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안에서 현세를 사랑으로 품고자 한 시인, 구상

칠곡 왜관

by baekja

대구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20여 분 정도 달리면 왜관역에 도착합니다. 대구나 경주를 가면서 왜관역을 지나친 적은 많았지만, 왜관역에 내려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칠곡군이란 지명도 들을 일이 거의 없죠. 경북의 대도시인 구미와 대구 사이에 끼인 도시로 군치고는 역 앞이 깔끔하고 꽤 발달해 보였습니다. 왜관역에서 구상문학관까지 가는 길엔 멋있게 지어진 왜관성당과 멀리 보이는 낙동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낙동강으로 향하는 큰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골목으로 들어가면 순심여중고와 왜관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왜관초등학교를 넘어 오래된 상가와 그 옆의 아파트 단지쯤 오면 2차선의 좁은 길 건너편에 구상문학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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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왜관성당, 오른쪽: 구상문학관


구상이라는 이름은 아예 안 들어본 이름은 아니지만, 자주 들어본 이름도 아니기는 합니다. 구상 작가의 <초토(焦土)의 시>는 고등학교 수능 국어를 공부하며 누구나 한 번쯤 읽어봤을 만한 시죠. 그것 외에도 이중섭과 친했다는 점이 제가 구상 작가에 대해 기억하는 유일한 점입니다. 정작 그에 삶에 대해 알고 있는 점은 하나도 없었죠. 대구문학관에서만 잠깐 문인들을 많이 지원해주고 응원했던 발이 넓은 시인이라고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일반에게 그 삶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답게 문학관 주변은 조용했고, 찾아오는 이도 없었습니다. 제가 들어갈 때부터 나갈 때까지 제가 유일한 관람객이었죠. 그래서 차분하게 그의 삶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20230919_150646.jpg 구상문학관 내부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난 구상은 1923년 북한 함경도 지구 선교를 맡게 된 독일계 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사업을 위촉받은 아버지를 따라 원산 근교인 덕원으로 이주합니다. 그는 1938년에 가톨릭 신부가 되고자 베네딕도 수도원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3년 만에 환속했습니다. 이후 사람을 버렸다며 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돌아 일본 도쿄로 망명했습니다. 거기서 일급 노동자로 일하며 일본대학 종교과와 명치대학 문예과에 시험을 쳐 모두 합격한 뒤 종교과를 선택해 진학하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국내로 돌아와 조용히 지냈으나 해방 후 문인으로 본격적으로 활동을 합니다. 어렸을 때 구상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구상의 삶에서 크리스트교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현세의 무수한 갈등을 치유하고 봉합하고자 크리스트교에서 말하는 모두에 대한 사랑을 중시했습니다.


이런 사상을 가진 그에게 해방 후 북한은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시집 ≪응향≫에 실린 그의 시는 북한의 신문과 방송에서 규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초월적 세계를 초연히 다루는 그의 시는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고, 이는 북한에서 퇴폐주의적이며, 악마주의적이요, 부르조아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필화(筆禍)를 입고 1947년 2월에 구상은 탈출 월남하였습니다. 그 이후 구상은 이 사건의 경위를 발표하고 서울에서 시를 발표하며 서울 문단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는 1955년 천주교가 경영을 맡게 된 대구매일신문의 상임고문을 맡았습니다. 여기서 일이 터지는데 대구매일의 기사 중 하나가 여당의 심기를 건드려 대구매일을 정치 폭도들이 테러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구상은 이데올로기나 정치사상이라는 것이 우선되는 것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점차 그가 생각한 이상향은 이데올로기와 사상 너머 인간성의 회복된 이상향으로 굳어져 갔습니다.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적군의 묘지 앞에서-초토(焦土)의 시 8> 中


초토의 시에서는 그의 이러한 생각이 잘 드러납니다.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인해 이승에서 만들어진 미움은 죽고 나서는 의미가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은 자들의 원한은 오히려 삶아 남은 자의 바람 속에 남아 있게 되었죠. 그들이 이루지 못한 소망들을 절절히 느끼며 있음에도 그저 자연은 무상합니다. 그리고 그 무상한 자연 속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비극은 계속 만들어지겠지요. 계속되는 비극에 만들어질 은혜(적군의 묘지를 만들어줌)와 원한을 생각하니 화자는 무덤 앞에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서로가 대립하는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으면 쏴 죽이는 것이 당연하던 그때, 구상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죽이는 이데올로기로 인한 갈등이 죽어서 무슨 상관이 있는가. 죽은 이들에게 너그러움과 사랑을 베풀자. 사실 이건 죽은 이들뿐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에게도 포함되는 말이겠죠. 인간의 깊은 갈등을 서로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와 사랑으로 해소하자는 주장일 것입니다.


구상 시인은 배우자의 지극한 보호 정성으로 오래오래 살았지만, 결핵으로 인해 건강은 늘 좋지 못했습니다. 그때 당시 결핵은 치료하기 어려웠으니 늘 그의 삶은 죽음과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늘 그가 현재에 집중하게 했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어차피 내세에 천국이 있으니 현세에 집중하는 것이 어떤 쓸모가 있냐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보다 신실했던 크리스트교인이었던 구상은 이와는 다르게 과거와 오늘과 미래가 이어지니 이미 오늘이 사람들이 바라마지 않는 영원에 이어져 있고, 그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즉, 어느 때든 삶이 이어지니 오늘의 한순간 한순간도 중요하다는 뜻이죠.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오늘> 中


오늘에 충실한 삶을 살아서일까요? 그는 장수했고, 노벨문학상 최종심 후보에 2번 올랐으며, 대한민국 문인으로서는 누릴 수 있는 영광을 다 누리고 살다 타계했습니다. 일찍 세상을 떠난 그의 절친한 친구인 이중섭은 그가 부러웠을 겁니다. 그의 작품 <시인 구상의 가족>에서는 행복한 구상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죠. 가족과 떨어져 있던 이중섭은 그런 삶을 살기를 바랐고, 이승에서 그런 삶을 얻을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세상을 일찍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중섭과 비교해봤을 때 구상은 참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많은 예술인을 생각해봐도 이만큼 좋은 삶을 살고 떠난 이는 많지 않죠. 문학관은 조용하고 사람이 없었지만, 쓸쓸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그러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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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가 넘치던 때 작가 구상은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외부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라 모든 인간을 사랑하자는 내면의 소리요. 인간은 늘 생각 차이로 혹은 이권을 얻기 위해서 같은 종을 다치고 죽게 했습니다. 그러한 것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의 시기에서 시인 구상은 크리스트교의 가장 큰 진리를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다. 모두를 향한 사랑과 포용.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현세를 바라보고 글들을 썼습니다. 여전히 전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요즘 포용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그의 시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마음속 깊은 울림을 전해줍니다. 그는 귀천하였으나 그의 생각만은 남아 영원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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