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인제에서 원주를 거쳐 대구에 도착했습니다. 대구에 도착했을 때는 매우 늦은 밤이었습니다.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씻고 짐 정리하기 바빴죠. 뭘 구경할 만한 시간은 전혀 아니어서 잠이나 푹 잤습니다. 잠을 푹 잘 수 있던 이유는 딱 한 가지였습니다. 대구에 할당된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죠. 대구에 도착한 것은 월요일이었는데 월요일은 거의 모든 문학관이 쉬는 날이라 대구 곳곳을 돌아다니며 근대 문학과 관련된 곳들을 다녀보기로 했습니다. 그걸 하나하나 말하기엔 너무 두서가 없어 화요일에 방문한 대구문학관을 먼저 말하고 문학관에서 만난 작가들과 관련된 장소들을 하나하나 덧붙여 설명하는 식으로 글을 쓰고자 합니다.
대구문학관은 1912년 대구지역 최초의 일반은행인 선남상업은행이 있던 곳으로 1941년 조선상업은행 대구지점이 되었고 해방 후에는 한국상업은행(현재의 우리은행) 대구지점 건물로 있었습니다. 이후로 빈 건물로 있다가 2014년 대구시에서 공유지로 인수하여 대구문학관과 향촌문화관을 개장했습니다. 1, 2층은 향촌문화관이고 3, 4층은 대구 문학관이죠.
원래는 문학관만 보려 했으나 매표와 설명을 겸하시는 분의 강력한 추천으로 향촌문화관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향촌문화관은 6.25전쟁 전후 대구 중심부인 향촌동의 모습을 구현해 놓은 곳으로 대구의 근대사를 알기에도 좋고 사진을 찍으며 즐기기에도 무척 좋은 곳이었습니다. 1층은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까지의 역사를 설명한 후 6.25전쟁 즈음의 대구 모습을 구현해 놓아 무척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양복점 거리로 유명했던 중앙로,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깡통이나 드럼통으로 각종 철물을 만들었던 북성로 공구골목, 중앙로의 귀금속 상가, 납작만두, 따로국밥, 누른국수, 냉면 등의 먹을거리와 구제품, 수입품들을 팔던 교동시장, 예술가들의 개인전과 음악회가 열리던 대구 미국공보원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를 천천히 살펴본 후 2층으로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향촌문화관의 입구에서 ‘향촌동은 6.25전쟁과 함께 형성된 피란문인들과 예술인들의 정신적 고향이다.’라고 향촌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향촌동의 어느 장소들이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을까요? 2층에서 그에 관련된 전시가 한가득 있습니다. 1947년 설립되어 <귀국선>, <전우야 잘 자라>, <휘날리는 태극기>, <전선야곡>, <아내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등의 곡들을 제작한 오리엔트레코드사, 6.25전쟁으로 무너진 서울 국립중앙극장을 대신해 국립중앙극장으로 지정되어 영화를 상영하고 다양한 행사를 했던 문화극장, 자유극장 옆 영화인들의 즐겨 찾던 술집이었던 카스바, 피란시절 문인들의 피란처가 되어준 막걸리집, 홀 중앙에 그랜드피아노와 바이올린이 놓여있던 백조 다방까지 문화예술인들이 향촌동에서 자주 찾던 곳들이 잘 구현되어 있습니다.
향촌문화관에서 6.25전쟁 전후 문화예술인들이 어떤 공간에서 삶을 살았는지 보았다면 이제 한층 더 올라가 본격적으로 대구에서 활약했던 문학인들에 대해 알아볼 차례입니다. 대구문학관의 처음은 대구를 빛낸 문인들의 글과 그들의 이름과 얼굴이 새겨진 죽순 조형물이 보입니다. 대구광역시에서 창립된 시 전문 동인 죽순시인구락부와 그들이 간행한 시 문학 전문지 ≪죽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한국 근현대문학이 죽순처럼 빠르고 잘 성장할 수 있게 대구 문학이 그 기반이 되었다는 자부심이 들어가 있는 조형물이기도 합니다.
그 이후로는 대구에 있었던 많은 문학인이 나옵니다. 구상, 최정희, 김동리, 박목월, 조지훈, 신동집, 박양균, 김춘수, 이영도, 유치환, 이호우, 이육사, 이응창(아동문학가) 등을 그린 입간판들이 죽 서 있죠. 입간판들은 그들이 자주 갔던 막걸리집인 감나무집과 아루스 다방을 배경으로 놓여있었습니다. 아루스 다방은 대구 출신의 화가 이인성이 운영했던 것으로 유명하죠. 아루스 다방을 지나면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대구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문인들을 적어두었습니다. 무척 유명한 사람들이 많더군요. 그리고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대구 문단의 흐름 또한 적어놓았습니다. 대구지역 문학의 전체 흐름을 알기 위해서 이만한 곳이 없을 듯합니다.
대구지역의 여러 문인을 소개해 놓은 곳을 빠져나오면 세 명의 문인들을 상세히 소개한 전시실이 나옵니다. 대구 문학관이 생각하는 대구 근대 문학의 중심인물 세 명을 뽑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세 명은 이상화, 현진건, 이장희입니다. 이 셋은 서로 교류를 자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대구에서 보냈다는 점, 짧은 생을 살아 해방 전에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점, 일제에 단 한 번도 타협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문학 세계는 각기 다 달랐는데요 대구 시가지에 남은 이상화의 흔적부터 한 번 좇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화 작가는 대구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대단한 명문가여서 이상화 생가터를 가보면 지금은 서로 다른 3채의 건물이 따로 들어가 있을 정도입니다. 다행히 일부는 ‘라일락뜨락1956’이라는 카페로 변모하여 예전 그 모습을 조금이나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월요일엔 열지 않아 저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상화 작가의 가문은 돈만 잘 버는 가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상화 작가의 백부 이일우는 민족 자본가로 우현서루를 운영하며 서생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여 민족지사를 양성했습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이상화는 3.1운동 때 계성학교의 책임을 맡아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듯 어렸을 때부터 독립운동을 했지만, 그의 처음 시들은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상화는 ≪백조≫의 동인으로 참여하여 <나의 침실로> 같은 낭만적 서정시를 발표했습니다. 이 <나의 침실로>의 문학비는 현재 달성공원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 만들어진 문학비로 알려진 이 시비는 전서체로 상화시비(相和詩碑)라고 적혀 있습니다. 제목을 적은 것은 한국의 유명한 서예가이자 간송 전형필의 스승으로 알려진 위창 오세창입니다. 시비에 적힌 구절을 살펴보죠.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나의 침실로> 中
무척 낭만적이고 서정적입니다. 이상화 작가는 이런 시들을 쓰며 프랑스 유학을 꿈꿨고, 그를 위해 도쿄로 건너가 프랑스어를 공부하였습니다. 하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을 겪고 민족의 비참한 현실에 직면한 뒤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조국으로 귀국합니다. 그리고 현실로 눈을 돌려 민족의 비극을 노래하는 시를 썼습니다. 이때 써진 대표작이 널리 알려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입니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中
길을 못 찾고 끝도 없이 헤매는 혼, 푸른 봄의 사이를 다리를 절며 걷는 그 현실은 아마 봄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이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우리의 들을 빼앗겨 남의 들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던 작가는 독립운동에 계속 투신합니다. 신간회에도 참여했고, 그의 집은 항일 인사들의 아지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이상화 작가에 대한 감시와 가택수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1937년에는 독립투사인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만경에 3개월간 갔다 와서 일본 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 말경 석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고, 가세가 기울면서 이상화 작가는 현 이상화 고택의 위치로 이사를 합니다.
이상화 고택은 현재 서상돈 고택, 계산예가 바로 옆에 있습니다. 무척 깔끔하게 잘 꾸며 놓았고, 이상화 작가에 관한 이런저런 것들을 전시해 두고 있습니다. 마당에는 이상화 작가의 시비를 몇 개 두어 이곳이 시인의 집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루에 앉아 민족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현실을 고뇌하며 시를 썼던 이상화 작가를 떠올려보았습니다. 해방을 보지 못하고 하늘로 떠나신 안타까움과 그의 강렬한 의지가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평화로운 낮의 한때에 걸맞은 아담한 기와집. 이 편안한 한때를 맞이할 수 있게 독립을 위해 늘 힘썼던 민족시인을 기렸습니다.
현진건 작가는 대구에 그리 많은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만 대구에서 보내고 서울로 올라가 계속 살았기 때문이죠. 그래도 대구에서 사는 이상화, 이장희와 교류하며 대구 문단과의 연결고리를 끊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집안 또한 무척 좋아 그는 10대 때 도쿄와 상해에 유학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유학 이후 서울에 정착하여 신변체험적인 소설들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이상화와 마찬가지로 ≪백조≫에 동인으로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조선 민중들의 힘든 삶을 다룬 리얼리즘적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이 대표적인 예가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운수 좋은 날≫입니다. 이제는 약간 유행어처럼 사용되어 웃음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대사는 무척 비극적인 부분에 쓰입니다. 아내의 죽음을 앞두고도 병원 한 번 데려가지 못하고, 일을 나갔다가 퇴근 후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는 씁쓸함이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이처럼 현진건 작가는 민중의 비극적 삶에 집중했고, 그것을 만들어낸 일제를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생계를 기자로 일하면서 꾸렸습니다. 그가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있을 당시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말소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일제는 발칵 뒤집혔고, 이를 허가한 현진건 또한 1년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합니다. 이후 현진건의 삶은 고달파졌고, 투자까지 실패하며 현진건은 더욱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일제에 협력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43년 4월 25일 같이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던 동료 이상화와 같은 날 별세합니다. 그의 죽음은 씁쓸함을 남깁니다. 민족의 독립을 염원했던 독립운동가이자 민중의 삶을 깊이 파헤쳐 리얼리즘 소설을 쓰고, 민족의 역사를 재구성해 ≪무영탑≫ 같은 역사 소설까지 남겼던 문인은 가난하게 죽어갔습니다. 그의 업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서울과 대구에 있던 그의 생가는 모두 헐려 나갔고, 표지판들만이 그 자리를 외로이 지키고 있습니다. 대구의 생가터는 이제는 대구 더 현대의 주차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운수 좋은 날≫의 결말과 그의 죽음만큼이나 씁쓸한 현실입니다.
이장희 작가는 박인환 작가처럼 이번 여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작가입니다. 이장희 작가 또한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대구의 부호이자 당대의 유명한 친일파였던 이병학이 이장희 작가의 아버지이죠. 아버지의 힘으로 일본 교토 중학교까지 졸업했으나 작가는 친일파였던 아버지가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아버지가 시키는 일본인들과의 중간 통역을 모두 거절하였고, 총독부 관리 자리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교우 관계도 매우 좁게 형성하여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게 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지원이 끊긴 이후로 가난해진 그는 1929년 28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음독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삶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일제와 타협하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시 또한 현실 참여적이지는 않고 감각적이고 낭만적이죠.
날마다 밤마다
내 가슴에 품겨서
아프다 아프다고 발버둥치는
가엾은 새 한 마리
나는 자장가를 부르며
잠재우려 하지만
그저 아프다 아프다고
울기만 합니다
어느덧 자장가도
눈물에 떨구요
<새 한 마리>
그는 현실에 타협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비극적인 현실을 맞았습니다. 그는 고독했고, 우울했으며, 힘들었습니다. 교우 관계가 넓지 않아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거의 없었고, 자기 자신이 느끼는 부끄러움 때문에 자신을 밖으로 내보이는 것도 힘들어했습니다. 그는 그래서 자기 자신을 위로해야 했습니다. 밤마다 고통을 느끼는 새를 달래보려 하지만, 늘 실패하고, 결국엔 달래는 이의 자장가도 눈물에 떱니다. 자기 자신의 고통을 투영한 새를 자기 자신의 자장가로 위로하지만, 마지막엔 자장가마저도 눈물에서 벗어나지 못하죠. 그의 비극적인 삶이 느껴집니다. 그의 생가터는 현진건의 생가터보다 더 심각해 그 어떠한 표지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현 하늘마당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꾸며진 곳이 이장희 생가터로 추정되고 있지만, 이곳이 우현서루를 만든 이상화 작가의 백부 이일우의 생가터와 맞물려서 우현서루의 기록만 찾아볼 수 있을 뿐 이장희 작가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고독했던 그의 죽음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 무척 가슴이 아픕니다.
대구문학관을 통해 본 대구의 문학기행은 여기서 끝입니다. 물론 제가 놓친 것도 많고, 대구 문단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한 것도 아닙니다만, 일제강점기부터 6.25전쟁 전후까지 이어지는 시기 동안 대구 문단이 무척 융성해 있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구 문단의 융성은 일제강점기 짧은 생을 살았지만, 각기 다른 문학관으로 다양한 작품을 쓴 세 명의 작가가 있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가난하게 살지언정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올곧은 삶을 살며 자신만의 문학관을 만들어 간 세 명의 작가들과 제가 이 글에 적지 못한 더 많은 작가에게 그저 감사함을 표할 따름입니다. 늘 어려운 현실을 살았던 그들이 저세상에서는 서로 모여 담소를 나누고 함께 웃는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