입니다. 병자호란 후 삼전도의 굴욕까지 겪고 나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환궁하여 창경궁 양화당에 줄곧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인조가 청나라 사신을 만날 때면 양화당에서 접견했다는 기록이 다수 남아있습니다. 직접 나가 접견하지 않은 핑계는 늘 병이었는데 이것이 진짜로 병에 걸렸기 때문인지 마음의 병으로 인한 것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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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당 동쪽에는 왕의 서재인 정일재(精一齋)가 있던 큰 너럭바위가 있고, 그 동쪽에는 영춘헌과 집복헌(集福軒)이 있습니다. 영춘헌은 양화당의 부속채처럼 쓰이다가 정조에 이르러서는 정조가 편히 머무는 곳으로 변모합니다. 순조 34년(1834) 재건된 이후로는 여기 또한 후궁의 처소로 변모합니다. 집복헌은 영춘헌의 부속채 같은 건물로 신분이 낮은 후궁이 자주 머물렀습니다. ‘복을 모은다,’는 이름처럼 두 명의 세자(사도세자, 순조)가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첫아들을 잃고 마흔둘이 되도록 후사가 없었던 영조는 사도세자를 얻어 기뻤는지 사도세자 출생 3개월 후 집복헌 마당에서 신하들에게 사도세자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아예 순조의 어린 시절을 집복헌에서 보내게 하여 어렸을 때 치르는 행사를 전부 집복헌에서 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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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안 정조는 영춘헌에서 머무르며 업무를 자주보고 신하들을 접견했습니다. 이는 집복헌에 순조와 자신이 아끼는 후궁 수빈 박씨(순조의 생모)가 있었을 뿐 아니라 영춘헌 너럭바위 뒤쪽에 자리한 자경전(慈慶殿)에 어머니인 혜경궁이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경전은 어머니 혜경궁을 위해 정조가 지은 건물입니다.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現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에 위치) 맞은편에 지은 건물이죠. 영춘헌에서 어머니와 아들을 비슷한 곳에 두고 애정을 주고 애정을 받으며 친한 신하들과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했을 정조는 정서적으로 무척 안정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영춘헌의 이름처럼 봄을 맞은 기분이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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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심 깊은 정조의 온갖 정성을 받으며 잠시의 행복을 누렸던 혜경궁은 정조가 죽자마자 동생을 잃어야 했습니다. 자신이 아끼는 신하들이 천주교를 믿고 있어 천주교 박해를 최대한 자제했던 정조와 달리 정조 이후에 순조의 수렴청정을 맡은 정순왕후 김씨(영조의 계비)는 정조의 정치를 말 그대로 역행하여 순조 1년(1801) 신유박해를 일으켰고, 정조의 편에 서있던 시파를 전부 몰아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혜경궁의 동생인 홍낙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에 지아비, 삼촌(정조의 즉위에 반대하다 죽은 홍인한), 아들, 동생까지 잃은 혜경궁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손자에게 비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동생의 신원을 회복해달라는 부탁을 순조에게 하면서 하나의 기록을 남깁니다. 그것이 ≪한중록(閑中錄)≫입니다.


한중록에 동생의 신원 회복만을 담은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1편은 혜경궁의 회갑해(정조 19년, 1795)에 친정 조카에 내린 회고록으로 세자빈으로 간택된 이야기부터 입궁하여 세자빈이 된 후 회갑에 이르기 까지 50여 년간의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미쳐버린 이야기, 정적들의 모함으로 아버지·삼촌·동생들이 화를 입은 이야기(정조 대에 와서는 어지간하면 정조의 비호 아래 큰 화는 피했습니다.)들이 제1편에 나와 있습니다. 회갑연을 치르고 정조의 효도를 받으면서 행복하고 한가로운 때에 과거를 돌아보며 쓴 기록이라 할 수 있죠. 제2편, 3편, 4편은 ‘한가한 중에 쓴 기록’이 아닌 ‘한스러운 중에 쓴 기록’입니다. 홍봉한, 홍인한, 홍낙임 등 풍산 홍씨 가문의 신원 회복을 위해 쓴 글이죠. 분명 홍인한은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여 죽었으나 이 또한 한으로 남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사도세자 사건에 휘말려 홍봉한이 실권한 것이 억울하다며 제4편에서는 제1편에서 어물쩍 넘어갔던 사도세자 이야기를 상세히 서술해 두기도 했습니다. 사도세자의 이야기가 정조의 요청으로 영조 때 ≪승정원일기≫에서까지 세초된 만큼 사도세자에 관련된 궁중비사를 상세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후궁들이 머물렀던 그리고 정조, 순조, 혜경궁이 가득한 이 주변에서 그 흔적을 이제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저 무수히 많은 전각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지나가기 마련이죠. 허전함만이 있었을 여행날의 집복헌에는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한국 공예품들이었습니다. 전통을 이어오는 무형문화재 장인들과 현대의 장인들이 만들어 놓은 한국 공예품들은 이야기만 남아 전해지는 고독한 전각을 은은한 아름다움으로 채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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