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
원통 근처에서의 볼일을 모두 마치고 원통터미널로 돌아왔습니다. 터미널은 군복 입은 사람들로 무척 북적였습니다. 백령도에서 인천 가는 배를 기다리던 용기포여객선터미널이 문득 떠오르더군요. 버스터미널에서 집으로 갈 수 있다니 참 부러웠습니다. 원통에서 인제로 가는 버스는 많은 편입니다. 대부분의 버스가 원통과 인제를 동시에 경유지로 가지는 버스이기 때문이죠. 저도 터미널에서 조금 기다린 뒤 바로 버스를 탈 수 있었습니다. 버스는 10분을 달려 인제터미널에 저를 내려주었습니다. 인제터미널에서 문학관까지는 별로 멀지 않습니다. 단독주택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약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인제산촌민속박물관 옆에 박인환 문학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원래는 인제에서 원주를 거쳐 대구로 넘어가는 일정이 무척 고되어 박인환 문학관은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근데 갑자기 원통에서 만해마을 가는 버스 안에서 동생에게 카톡이 왔습니다. 보는데 동생이 박인환 문학관에서 박인환문학축제가 열리고 있으니 한번 가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문학축제 내용을 살펴보는데 전국책방거리가 열려 있더군요. 짐이 무거워서 책을 살 여유는 없었지만, 책구경을 좋아하는 제가 그것을 놓칠 수 없어 어떻게든 시간을 꽉꽉 채워 박인환 문학관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인제산촌민속박물관과 박인환 문학관 앞은 축제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다양한 사람이 많이 왔다기보다는 아이들이 부모님 손을 잡고 온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이기보다는 지역 내 주민들이 오신 경우가 많아 보였습니다. 저는 아이들로 북적거리는 축제장 옆쪽에 책방거리로 향했습니다. 말 그대로 책방거리였습니다. 책방들이 부스를 열어 책을 팔고 있었습니다. 아는 책들도 많았고, 사고 싶은 책들도 많았지만, 꾹 참았습니다. 가방이 더 무거워졌다가는 정말 힘들 것 같아서요. 하하.
그렇게 축제 구경을 가볍게 끝마치고 마당 뒤편의 문학관으로 향했습니다. 박인환 문학관이 인제에 있었지만, 가보지 않아도 괜찮겠다 싶었던 이유는 박인환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능 때 공부한 기억도 없었죠. 하지만, 나중에 문학관을 돌아보니 곳곳에서 박인환이라는 이름이 나와서 그냥 제가 무지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어쨌든 박인환 작가를 완전히 처음 만나는 것이다 보니 문학관에 들어갈 때부터 뭔가 어색했습니다. 모든 여행에서 공부를 안 하고 가더라도 일부는 이해할 수 있었는데 완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처음 만나는 작가의 문학관에 들어가려니 어색하고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색함은 감탄으로 바뀌었고, 걱정은 기우가 되었습니다. 박인환 문학관은 지금 생각해도 다른 문학관들과 차별화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작가의 생애와 작품을 중심으로 시간순으로 줄글과 유품을 나열하여 전시하는 것이 보통의 문학관들의 특징입니다. 물론 그것이 박인환 문학관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중심이 되지는 않습니다. 박인환 문학관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공간의 구현입니다. 박인환이 문인들과 같이 쏘다니던 명동 거리를 재현함으로써 시대의 분위기와 박인환의 삶을 간접 체험하도록 했습니다. 박인환이 운영했던 서점 마리서사, 값싼 양주를 공급하던 예술가들의 술집 포엠, 명동예술인들의 집합처 동방싸롱, 김수영 시인의 어머니께서 운영했던 빈대떡집 유명옥, 예술가들이 모여 떠들던 다방 모나리자와 봉선화 다방, 최불암 배우의 어머니께서 운영했던 막걸리집 은성까지 전부 구현되어 있습니다. 박인환을 비롯한 명동의 예술인들은 전쟁 전후 위에서 말한 곳들을 쏘다니며 예술과 시국을 논하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명동백작이라고 불렀다고 하죠.
그렇게 박인환의 문학이 탄생한 공간들을 지나치면 이제 박인환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인제가 고향인 그는 1936년 11세의 나이로 서울로 이사를 합니다. 그는 이때 이후로 평생을 서울에서 삽니다. 그는 서울에 정착하고 나서 어렸을 때부터 문학, 영화, 독서를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의 이모부가 그의 책상 서랍만 열면 영화 포스터가 쏟아졌다고 말할 정도였고, 책을 좋아해서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차렸다고 하니 그의 영화와 책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후 시국을 비판하는 글을 쓰다가 내무부 치안국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습니다. 시 <인천항>을 보면 그가 무사히 석방된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밤이 가까울수록
성조기가 퍼덕이는 숙사와
주둔소의 네온사인은 붉고
짠그의 불빛은 푸르며
마치 유니온 작크가 날리든
식민지 향항(香港)의 야경을 닮어간다
조선의 해항 인천의 부두가
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
상해의 밤을 소리 없이 닮어간다
<인천항> 中
*짠그: junk, 승객이나 화물을 운송하는 작은 배
*유니온 작크: Union Jack, 영국의 국기
해방 직후 미군정이 관리하는 인천항이 일제 식민지가 다스리던 상해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시로 썼으니 말 그대로 난리가 났을 겁니다. 큰 탈 없이 석방된 것이 다행이죠. 다만, 좌익인사 교화 및 전향을 목표로 한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주최하는 예술제전에서 시낭송을 한 것으로 보아 이후 정부에서 계속 압박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이후로 박인환의 시에서는 대놓고 사회를 비판하는 시들은 사라집니다. 이런 일들을 겪고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터집니다. 그의 시는 이제 비극적 현실에 대한 공감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다치고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그는 현실비판이 아니라 공허하고 허무하며 비애 가득한 현실에 초점을 맞추어 시를 씁니다.
그곳은 전란으로 폐허가 된 도읍
인간의 이름이 남지 않은 토지
하늘엔 구름도 없고
나는 삭풍 속에서 울었다.
<인제> 中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세월이 가면> 中
6.25전쟁 격전지이자 자신의 고향을 떠올리며 쓴 <인제>라는 시를 보면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참담함이 확 느껴집니다. 박인희 가수가 부른 국민 애창곡이었다는(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세월이 가면>도 이미 사라진 한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는 슬픔이 느껴지는 시이죠. 이렇게 슬픈 감성을 담아 시를 써냈기에 그는 현실에서 벗어난 시들만을 썼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쟁 이후 많은 사람이 스러져간 현실의 비극을 정확히 담아낸 시를 썼다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는 그냥 그가 느낀 현실을 시에 담아낸 것입니다.
박인환 작가는 꽤 다재다능해서 번역가와 영화평론가로서 활동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던 1956년 심장마비로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전후의 슬픔을 담아내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가 만약 더 오래 살았다면 어떤 시를 써 내려갔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점점 발전해가는 국토를 보며 희망찬 시를 썼을지 아니면 여전히 고통받는 사회적 취약 계층을 보며 사회의 슬픔을 담은 시를 썼을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할뿐더러 그가 당시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모르니까요.
박인환 문학관의 끝은 특별 전시관과 이어집니다. 그곳에서는 ‘바람을 쓰다’라는 주제의 이번 축제에 맞추어 박인환 작가의 <오월의 바람>이라는 시를 바탕으로 만든 시그림책 원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 바람은
세월을 알리고
그 바람은
내가 쓸쓸할 때 불어온다
그 바람은
나에게 젊음을 가르치고
그 바람은
봄이 떠나는 것을 말한다
그 바람은
오월의 바람
<오월의 바람>
오월의 바람은 매년 부는데 그는 이제 없습니다. 그는 낭만적인 삶을 살며 현실을 직시했고, 자신이 본 현실을 시에 자신의 감성으로 시에 담아냈습니다. 시대에 부는 바람을 자신의 바람을 담아 시에 써냈고, 그는 짧은 생을 마치고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조금이나마 그의 문학에 남았고, 그 유산은 전쟁의 비극을 뛰어넘어 아이들이 웃고 뛰어노는 축제와 아이들이 맘껏 공부할 수 있는 도서관(문학관 옆 인제 기적의 도서관)으로 이어졌습니다. 만약 그가 살아 돌아와 그날 아이들이 뛰어놀고 공부하는 것을 보았다면 무엇을 생각하고 말했을까요? 전쟁 이후의 지금을 도서관 이름처럼 기적이라 표현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기뻐하며 자신의 삶에 가득했던 허무함과 서글픔을 덜어냈을 겁니다. 작가가 죽고 많은 바람이 지난 오늘 바람을 타고 간 그 세상에선 그가 원했던 모든 낭만을 누리며 행복하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